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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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 배향 18현
김굉필김인후김장생김집박세채설총
성혼송시열송준길안향이언적이이
이황정몽주정여창조광조조헌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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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영정좀더 사실적으로 묘사한 현대에 그린 영정
이름최치원(崔致遠)
고운(孤雲)
해운(海雲)[1]
시호문충(文忠)
생몰년음력857년~?

1 개요

통일신라시대 6두품 출신의 문인이다. 최승우, 최언위와 함께 '신라삼최' 중 하나 이다. <난랑비서>를 저술하여 유-불-도가의 정신이 이미 한국의 고유신앙인 화랑도-풍류도에 존재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경주 최씨(慶州 崔氏)의 중시조.[2] 다른 최씨의 시조가 경주 최씨에 비롯된 지라 사실상 대한민국의 모든 최씨의 중시조라 할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금돼지의 자손이란다.

그를 신격화하여 주인공으로 한 《최고운전》이라는 고전소설이 있다.

경주 사량부 출신으로 아버지는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崇福寺) 창건과 관련 있는 견일(肩逸)이다.

뛰어난 천재로서 신분의 벽을 넘기 위해 해외 유학을 가 개천에서 용난다는 속담을 실현한 후 나라를 살리기 위해 돌아왔지만 다시 한 번 신분의 벽에 막혀 좌절한 사람의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다.

2 그의 생애

2.1 신라에서 온 유학생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다 12살 때 나라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떠나는 배 위에서 아버지에게 "10년 안에 과거급제 못하면 돌아오지도 마라" 오오 아버지 오오 라는 말을 듣게 된다. 당초 10년 기약을 4년 단축하여 6년[3]만에 당나라 빈공과 급제[4] 완료.

가끔 최치원이 합격한 것이 중국인들과 함께 경쟁하는 진사과였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우선 당의 진사는 과거시험의 최종합격자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막장으로 치닫고 있던 당의 상황이라도 장원급제자를 2년 후에야 현위 따위에 임명하지 않는다. 현대로 치자면 행정고시 수석합격자가 2년후에 주민센터에 7급 주사보로 임명되었다는 수준이다. 등과기고에도 언급되는 것처럼 이전의 경쟁상대를 발해인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최치원이 합격한 것은 외국인 대상시험으로 치러지는 빈공과가 맞다.

2.2 당나라로 건너간 뒤

“최치원은 고려 사람으로 빈공과에 급제하여 고병의 종사관이 되었다.”

신당서 예문지의 주석

2.2.1 짧은 미관말직 시기

최치원은 빈공과에 급제한 후 2년간 관직이 나오지 않아서 허송세월을 하면서 서류대필과 저술활동으로 끼니를 때우다가 겨우 선주 율수현의 현위[5]에 임명이 되었으나 이듬해 사퇴한다. 빈공과 자체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과거다보니 여기 급제해봐야 제대로 된 대우를 받을 수 없었고, 당시 당의 사정이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2.2 신라출신의 구직활동기

이렇게 현위를 그만두고 백수(...)가 되버린 최치원은 박사굉사과라는 내국인 대상 시험을 준비하지만 관직에 있던 시절 나오던 녹봉이 떨어져 배를 곪을 상황이 되어버린다. 이후 양양의 이위라는 사람의 문객으로 들어가서 밥을 먹다가 결국 2년만에 시험을 포기하고, 대신 구직활동에 나섰다. 당시 절도사중 1인으로 이름을 떨치던 고변의 문객으로 들어가려 한 것이다. 이 시기 최치원은 동년배인 고운을 통해서 고변에게 자신의 소개와 관직청원인 자천서를 2회에 걸쳐서 올려서 결국 고변의 문객이 되었다.

2.2.3 황소의 난과 고변과의 인연

덕분에 고변이 황소의 난 토벌을 맞게 되자 함께 참전하였다. 이러한 고변의 덕으로 최치원은 도통순관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의 직책과 함께 비은어대를 받지만, 토벌군이 편성되는 과정에서 군 내부의 사기를 높히기 위해서 내렸던 명예직으로 실권은 전혀 없었다. 실제로 이 시기의 최치원은 당나라의 기록에 고변의 문객으로만 기록에 남아있을 뿐이다.[6] 다만 〈신당서 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치원 찬(致遠 撰)’이라고 하여 〈사륙집 四六集〉·〈계원필경〉이 소개되었다.

