랜디 바스

파일:Attachment/Randy Bass.jpg
左:현재 右:리즈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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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프로야구 오너즈 리그(プロ野球オーナーズリーグ) 게임 광고에 출연한 모습.
이름랜디 윌리엄 배스
(Randy William Bass, ランディ・バース)
생년월일1954년 3월 13일
출신지미국 오클라호마 주 로턴 시
소속당민주당
포지션외야수
투타우투좌타
프로입단1972년 드래프트 7라운드
소속팀미네소타 트윈스(1977)
캔자스시티 로열스 (1978)
몬트리올 엑스포스 (1979)
샌디에이고 파드리스(1980~1982)
텍사스 레인저스 (1982)
한신 타이거스 (1983~1988)
1985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MVP
기누가사 사치오
(히로시마 도요 카프)
랜디 바스
(한신 타이거스
)
키타벳푸 마나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85년 일본시리즈 MVP
나가시마 기요유키
(히로시마 도요 카프)
랜디 바스
(한신 타이거스)
쿠도 키미야스
(세이부 라이온즈)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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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부터 1982년까지 메이저리그에서 뛰었으며 1983년부터 1988년까지 일본프로야구 한신 타이거즈에서 활약한 前 프로야구 선수.
한신 팬들에게는 지금까지도 신(神)적인 존재[1]로 남아있는 선수로, 비단 한신 팬들 뿐만 아니라 일본의 모든 야구 팬들에게도 역대 최강의 도우미(史上最強の助っ人)한신 팬들에게 전해 나는 영원한 도우미라고라는 이미지로 남아 있는 선수다. 한신 올드팬 들은 1960년대 한신의 에이스로 활약한 외국인 투수 진 바키와 바스를 묶어 한신의 역대 최강 외국인 투타 라고도 부른다.

같은 용병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있었던 돌격 크로마티 고교의 모티브가 된(...) 워렌 크로마티라이벌 관계를 구축했었다.

2 선수생활

1985년 일본시리즈 3차전에서 3경기 연속 홈런을 치고 그라운드를 돌고 있는 바스.

일본프로야구 최강의 외국인 타자로 이름을 날린 건 두말할 것 없이 역대 최고수준의 타격능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랜디 바스의 통산 기록

바스는 아들의 병 때문에 갑작스럽게 미국으로 떠난 1988년을 제외한 풀타임 5시즌 중 가장 못한 시즌의 OPS가 0.971이고 홈런은 5시즌 동안 통산 202홈런에 1986년도 기록은 거의 배리 본즈가 일본에 강림한 수준의 임팩트.

그것도 모자라 양대리그제 시행 후 한신 타이거즈의 유일한 1985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그 해에 랜디 바스는 174안타, 54홈런, 134타점, 타율 0.350로 센트럴리그 용병 최초로 타격삼관왕에 오른다.[2][3] 이 해에 기록한 54홈런은 2001년 터피 로즈가 55홈런을 기록할 때까지 그 동안 왕정치가 1964년 55홈런 일본신기록을 세우고 난 뒤에 기록한 최다홈런 기록이었으며, 센트럴리그 최초의 외국인 홈런왕이기도 했다.(왕정치를 일본 야구팬의 어느 누가 외국인 선수로 보던가?)

물론 그 당시 일본프로야구에서 암묵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던 왕정치 홈런 기록 보호 작전으로 왕정치의 기록을 깨지는 못했지만... 당시, 시즌 마지막 두 게임을 남겨놓고서 요미우리와 붙게 되었는데, 당시 요미우리의 감독은 왕정치. 그리고 바스는 왕정치의 홈런 기록에 1개차인 54개로 따라잡은 상황이었다. 잘만하면 홈런 기록을 갈아치우게 될 상황에서, 결국 요미우리는 에이스인 에가와 스구루를 제외한 투수들이 승부를 피하면서[4] 치졸하게 감독의 시즌최다홈런 기록을 지켜내게 되었다. 왕정치는 후에 '나는 고의사구 지시를 내린 적이 없다'고 하였고, 이 말은 맞는 말이긴 하다.[5] 하지만 리그 순위와 상관없는 게임에서 자기 편 투수들이 랜디 바스와 의도적으로 승부를 피하는 것을 보고 묵인했다는 점에서 변명에 가깝다.[6]

요미우리 투수진은 감독의 홈런기록을 지켜내긴 하였으나, 볼넷남발로 인해 결과적으로 바스의 출루율이 올라가게 되어, 최고출루율 타이틀을 선사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7]

