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친한 동료인 또 다른 전설 칼 립켄 주니어와 함께. 주먹으로 치는 것 같지만, 실은 둘이 워낙 친해서 찍은 설정샷이라고 한다.
이름 | Eddie Clarence Murray |
생년월일 | 1956년 2월 24일 |
국적 | 미국 |
출신지 |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
포지션 | 1루수/지명타자 |
투타 | 우투양타 |
프로입단 | 1973년 드래프트 3라운드(볼티모어 오리올스) |
소속팀 | 볼티모어 오리올스(1977~1988) LA 다저스(1989~1991) 뉴욕 메츠(1992~1993) 클리블랜드 인디언스(1994~1996) 볼티모어 오리올스(1996) 애너하임 에인절스(1997) LA 다저스(1997) |
1977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신인왕 | |||||
마크 피드리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 | 에디 머레이 (볼티모어 오리올스) | → | 루 위태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영구결번 | |||
4 | 5 | 8 | 20 |
얼 위버 | 브룩스 로빈슨 | 칼 립켄 주니어 | 프랭크 로빈슨 |
22 | 33 | 42 | |
짐 파머 | 에디 머레이 | 재키 로빈슨 |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에디 머레이 | |
헌액 연도 | 2003년 |
헌액 방식 | 기자단(BBWAA) 투표 |
투표 결과 | 85.3% (1회) |
1 개요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1루수이자 지명타자. 메이저리그에서 미키 맨틀, 치퍼 존스[1] 다음가는 스위치타자로 평가받고 있다.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레전드로 화려한 시즌은 많지 않지만 매번 꾸준한 활약으로 메이저리그에서 단 5명뿐인 500홈런 3000안타를 달성한 타자다[2]. 별명도 그래서 Steady Eddie.
통산 성적은 21시즌 동안 타율 0.287, 출루율 .359, 장타율 .476, OPS .836, 순장타율 .189, BB/K 0.88, wRC+ 127, 504 홈런, 3255안타, 1917 타점을 기록했다.
2 선수 생활
12남매의 8번째로 태어나서 어린 시절 리틀야구 코치인 클리퍼드 프릴로(Clifford Prelow)의 지도 아래 야구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일찌감치 프로 세계에 뛰어들어 1973년 드래프트에서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3라운드 지명을 받고 프로에 입문했다. 4년의 마이너 생활을 거친 후, 1977년 드디어 메이저리그에 오를 수 있었다.
신인 시절 160경기에 나와 0.283 27홈런 88타점이라는 수준급의 성적을 기록하면서 1977년 아메리칸리그 신인왕에 올랐다. 그 뒤로 볼티모어 시절 정말 꾸준한 활약을 펼치면서 팀의 주축으로 활약했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볼티모어는 강호로서 군림하는데, 그 때의 주역 중 한 사람으로 활약했다. 40홈런을 넘기는 화려한 시즌은 없었지만, 늘 25홈런 이상을 쳐 주는 타자로서 활약했다.
볼티모어에서 활약하면서 1983년 볼티모어의 월드시리즈 우승에 기여해서 우승 반지도 얻었다. 볼티모어 시절 꾸준한 활약을 펼친 후, 1988년 시즌 후 고향팀인 LA 다저스로 트레이드되었다. 여기서도 괜찮은 활약을 펼치면서 꾸준한 활약을 보여주다가 1992년 뉴욕 메츠와 2년 계약을 맺었다. 또, 여기서도 꾸준한 활약을 보여주면서 커리어 마지막 100타점을 기록했지만 메츠가 이 시절에는 워낙 허접해서(...)
노장이지만 꾸준했던 그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가 영입했고, 그 클리블랜드의 전성기 살인타선의 한 축으로 1995년 월드시리즈도 경험했다.[3] 1995년 6월 30일 클리블랜드에서 3000안타를 달성한 후, 친정팀인 볼티모어로 건너가서 마침내 1996년 9월 6일 500홈런 고지까지 달성했다.[4] 그 뒤 다시 고향인 캘리포니아로 가서 한 시즌 선수 생활을 보낸 후, 은퇴했다.
은퇴 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LA 다저스에서 타격 코치 생활을 했다. 2003년 85.3%의 득표율로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첫 투표로 입성했다. 그의 등번호인 33번은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영구결번이다.