최치원이 문객으로 의탁한 고변은 도교에 심취해서 나중에 그 때문에 군무마저 내팽겨쳤다가 내부 반발로 살해당한 인물이었다. 최치원은 한국 도교사에서 비조로 꼽히는데, 이 고변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라는 추정도 존재한다.[7]

최치원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토황소격문이 이 시기에 고변의 이름으로 나왔다. 이 토황소격문이 얼마나 부풀려졌는지는 뒤에 다시 언급되지만, 이 토황소격문의 역할은 미미했다. 그리고 당 내부에서 최치원의 유명세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간단히 말해서 현대 유명 정치인들의 연설문이나 자서전의 상당수에 대필작가가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를 통해서 알려지는 것은 이름을 걸은 유명인이지 고스트 라이터가 아니다. 최치원이 바로 고스트 라이터였던 것이다.

오히려 고변이 황소의 난을 토벌하는데 관할지인 양주에 머무르기만하고 정작 수도 장안을 점령한 황소군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이유로 반란의 의심을 받아서 882년 파직당했을 뿐이다. 최치원과 관련해서 고변이 황소의 난을 토벌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황소의 난을 제압한 것은 사타족인 이극용 등의 활약이 지대했지 고변은 사실상의 활약이 별로 없었다. 이후에도 고변은 양주에 머무르면서 거의 반 독립군벌처럼 움직였으며, 최치원이 귀국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부 반발로 살해 당했다. 고변이 파직된 882년과 최치원이 귀국하는 885년 간의 3년간의 행적은 전혀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이 882년에 자금어대를 받았으며 이후 당나라 황제의 서신을 가지고 귀국하였기 때문에 이 때 할거한 고변을 이탈한 것이 아닌가 추정되기도 하지만 분명하지 않다.

어찌됐건 당시 당은 이미 말기의 전란기로 접어들고 있었고, 최치원은 그 와중에 인정을 받지 못했다. 결국 자신도 이런곳에서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신라로 귀국해버렸다.

2.3 신라 귀국 이후

28살인 885년 신라로 귀환한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신라로 귀국한 최치원이 귀국해서 아주 홀대받은 것은 아니었는데, 당시 신라의 헌강왕은 당나라 유학생 출신들을 중용하였고, 최치원 역시 한림학사에 임명되어서 외교문서 작성을 담당하게 되었으며,[8] 헌강왕이 사망한 이후 최치원은 자청하여 외직으로 나가게 되는데, 웅주의 태산군(太山郡, 전북 정읍시 칠보면)과 부성군(富城郡, 충남 서산시) 태수를 지냈다. 이 지역들은 해안지방의 곡창지역으로 중요도가 높은 지역이었다.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조를 바치고 6두품의 한계인 아찬까지 임명되는 등 최치원에 대한 신라왕실의 신임은 상당했다. 단적으로 진성여왕이 물러나고 효공왕이 즉위하는 과정에서도 진성여왕의 양위표와 효공왕의 즉위에 대한 사사위표를 당나라 황실에 보내는 등, 효공왕 초기까지 대당외교에서 활동했다. 이 시기에 작성된 대표적인 외교문서가 발해의 출자문제와 엮이는 사불허북국거상표로 효공왕 원년에 효공왕의 이름으로 최치원이 작성하여 당에 보낸 국서였다. 한번 대필가는 영원한 대필가

