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문왕

역대 초나라 군주
18대
초무왕(楚武王) 웅통(熊通), 웅달(熊達)[1]
19대
초문왕(楚文王) 웅자(熊貲)
20대 장오 웅간(熊囏))
미(羋)
웅(熊)
자(貲)
아버지초무왕 웅통(熊通), 웅달(熊達)
생몰기간음력? ~ 기원전 675년
재위기간음력기원전 690년 ~ 기원전 675년

1 개요

초무왕의 아들이며, 장오의 아버지이자 초성왕의 아버지. 초무왕이 죽은 뒤 왕위를 이어 식나라, 등나라,[2], 신나라 기나라, 채나라 등을 쳐서 초나라의 강역을 넓혀 초나라를 장강 일대의 패권국이 되는 기반을 만들었다.

2 치세

초무왕의 뒤를 이은 초문왕은 즉위 초창기에 수도를 단양에서 영 땅으로 옮겼다.[3] 초문왕 6년인 기원전 684년 초가 채를 쳐서 채나라를 신땅[4]에서 이겨 채애후를 포로로 잡았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석방했는데, 채애후는 식후의 마누라이자 (陳)의 군주의 딸인 식규가 천하 제일의 미녀라고 소개했다. 그래서 초문왕은 식규를 NTR 차지할 계획을 짰다.

그래서 초문왕은 식나라를 방문했는데, 식후가 그를 접대하며 환대했으나 식나라를 멸해 식규를 차지했다.[5] 식후는 그 일로 충격을 받아 병을 얻어 죽었다. 식규는 장오, 초성왕 두 아들을 남겼다.

초문왕 10년인 기원전 680년 가을 7월 초나라 병력이 채로 쳐들어갔다. 초문왕 12년인 기원전 678년 등나라를 멸했다. 초문왕 15년인 기원전 675년 병사를 거느리고 파나라를 침공했으나 대패했다. 결국 영도로 귀환했는데, 육권(鬻拳)[6]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육권이 초문왕에게 말했다.

"황나라를 치고 오십시오."

결국 초문왕은 황나라를 쳐서 끝내는 황나라를 제압했으나 회군 중에 병을 얻어 그 해 6월에 죽었다. 육권은 자결하여 순장되었다.[7]

3 화씨지벽의 일화

초나라의 형산[8]에서 변화라는 사람이 옥의 원석을 세차례 초왕에게 바쳤으나 초여왕과 초무왕은 그 말을 믿지 않고 그에게 월형에 처했다. 변화는 서러웠는지 눈물을 흘리며 울자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보배로운 옥의 원석을 가져왔는데, 알아보지 못하는게 원통해서 운다고 했다. 초문왕은 그 이야기를 듣고 그 원석을 다듬게 하니 보배로운 옥이 나왔고, 그것은 변화의 이름을 따서 화씨지벽이 되었다고 한다. 단 리동혁의 본삼국지에 의하면 이 이야기는 정사가 아닌 야사에서 떠도는 내용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화씨지벽은 열국지에서는 훗날 전국시대 초나라 재상이 가지고 있었다고 하며, 그것이 없어지자 장의가 훔친 걸로 의심해 매질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화씨지벽이 조혜문왕에게 갔는데, 이 자세한 이야기는 인상여, 화씨지벽 항목 참조.

4 후일담

초문왕이 죽은 뒤 식규의 소생인 장오가 즉위했으나 그는 초성왕에게 죽임을 당했다. 초성왕은 국력을 키워 송나라를 제압하는 등 나름대로 패권을 행사했으나 진문공을 이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손자인 초목왕, 증손자인 초장왕 대에 이르러서는 춘추오패가 된다.
  1. 초성왕처럼 이름이 2개가 전해진다.
  2. 등나라는 초왕의 장인 국가다.
  3. 영은 수도이기 때문에 영도라고 불렸는데, 이곳이 삼국지의 강릉성이다.
  4. 이 신땅은 탕이 이윤을 발견했다는 그 신(莘)과 한자가 같다.
  5. 식후가 초문왕을 환대한 이유는 바로 초나라를 이용해 채나라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6. 사람의 이름에 쓰일 때 鬻은 죽이 아닌 육으로 읽는다.
  7. 이 일을 두고 초나라를 까는 사람들은 초나라를 까는 레퍼토리로 쓴다. 참고로 육권은 이거 말고도 간언을 했음에도 초문왕이 듣지 않자 을 들고 초문왕을 위협했고 그 벌이라면서 자신의 발을 잘랐다. 순장이라는 풍습이 막장스럽기는 하지만, 육권은 나름대로 자신을 벌하는 의미에서 자결하고 순장된 것이다.
  8. 이 형산에서 형주라는 지명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