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학동

1 대한민국의 지명

1.1 법정동

1.2 행정동

1.3 자연마을, 옛지명

2 한반도의 이상향

청학동은 동천복지형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청학(靑鶴)은 '태평시절과 태평한 땅에서만 나타나고 또 운다"는 전설의 새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태평성대의 이상향을 청학동이라 불렀다. 고려시대의 이인로, 조선시대의 김종직과 김일손, 유성룡의 형인 유운용 등이 청학동을 찾아 나선 바 있다.

2.1 파한집

최초 문헌 기록은 이인로의 <파한집>이다. "지리산 안에 청학동이 있으니 길이 매우 좁아서 사람이 겨우 통행할 만하고 엎드려 수리를 가면 곧 넓은 곳이 나타난다. 사방이 모두 옥토라 곡식을 뿌려 가꾸기에 알맞다. 청학이 그 곳에 서식하는 까닭에 청학동이라 부른다. 아마도 옛날 세상에서 숨은 사람이 살던 곳으로 무너진 담장이 아직도 가시덤불 속에 남아 있다"라고 하였으나 청학동을 끝내 찾지 못하였다.

2.2 청학집

청학이라는 명칭과 관련해서는 조여적의 <청학집>이 있다. 이것은 조선 중기 쓰여진 것으로, 한국의 선가 도맥을 정리한 책이다. 여기에 청학상인이라는 선인이 등장하며 만년에 청학동에 삶터를 정했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청학동의 사상적 성향이 선도 계통이라 생각하는 자들도 있다. 이 항목 기술에 참고된 <한국 이상향의 성격과 공간적 특징 -청학동을 사례로 >의 저자 최원석도 이와 같이 주장하였다.

2.3 청학동에 대한 분석

지리산이 삼국 및 신라시기에 선도의 본향이었다는 설을 고려하더라도 청학동의 시기적 기원은 고려 후기보다 거슬러 올라갈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청학동에 최치원을 가탁한 유적 및 설화가 다분히 전승되는 사실도, 조선조의 지식인들이나 민간인들은 청학동의 역사적 기원을 고려 후기 이전으로 소급해 인식했다는 단서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지리산에 민중들의 피난처로서 인구가 유입되었다. 승정원 일기에 의하면 "작년 변란[1] 이후에 몸을 숨긴 사람들이 지리산 골짜기에 가득하다."거나 "작년[2]시끄러운 소문이 낭자하여 백성들이 다투어 지리산 아래로 달아나 피신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는 표현이 이러한 사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지리산 청학동에 관해 사회적으로 유포되었던 장소 정보와 장소 이미지는 유민들에게 인상 깊게 남았는지, 때를 같이하여 도참사상의 유행과 정감록 비결을 신봉하는 자들의 십승지 탐색이 일어 청학동의 장소정체성에 또 한차례 질적인 쇄신을 유발시켰다.

2.4 청학동의 영향

이후 이주민들이 전입하여 "만 사람이 살 수 있고 삼재가 들어오지 않는[3]" 청학동 승지촌이 형성된 것이다. 이에 영향을 받아 <해동지도>에는 경기도 영평, 적성과 강릉의 강릉부가, <1872년 군현지도>에는 황해도 강령에서 청학동 지명이 나타났다. 이 이외에도 청학동에 대한 사회적 인지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청학동을 찾는 사람들도 급격히 증가하여 명소가 되었다. 이규경의 "청학동은…(중략)…우리 조정에 이르러…(중략)…온 세상에 회자되어 모르는 사람이 없고 가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언급이 이러한 정황을 말해준다. 이후 청학동 및 청학리의 지명 분포를 살펴보면 경기도에 8곳, 강원도에 6곳, 충청도에 2속, 경상도에 7곳, 전남에 2곳, 함북에 8곳, 함남에 3곳, 평남에 2곳, 황해도에 7곳으로 확대되었다.
  1. 1728년 무신란
  2. 1784년
  3. 萬人可活三災不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