2.3.1 하지만 받아들여진 건 없었다.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조라는 개혁정책을 건의하지만 이미 쇠약해진 신라 사회에서는 그의 주장이 수용될 수 없었다.[9] 진성여왕은 그의 시무책을 받아들여, 최치원을 6두품 신분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아찬에 제수하고 그의 제안대로 개혁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당시 신라는 망해가는 상황이었다. 지방 호족들이 궐기해서 신라는 중앙정부로서의 힘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었다. 진성여왕 시기에 이미 양길, 기훤, 궁예, 견훤 같이 굵직굵직한 인물들이 궐기해서 신라 땅 털어먹기를 시작한 상황이었다. 애초에 진성여왕 즉위 초기에 이미 지방에서 세수가 안 올라와서 곤궁했다는 이야기가 있는 걸로 봐서는 정강왕이나 헌강왕 때에는 이미 이런 상황이 시작된 것일 지도 모른다.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져서 최치원이 은퇴한 효공왕 초기 정도되면 궁예양길이 대립하고, 후삼국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다. 효공왕 즉위 4년만에 신라의 영역은 경주를 중심으로 영남 지역 호족들만이 떠받드는 불안한 정권으로 전락한 상황. 그나마 신라 귀국 초기에 나라에 힘이 있을 때는 골품제와 실적의 문제로 왕의 신임을 받으면서도 할 수 있는게 없었고, 그나마 뭐 좀 할 수 있는 위치가 되니까 신라가 바로 젊은 시절에 경험했던 당나라 꼴이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현실은 시궁창, 완벽한 평행이론이다. 헬신라

결국 신라와 당나라 모두에서 맞이한 난세에 자신 같은 인재가 쓰일 곳이 없다는 데 절망한 최치원[10]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은퇴하여 지리산으로 간 뒤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다고 했으며, 전설에 의하면 그가 머물고 있는 집에 신발만 있고 그의 흔적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후대에는 최치원이 지리산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광범위하게 생겨났다.

신라 말에 태어나 고려 초에 활약한 최승로는 그의 친척이다.

3 저서

  • 계원필경
  • 금체시
  • 법장화상전
  • 부석존자존
  • 상대사시중장
  • 석이성전
  • 쌍녀분전기
  • 오언칠언금체시
  • 잡시부
  • 제왕연대력
  • 중산복궤집
  • 수이전 - 조선시대 몇몇 서적에서 지은이가 최치원이라고 쓰고 있으나 이설이 있다.
  • 천부경 - 최치원이 석벽에 새겼다고 환빠들이 주장.

4 기타

  • 마산(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일대에는 말년의 최치원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 많다. 마산합포구에서 가장 큰 동 중의 하나가 '월영동'으로, 이는 최치원이 노닐었다는 '월영대'에서 비롯했다. 월영대 옆의 오거리는 정식 공문서에서는 월영광장이라고 불린다. 댓거리가 아니고? 또한 마산지역 옛 산복도로의 이름은 고운로(孤雲路)이다. 하지만 다들 산복도로라고 부르지 마산 앞바다에 있는 '돝섬' 또한 암돼지 요괴(...)와 최치원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마산문서 참조.
  • 부산광역시에 있는 해운대 지명도 최치원에게서 유래되었다. 지금도 최치원이 새겨놓았다고 알려진 비문이 동백섬 측에 남아있다. 해운대구, 해운대해수욕장 문서 참조.
  • 역사스페셜 113회 '중국은 왜 최치원을 기억하는가'
2012년 9월 6일 방영되었다. 제목 그대로 중국에 남은 최치원의 흔적을 다루고 있으며 국내에는 비교적 덜 알려진 젊은 시절 중국에서 지낼 당시 최치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4.1 최치원이 왕건을 지지했다?