물론 랜디 바스와 함께 전설적인 클린업 트리오를 구축했던 카케후 마사유키, 오카다 아키노부또한 팀의 첫 일본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바스-카게후-오카다로 이어지는 백스크린 3연발의 전설은 한신팬들의 마음속 깊이 남아있으며,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85년 4월 17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고시엔 홈 경기에서 3-1로 뒤지고 있던 7회말 투아웃 상황. 당시 요미우리의 선발투수였던 마키하라 히로미는 7회까지 1실점으로 한신의 타선을 잘 틀어막고 있었다. 바스가 타석에 들어섰을 때에는 주자를 1-2루에 두고 있었으나, 당시 바스의 타율은 0.133홈런0개. 누가 예상하더라도 마키하라가 무난히 이닝을 마무리하고 내려 갈 줄 알았으나... 전설의 대역전극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3번타자 바스가 당시 요미우리의 선발 투수였던 마키하라 히로미[8]의 초구 실투를 받아쳐 센터 백스크린으로 날리는 쓰리런 홈런으로 역전, 4번타자인 카케후 마사유키가 또다시 센터 백스크린을 넘기는 솔로홈런, 그리고 마지막으로 5번타자인 오카다 아키노부도 역시 센터 백스크린으로 넘기는 솔로홈런을 날려서 역전승을 하게 되었다. 참고로 당시 바스는 시즌 시작후 타율 0.133로 꽤나 막장(...)이었으나 이 시합에서의 홈런을 계기로 당해 타격삼관왕 등극에 시동을 걸게 된다. 그리고 한신도 질주하여 한신 타이거즈 팬들의 숙원이었던 일본시리즈 우승도 달성한다.



이것이 바로 전설의 백스크린 3연발. 한신 타이거즈팬들의 롯기도문급 필수영상이자 거인팬&마키하라팬 금지영상.

이듬해인 1986년에는 일본프로야구 한시즌 최고타율 기록인 0.389의 대기록을 수립한다.[9] 그리고 176안타, 47홈런, 109타점을 기록하며 2년연속으로 타격3관왕을 기록했지만, 센트럴리그 MVP는 히로시마의 에이스 키타벳푸 마나부에게 돌아갔다. 키타벳푸도 18승 4패 평균자책점 2.43으로 투수 2관왕을 차지한 훌륭한 투수였고 소속팀인 히로시마의 우승을 이끈 주역이긴 했지만, 바스만큼 압도적인 성적은 아니었다. 일본의 야구 팬들 사이에서는 당시 투표인단 중에서 외국인에게 2년 연속 MVP를 주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라는 의견이 정설로 통하고 있다.

어쨌든 한신 팬들은 바스가 앞으로도 계속 한신의 타선을 이끌어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바스는 1988년 아들의 지병 문제로 인해 구단과 갈등을 빚다가 해고당해 미국으로 건너갔고, 그 이후 은퇴한다. 계약상 '가족의 병원치료가 필요할 경우, 구단이 이를 부담한다'는 내용이 있었으나, 한신은 거액의 병원비 지불을 꺼려하여 바스를 해고했다고 한다. 이후 한신 구단 대표가 도쿄의 한 호텔에서 투신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바스와의 재계약 문제로 인한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라는 추측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렇듯 바스가 떠난 이후,구단 내외의 분위기는 매우 흉흉했다.

...그리고 한신 타이거즈는 1987~2002년까지[10] 롯데 자이언츠8888577와 맞먹는 초유의 암흑기를 지내게 된다.

일본프로야구 통산 기록은
614시합 출전 / 통산타율 .337 / 통산출루율 .418 / 743안타 / 202홈런

3 이모저모

  • 한신 타이거스의 암흑기가 시작된 원인(?)도 랜디 바스. 1985년 첫 우승을 기념하기 위해 오사카 시민들은 한신 선수들을 닮은 사람들을 도톤보리 강에 던져버리면서 자축하였는데, 랜디 바스는 외국인이니 닮은 사람을 찾을 길이 없었다. 이에 군중들은 근처에 KFC 앞에 서 있는 할랜드 샌더스 인형을 강에 집어던졌고 커넬께서는 한신에 저주를 내렸다.
  • 바스는 일본생활에 잘 적응한 정도가 아니라 소속구단인 한신을 정말 사랑했고 귀화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은퇴 뒤엔 한신에서 코치를 하는게 꿈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들의 치료문제 때문에 구단에서 나몰라라 하는 바람에 한때 귀화까지 하려고 했던 랜디 바스는 엄청난 배신감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은 그나마 개선됐지만 이때 한신 프런트는 막장 오브 막장이었다.
  • 2004년에 민주당 소속으로 미국 오클라호마 주 상원 의원에 당선되었고, 2016년 현재도 계속 상원의원을 역임중. 정치가로서의 능력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는 듯. 다만 고향에서는 동료 의원들마저도 자신이 일본 야구에서 어떤 레전드급 활약을 했는지는 잘 모른다고 한다...
  •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자주 일본을 방문하고 있다. 일본프로야구 OB팀들의 모임인 마스터리그에도 선수[11]로 등록되어 있으며, 방송 출연이나 광고 촬영도 종종 하고 있다.

