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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濟愚
1 소개
조선의 종교사상가이자 동학의 창시자 겸 제1대 교주[1]. 호는 수운(水雲)이며 경상북도 경주 출신이다.
2 생애
아명은 복술(福述)이었으며 30대 시절 제선(濟宣)이라는 이름을 제우[2]로 개명하고 13살에 울산 출신의 부인 박씨과 결혼하여 꼬마신랑 역할을 하였다는 기록도 있으나, 실제로는 19세에 결혼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10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고 17세 때 아버지를 여의면서 일찍이 고아가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재가녀였으므로 최제우는 재가녀의 자손이 되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문과를 볼 수 없었으나 그의 부친인 근암공은 "모름지기 8살 때까지 공부를 시켜보면 싹수를 알 수 있다"며 최제우에게 유학교육을 시켰다. 참고로 근암공은 퇴계 이황의 학파의 정통계승자로 당대 영남선비들 사이에서는 그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대학자에게 수학을 받았으나 가세가 기울고 양친이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결혼을 하며 먹여살릴 식구가 생긴 수운은 생계방편이 없는 몰락한 양반의 처지가 된다. 농사도 배우지 않았으므로 무과를 준비한 흔적이 보이나 곧 무인의 길을 접고 10년동안 전국 각지를 유랑하며 장사꾼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수운은 조선이 망해간다는 암담한 현실을 선각한듯 하다. 청나라와 영국과의 아편전쟁을 전해듣고서 중국이 무너졌으니 우리나라는 순망치한의 상태라고 생각했으며 서학을 표방한 서양 세력들은 무슨 일이든 다 할만큼 능통하긴 하지만 침략하려는 마음가짐을 지녔으니 서학도 올바른 정신세계인 것은 아니라는 판단을 한다. 또한 이 문제에 대해 높으신 분들에게 협의를 해보려 하였으나 양반들은 장삿꾼 행색인 수운에게 판에 박힌 말들(공자왈 맹자왈...)을 하며 아예 현실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경험들을 하면서 수운은 "요순지치도 공맹지덕도 부족언(요순의 통치도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도 이 난국을 타파하기엔 부족하다)"이라며 말그대로 새로운 가르침, 새로운 문화가 필요한 "다시 개벽"의 시대가 왔다는 깨달음을 확고히 한다.
장삿일을 끝내고 1854년 그나마 가지고 있던 전답을 팔아 울산[3]에서 지내며 철물점을 하다가 사업을 그르치고 다시 고향인 경주 용담으로 들어가 천도를 얻으려는 수행을 계속하던 어느날 그는 신내림과 흡사한 현상을 경험하면서 스스로를 '상제'라고 부르는 존재와 대면하여 주문의 말과 병을 고치는 부적 문양을 받는다. 이때의 상제는 스스로를 "노이무공(노력을 하나 이룬 것이 없는)"이라 말하며 서학의 신 관념과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수운은 그러나 자신의 이 신내림이 꿈은 아닌가 하면서 1년을 다시 수행하고서 그때 얻은 가르침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고 동학을 창시한다.
3 최후
동학의 규모가 커지게 되고 동학의 위협론 등이 폐쇄적인 영남서원 사이를 오가면서 동학을 배척하는 움직임이 생긴다. 그리하여 1864년 이름만 바꾼 서학이라는 혐의와 혹세무민(민심에 혼란을 가중시키고 세상을 어지럽히려했다)의 혐의를 받아 조정에 의해서 체포된다. 조정에서 파견된 선전관 정운귀(鄭雲龜)의 장계에 따르면 경주에 가까워 올수록 주문소리가 마을마다 채우고 있었다는 기록을 보아도 당시 동학의 파급력이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고 수운은 체포되어 과천까지 왔다가 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따른 조정의 혼란 때문에 다시 대구 경상감영으로 보내진다. 그는 그곳에서 사형이 집행되어서 41세의 나이로 순교(殉敎)하였다. 오히려 타 학문에 대한 배척도가 심한 영남지방에서 재판을 받은 것이 더 안좋게 작용했을 수 있다. 그의 후임으로는 2대 교주인 최시형이 이어나가게 되었다.[4]
4 트리비아
그의 사상은 후대의 원불교와 증산계통 종교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여담으로 최제우의 동상이 달성공원에 있다. 정확히는 달성공원내 관풍루 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