일설에는 최치원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계림(신라)은 누런 잎이고, 곡령(고려)은 푸른 소나무"라는 글을 올려 고려에 대한 지지를 완곡하게 표현했으며, 심지어 이 때문에 신라왕의 미움을 받아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은거했다는 말들이 전하지만, 최치원의 효공왕의 즉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은거한 것은 897년,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거병한 것은 918년으로 20년의 격차가 있기 때문에 신라 효공왕의 미움을 사서 파직되었다는 것은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고, 최치원의 마지막 행적이 남아있는 것이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를 지은 908년이기 때문에 십여 년 뒤인 왕건의 거병 시점에는 생사조차 불분명하다.[11] 더구나 최치원은 신라 왕실의 덕을 많이 보았고, 스스로도 신라왕실에 대한 충성이 강했기 때문에 다른 6두품들과는 달리 쉽게 호족들과 결탁하지도 못하는 입장이어서 좌절한 경우였다. 때문에 고려시대에 최치원을 높이는 과정에서 후대에 가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도선대사에게 신라의 앞길을 물을 때와 정치를 포기한 채 황음에 빠진 진성여왕에게 직언을 하는 장면에서 등장했으며, 이후로는 직접 출연하지는 않고 주변 사람들의 입을 빌어 그 존재가 간혹 언급될 뿐이다. "계림은 황엽, 송악은 청송"이라는 말은 도선대사가 한 말로 설정되었다. 고려가 공산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163화에서 견훤은 왕건의 심사를 긁는 국서(평양성 루에 활을 걸고 대동강 물을 말에게 마시게 하겠다)를 보내는데, 열받은 왕건이 후백제를 규탄하는 답서를 백제편 사신으로 보낸다. 국서를 보낼 때 이 글을 최치원이 썼다고 알려줘 백제를 도발(...)하기도 했다. 토황소격문에 빗대어 후백제를 한낱 반란군으로 조롱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같은 3최의 일원인 최승우는 "최치원은 가야산 깊숙히 들어가 몸을 숨기며 살고 있습니다. 글을 잘 짓기는 했으나, 문장으로 보아 고운의 글은 아닙니다."라 평했다.

4.2 유학자 성인 최치원?

고려 현종 시기에 최치원은 문창후로 추증되어 홍유후 설총과 함께 문묘에 배향된다. 이후 퇴계 이황이 비판한 것처럼 최치원은 주로 문인 예술가로, 유학자의 이미지가 약했던 최치원이 문묘에 배향되는 과정에서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최치원의 비문학적 활동이라는 것이 결국 시무십조인데, 이것은 유학자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관료로서의 모습이라고 봐야하기 때문이다. 최치원이 유학의 선구자로 존중받았다는 이야기는 문묘에 배향되었다는 결과론 외에는 근거를 찾기 어렵다. 오히려 한국 도교의 비조로 꼽히고 3교 융합의 이미지도 강해서 유학자 최치원의 이미지는 과거에도 지금에도 약하다.

최치원이 왕건을 지지했다는 표현은 문묘배향 과정에서 그 이유로 등장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신라계가 점점 세력을 강화하는 과정 또는 거란족의 침략 등 혼란한 상황에서 현종이 충신으로서 최치원과 설총을 강조하였다는 등의 평을 받는다.

4.3 카사노바

<신라수이전>이라는 책에 '쌍녀분'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최치원이 밤길을 가다 두 개의 무덤이 나란히 솟은 근처에서 잠들었는데, 두 아리따운 처녀귀신이 나타났다. 실은 두 자매의 아버지가 장사치에게 시집보내려 하자 반항으로 함께 자살한(...) 언니와 여동생이었던 것이다. 무시무시한 것은 최치원이 이 두 여자(귀신)과 함께 술을 마시며 시를 지어서 꼬슬렸고, 결국 자매덮밥을 해 버렸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문학의 효용성인가!

4.4 문학적 업적

추야우중(秋夜雨中, 가을 비오는 밤 중에)
秋風唯苦吟 (추풍유고음)가을 바람에 괴로이 읊조리나,
世路少知音 (세로소지음)[12]세상에 알아 주는 이 없네.
窓外三更雨 (창외삼경우)창 밖엔 밤 깊도록 비만 내리는데
燈前萬里心 (등전만리심)등불 앞에 마음은 만리 밖을 내닫네

그가 남긴 시문은 현전하는 '계원필경'(20책), '사산비명'을 포함하여 '삼국사기'에만도 문집 30권이 전한다고 기록할 정도로 방대하다. 여기에 실린 《추우야중(秋雨夜中)》,《산양여향우화별(山阳与乡友话别)》도 유명하다.