3 스타일
40홈런을 밥먹듯이 찍는 화끈한 타입의 타자는 아니었다. 21시즌을 뛰면서 커리어 통산 홈런왕과 타점왕 기록이 딱 1번. 그나마 이를 달성한 1981년은 파업 때문에 시즌이 엉망으로 열렸던 한 해였다. 한 마디로 절대 리그를 제압한 타자는 아니었다. 이를 증명하듯이 명예의 전당 입성의 지표 중 하나인 블랙잉크[5]는 명예의 전당 평균인 27에 미치지 못하는 11에 불과하다. 리그 MVP 투표에서도 겨우 2번만 2위를 한 것이 전부다. 커리어에서 30홈런을 넘긴 시즌도 단 다섯 번이고, 500홈런 달성자 중 정규시즌 홈런 커리어 하이 기록이 33홈런으로 가장 낮다.
하지만 정말 꾸준한 타자다. 데뷔 후 단 여섯 시즌을 빼고 나머지 15시즌 동안은 모두 20홈런을 넘겼다. 커리어 동안 삼진을 100개 이상 당한 시즌은 루키 시절은 1977년 전부. 나이 들어 쇠퇴하기 전까지는 준수한 선구안을 바탕으로 삼진과 비슷한 볼넷을 얻어 출루율이 상당한 타자였다. 언제나 150안타 이상은 기대할 수 있는 타자였고, 매년 30개 안밖의 2루타도 생산했던 타자였다. 그리고 이런 시즌이 거의 매년이었다. 그의 별명인 Steady Eddie처럼 화려하지는 않아도 늘 팀을 위해 제 몫을 다하는 타입이었음에 분명하다.
아울러 1루수로서 수비력도 나쁘지 않은 편이라서 젊은 시절에는 세 차례 골드글러브도 수상했다.
무엇보다 그는 스위치타자였다. 스위치타자 중에서 가장 으뜸인 선수가 최고의 파워를 자랑한 뉴욕 양키스의 미키 맨틀이라고 할 때, 가장 꾸준하고 정교했던 선수는 바로 에디 머레이였다. 미키 맨틀과 함께 스위치타자의 주요 공격 지표에 상위에 랭크되어 있는데, 특히 타점 부분에서는 스위치타자 통산 1위다.[6]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홈런 부분에서는 스위치타자 역대 2위.
한 경기에서 좌우타석에서 동시에 홈런을 친 기록이 11번으로 역대 2위. 아울러 희생플라이 부분에서 128개로 역시 역대 1위다.[7] 19번의 만루홈런을 쳐서 역대 4위인데, 그의 만루 기록은 엽기적일 정도로 강한 통산 타율 0.399, 통산 장타율 0.739, 통산 타점 298개다. 찬스에서는 정말 강했다는 소리.
따라서 그는 한 시대를 휩쓴 타자는 아니었지만 그가 뛴 시대에서 가장 꾸준한 타자였다고 평할 수 있다. 특히 스위치타자로서의 업적은 가장 빼어났다고 해도 좋다.- ↑ 누적 스탯에선 머레이가 더 훌륭하지만 비율 및 조정 스탯으로 보자면 치퍼 존스가 우위에 있다. 또한 치퍼 존스가 스위치 히터로서 양쪽 타석에서 균일한 생산성을 보여줬다는 점이 머레이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 요소.
- ↑ 이 5명 중 알렉스 로드리게스와 라파엘 팔메이로는 확실한 약쟁이이고, 행크 아론과 윌리 메이스의 경우 암페타민 의혹이 있다. 암페타민의 경우 의사 처방이 있으면 일정량 복용은 가능하지만, 실제로 얼마나 복용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기에 의혹이 남은 것. 따라서 위의 5명 중 약물 의혹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타자는 에디 머레이뿐이다. 여담으로 곧 이 명단에 이름을 올릴 것으로 예상되는 알버트 푸홀스와 아드리안 벨트레도 무의혹 청정타자.
- ↑ 참고로 그 95년 월드시리즈 3차전에서 연장 11회에 끝내기안타를 때렸다.
- ↑ 딱 1년 전인 1995년 9월 6일은 그의 막역한 친구인 칼 립켄 주니어가 루 게릭의 연속경기출장 기록을 깬 날이다.
- ↑ 그 타자가 얼마나 해당 부분에서 1위를 많이 했는지 보여주는 지표
- ↑ 사실 스위치히터를 고려하지 않고, 그냥 메이저리그 전체 타자로 적용해도 그는 통산 타점 9위의 성적을 가지고 있다. 1900타점을 넘는 대기록이다.
- ↑ 공교롭게도 2위가 절친 칼 립켄 주니어로 127개, 1개 차이이다.
우린 친하니까 기록도 하루차이로 만들고, 희생플라이도 하나차이로 만들어야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