챔피언 시절. 최배달 저리가라다.
50대 시절. 어라?
1990년대 후반 (60대 후반) 시절
2008년(70대 중후반) 모습
2014년 모습 오른쪽에서 2번째다. 이제는 80이 넘은(14년 기준 83세) 노인이라 그런지 70대까지 그럭저럭 유지하던 살집이 다 사라지고 많이 야위었다.
+ 千圭德, [[1932년]] ~
한국의 프로레슬러. 당수귀신이란 별명으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프로레슬링계의 전설, 필살기인 당수치기, 2단 돌려차기 등이 유명하다.
김일에 비견되는 대한민국 프로레슬링의 전설. 프로레슬링을 하기 전에도 이미 태권도 고단자로 싸움을 굉장히 잘했다고 한다.
김일 사후 한국 프로레슬링계의 대부격인 존재가 되었다. 김일, 장영철과 나란히 암울한 한국사회에 희망을 주었던 당대 최고의 스포츠 스타였다.
그런데 그가 프로레슬러로 데뷔하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았다. 천규덕이 주먹 솜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박정희 대통령은 천규덕을 불러다가 프로레슬링을 해보지 않겠냐고 권유를 했다. 이에 응한 천규덕은 데뷔 이벤트를 마련했는데 그게 황소 3마리를 아무 도구도 없이 맨 손으로 도살하는 것이였다. 천규덕은 황소 3마리를 상대로 싸워 모두 쓰러뜨리면서 프로레슬러로 데뷔했다. 그런데 황소가 당시 공화당의 상징이라서 CF로 내보내려고 하니까 중정의 항의(…)가 들어왔고, 이 때문에 비교적 힘겹게 쓰러뜨리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고 한다[1].
프로레슬러로서 김일에 버금가는 활약을 했다. 김일이 박치기의 달인이라면 이쪽은 당수[2]를 주특기로 삼았다. 우월한 신체와 상대방의 기술이 들어가 꺾인 팔을 오로지 그 팔의 힘만으로 도로 펴는 굉장한 근력을 소유하였고 기술도 상당했으나, 답답한 경기 운영과 흥행성의 부족으로 실력에 비해 인기가 따르지 않았다.[3]
챔피언 타이틀 운도 별로 없었던 편. 장영철과 함께 하던 시절에는 장영철에 이은 '2인자'에 가까운 위치였는데, 천규덕은 나이가 장영철보다 어렸고 장영철은 정통파 아마추어 레슬링 사범이라는 관록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레슬링 도장을 생업으로 하고 있던 장영철과는 달리 당시 군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제대하기 전 까지는 프로레슬링에만 온전히 전념할 수 없었던 것이다. 김일이 나서게 된 뒤에는 김일의 독보적인 행보 때문에 역시 2인자 정도에 머물렀다.
해외진출도 성과가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불운이 따랐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역도산 생전에 일본 진출 약속을 했지만 역도산의 사망으로 무산되었으며, 김일의 주선으로 미국 진출을 했을 때는 일본인 역할을 하라는 미국 단체의 지시에 굴욕을 느끼고 미국 진출을 포기하고 귀국해버려서 무산되었다.
은퇴 후에도 건강관리를 꾸준히 해온 덕분에 지금도 꽤 정정하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WWE 레슬링 RAW가 방문했을 때 당시 특별 게스트로 관중석에 앉아 시합을 관람하기도 했다. 뭐 나이가 나이인지라 지금은 많이 왜소해진 편.
천규덕은 프로레슬러로서의 실력도 대단했지만 싸움실력은 그 당시 거의 최강 수준이였다. 당시에는 주먹으로 천규덕을 당할 자가 없을 정도였다.
여담이지만 천규덕은 탤런트 천호진의 친아버지이다.- ↑ 최근의 여러 인터뷰에서 이런 증언(?)을 조금씩 다른 내용으로 그리고 점강법으로 해오셨는데(2009년에 방송한 OBS 전설의 시대 제2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의 활약을 기억하는 분들은 그냥 어르신의 말씀 정도로 웃고 지나간다. 오래 전에 한 인터뷰에선 부산에서 군생활을 할 때 역도산의 경기를 TV로 보고(부산에선 일본 TV방송을 시청할 수 있다.) 프로레슬러가 되기로 하였으며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한 검정색 타이츠 착용도 그 때 본 역도산의 모습을 따라한 것이라 하였다.
- ↑ 가라테촙을 말하며 이 역시 역도산의 주특기이다. 당시 중계방송에선 당수가 나올 때 캐스터가 "태권!"이라고 외쳤다.
- ↑ 김일은 박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기술에 능하였고 경기 내내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주도하였다. 장영철도 몸을 날리는 기술을 많이 구사하여 박진감으로 인기를 끌었고, 나중에 등장한 여건부는 더 말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