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彦撝
868 ~ 944
통일신라 말기 최치원, 최승우와 더불어 신라삼최로 불렸는데, 대중적으로 유명한 최치원, 최승우과는 달리 대중적 인지도가 낮다. 오히려 그를 대신해 최응을 신라 삼최로 착각하는(..) 경우도 많은데, 아마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최승우, 최응이 꽤 비중있는 역할로 나왔고, 최언위는 신라 삼최로 이름만 간간히 언급되기만 해서 그런 듯 하다.
본관은 경주로, 최치원의 11살 어린 사촌 동생이었다. 895년 중국 당나라에서 빈공과에 응시해 급제했으며, 909년 귀국하여 신라에서 벼슬을 지냈는데, 일찍이 벼슬을 버린 사촌형 최치원과는 달리 신라의 멸망까지 벼슬을 지낸다. 특히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아들과 최언위의 딸이 혼인을 맺은 사이, 즉 사돈 관계였다고 한다.
신라가 고려에 항복할 때 그 역시 고려의 관료로 제수되어, 태자사부(太子師傅)의 벼슬을 제수받았다. 성품이 온후하고, 신라 삼최로 일컬어질만큼 문장이 뛰어나 따르는 사람이 많았으며, 궁원(宮院)의 액호(額號 : 입구에 걸어놓는 현판)을 쓰는 일은 모두 그가 도맡아 했다고 한다. 이후 944년 천수를 다하고 죽을때까지 관직에 있었으며, 관직이 정2품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그의 정확한 관직명은 대상 원봉대학사 한림원령 평장사(大相元鳳大學士翰林院令平章事).
그의 아들인 최광윤은 후당이 있던 진(晋)으로 유학을 가다가 거란에 붙잡혔는데, 그 재주가 뛰어나 오히려 거란에서 관직을 주어 등용하였다고. 후일 거란의 고려 침공을 예측하여 본국에 서신을 보냈는데, 이는 정종의 광군 설치에 일조하였다. 또다른 아들 최행귀 역시 오월(吳越)에서 유학하여 벼슬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