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James Alvin Palmer |
생년월일 | 1945년 10월 15일 |
국적 | 미국 |
출신지 | 뉴욕 |
포지션 | 선발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63년 볼티모어 오리올스 자유계약 |
소속팀 | 볼티모어 오리올스(1965~1984) |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영구결번 | |||
4 | 5 | 8 | 20 |
얼 위버 | 브룩스 로빈슨 | 칼 립켄 주니어 | 프랭크 로빈슨 |
22 | 33 | 42 | |
짐 파머 | 에디 머레이 | 재키 로빈슨 |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짐 파머 | |
헌액 연도 | 1990년 |
헌액 방식 | 기자단(BBWAA) 투표 |
투표 결과 | 92.5% (1회) |
1973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사이 영 상 | |||||
게일로드 페리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 → | 짐 파머 (볼티모어 오리올스) | → | 캣피시 헌터 (오클랜드 어슬레틱스) | |
1975년~1976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사이 영 상 | |||||
캣피시 헌터 (오클랜드 어슬레틱스) | → | 짐 파머 (볼티모어 오리올스) | → | 스파키 라일 (뉴욕 양키스) |
1 소개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대투수로, 20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부상과 싸우며 오리올스에 헌신, 팀을 6번 리그 우승과 3번의 월드 시리즈 챔피언으로 이끌었고 세 차례 사이영상을 수상한 투수다. 다시말해, 볼티모어의 리즈시절을 이끈 에이스.[1]
통산 성적은 20시즌 동안 268승 152패, 2.86 ERA, 3948이닝, 2212K, K/9 5.04, BB/9 2.98, K/BB 1.68, HR/9 0.69, 211완투 53완봉을 기록했다.
2 부상으로 얼룩진 선수생활 초기
1963년 볼티모어에 입단한 파머는 밀트 파파스[2]가 신시내티 레즈로 트레이드[3]된 1966년 로테이션에 합류하여 팀내 최다승을 거두는 활약을 펼쳐 팀의 월드시리즈 우승에 공헌했다. 하지만 이듬해 9경기 등판에 그친 파머는 부상을 당하며 1년 넘게 개점휴업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파머는 재기에 대한 불굴의 의지로 1년 넘는 재활훈련을 성공적으로 소화, 비록 예전의 강속구는 잃었지만 더 날카로워진 브레이킹볼과 체인지업을 갖고 돌아왔다. 부상 방지를 위해 투구폼도 개조하여 하이 키킹 딜리버리로 개조, 메이저리그에서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딜리버리 중 하나라 평을 받는 폼을 완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수생활 내내 잔부상에 시달리게 된다. 오죽하면 얼 위버 감독이 "중국 사람들이 '말띠 해' '용띠 해'로 구분한다면 나는 '팔꿈치의 해' '어깨의 해'로 기억한다"고 했을 정도.
3 오리올스의 에이스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 아메리칸리그는 (뉴욕 양키스가 버티긴 했지만)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리즈시절이었다. 또한 파머의 리즈시절이었다.
그는 1970년부터 1978년까지 단 한시즌을 제외하고 모두 20승 고지를 밟았으며, 1973년 사이영상을 수상한데 이어 1975년과 1976년에 아메리칸리그 최초의 사이영상 2연패를 달성했다. 이닝 소화력도 대단하여 1975년부터 1977년까지 3년 연속으로 리그 최다 이닝을 소화했고, 1970년대 다승(186) 완투(174) 평균자책(2.58) 1위 투수라는 진기록을 갖게 되었다.
비록 이 기간 동안 오리올스의 전력 자체가 매우 강했던 것은 사실[4]이지만, 마운드에서 리그를 정복하던 에이스 짐 파머가 없었다면 월드시리즈 3회 우승이라는 금자탑은 없었을 것이다.
4 영구결번, 그리고 쿠퍼스타운 입성
파머는 나이 38세 시즌인 1984년 ERA 9점대를 기록하는 부진을 겪고 은퇴 권유를 거절하여 방출되어 다시는 MLB 마운드에 서지 못했다. 하지만 1985년 볼티모어 오리올스는 그의 번호였던 22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고, 1990년 명예의 전당 후보에 이름을 올린 파머는 비록 300승을 거두진 못했지만 오리올스의 20년 프랜차이즈 투수라는 점을 앞세워 표를 끌어모았고, 첫 투표에서 92.57%의 높은 지지율로 헌액되었다.
현재는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전속 해설자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