4 바스의 재래와 바스의 재래의 재래

랜디 바스가 이렇게 엄청난 활약을 한 선수였기 때문에 관서지방 언론은 한신 타이거스에 새로운 용병 선수가 입단할 때마다, 바스처럼 활약해줄 것을 기대하면서 바스의 재래(バースの再来)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 말을 들은 선수들만 지금까지 수십 명 이상.

그런데 이 바스의 재래라는 말을 들은 선수마다 하나같이 먹튀가 되거나 유리몸이거나 한 시즌만에 쫓겨났기 때문에 일본팬들사이에서는 바스의 재래 혹은 바스2세라는 말은 '바스처럼 불운하게 퇴단한다' 또는 '(안좋은 의미로)바스처럼 전설이 되었다'를 뜻하게 돼버렸다. 더 간단히 말하자면 용병들의 사망플래그 마이크 그린웰[12], 케빈 멘치...

바스의 재래의 재래(バースの再来の再来)는 이 선수도 앞서 바스의 재래라는 말을 들었던 선수처럼 또다시 먹튀 용병이 되었다는 팬들의 자조적인 비아냥.[13] 두 표현 다 일본의 야구팬들에게는 상당히 유명한 말이다.
  1. 참고로 한신팬들은 랜디 바스의 이름 뒤에 항상 様(사마)라는 존칭을 붙인다.
  2. 최고출루율부문과, 당시의 타이틀이었던 최다승리타점부문을 포함하면 타격오관왕.
  3. 퍼시픽리그 용병 최초의 삼관왕은 같은 니시노미야에 있던 한큐 브레이브스부머 웰즈가 1984년 수상한 바 있다. 참고로 이 해 한큐는 퍼시픽리그 우승을 차지했고(일본시리즈에선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패배) 이것이 한큐 시대의 마지막 우승이 되었다.
  4. 기록상으로는 고의사구에 해당하지 않는다. 고의사구가 성립되려면 마지막 네번 째 볼을 포수가 일어선 상태에서 받아야 하기 때문. 실제로 이 해에 바스가 얻어낸 기록상의 고의사구는 불과 5개이다. 오히려 타율 3할8푼9리를 기록한 그 다음해의 고의사구가 18개였다. 고의사구는 아니었다. 단지 포수를 앉혀놓고 도저히 칠 수 없는 볼을 던졌을 뿐.
  5. 실제 지시를 내린 것은 당시 투수코치였던 호리우치 츠네오였다고.
  6. 후에 호크스 감독을 맡았을 적의 터피 로즈 때도 침묵했다. 마찬가지로 이 때도 호크스 투수들이 알아서 기록상 고의 사구가 아닌 바깥쪽 한참 빠지는 볼, 바운드 볼 등 도저히 칠 수 없는 공만 던졌다.
  7. 하지만 사사구 개수 또한 3할8푼9리를 친 그 다음해가 훨씬 많았다. 아무래도 그 다음해의 바스가 완전체에 가까왔기 때문.
  8. 참고로 마키하라 히로미는 요미우리에서만 19년 통산 159승 통산 방어율 3.19라는 우수한 기록을 남긴 대투수로, 퍼펙트 게임을 기록한 적이 있어 '미스터 퍼펙트'라고 불리기도 한다. 참고로 현재까지 NPB에선 마키하라가 마지막으로 퍼펙트 게임을 기록한 투수다. 対 한신전의 통산 전적은 38승 10패 10완투의 절대우위인데 어째선지 이 날은 와장창 두들겨 맞았다.
  9. 기록수립 당시까지의 일본프로야구 시즌 최고타율은 장훈이 1970년에 기록한 0.383 이었다. 16년만의 기록 경신. 그럼 왕정치 홈런 기록은 왜..
  10. 이 기간 동안 한신은 리그 우승은 커녕 A클래스도 1992년 딱 한 번, 그것도 교진군과 공동 2위로 했다. 그 이외엔(...)
  11. 팀은 오사카 로망즈
  12. 이 분은 에스마일린 카리대도 울고 갈 수준의 먹튀행각을 시전하였다.
  13. 90년대 한신에서 4년 연속으로 4번 타자를 맡았던 외국인이 시즌 도중에 쫓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