이 중 당나라 유학시절인 25세(881년) 때 지은 온 천하 사람들이 너를 드러내놓고 죽이려 할 뿐 아니라, 지하의 귀신들까지 너를 죽이려 이미 의논했을 것이다라는 내용의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적장 황소가 혼이 빠져 평상에 내려앉았다는 일화가 전해올 정도로 오늘날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다만 현시창이어서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이 글의 발표자는 당연히 고변이었고, 고변이건 토황소격문이건 황소의 난 해결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황소가 주저 앉았다느니 놀라서 죽었다느니 하지만, 이건 우리나라 고려-조선 유학자들 사이에서 유명하긴 했어도 신빙성이 부족한 이야기이다.[13][14][15] 이전에는 자금어대를 받은 것을 황제가 최치원의 능력을 인정했다로 적혀 있었지만, 역시 상단에 적힌 것처럼 자금어대와 (저자가 고변으로 되어 있는)토황소격문은 아무 상관없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이미 망조에 접어들었던 당나라는 어대니 명예직이니를 마구 남발하고 있었기도 했고.

4.5 이중잣대(...)

흔히 신분차별이나 6두품의 한계로 인해 꿈이 좌절된 불운한 천재로 여겨지지만 정작 최치원도 이런 차별적 인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자신을 비롯한 6두품들을 자신의 저서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문(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文)'에서 '득난(得難)'[16]이라고 표현하며 나름의 자부심과 진골들에게 차별당하는 울분을 표현하는 한편 정작 자신보다 못한 5두품, 4두품들에 대해서는 논할 가치도 없다고 표현하기까지 했으니.... 이는 오늘날 인터넷에서 자주 보이는 모습이다 나는 무시당하기 싫지만 내 아래론 잡
  1. 지금의 부산광역시 해운대구의 지명이 그에게서 유래한 것이다. 최치원이 이 일대를 지나가다 해운대해수욕장 근처 경치가 너무 좋아서 거기서 좀 머무르다가 자신의 호를 따서 '해운대'라고 바위에 글씨를 새겼던 것. 그 글씨는 지금도 있는데 가운데 雲 자가 풍화가 심해 많이 지워진 상태다. 사실 이 글씨가 최치원이 직접 파서 남긴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고려시대 인물인 정포가 이 글씨를 언급한 기록이 남아있으므로 적어도 고려시대나 그 이전부터 해운대라는 이름이 바위에 새겨져 있었던 것은 맞다.
  2. 일단 시조는 신라 건국기의 인물 소벌도리지만, 사실상의 시조는 최치원으로 여긴다.
  3. 868년 출발, 874년 9월 급제.
  4. 이걸 두고 빈공과발해 출신이 많이 붙었는데 신라에서 뛰어난 인재가 왔다라고 표현했다. 역대 과거 합격자의 명단을 모은 '등과기고(登科記考)'에 최치원은 '지난해 신라가 발해인에게 장원급제를 빼앗긴 수치를 씻었'고 적었다. 신라인과 발해인이 라이벌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대목.
  5. 지방 현령 밑에서 잡무를 보던 하위 관직.
  6. 참고로 고려의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에서 〈당서〉 열전에 최치원전이 없다는 것에 "당나라인들이 질투한 것"이라며 분노한 마음을 글로 남긴적 있다. 열폭 하지만 막상 당의 역사서를 정리하는 입장에서는 듣보잡 외국인 유학생의 열전까지 일일히 남겨줄 필요가 없었던 것.
  7. 일단 공식적으로는 역시 신라 유학생 출신으로 도교에 최치원보다 더욱 심취한 김가기의 영향이 크고, 난랑비서의 경우는 고유의 풍류도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런 가능성은 낮게 평가된다. 역으로 고변이 도교에 심취하게 되는 영향을 최치원이 제공했을 수도 있다.
  8. 역시 6두품 출신으로 이름을 떨친 강수와 마찬가지 포지션이다.
  9. 사실 시무십여조가 혁신적인 정책이었는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내용이 전혀 남아있지 않기 때문. 최치원이 육두품이므로 아마도 육두품을 포함한 신귀족정을 주장한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만 할 뿐이다.
  10.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을 읽어보면 당시 신라 사회의 혼란과 모순, 신분적 한계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절망했던 최치원의 착잡한 심정을 느낄 수 있다.
  11. 최치원이 해인사에 은거하던 시절, 왕건을 지지하던 승려 희랑의 견해를 존중하여 시를 써주었다 해서 이의 가능성 자체는 긍정하는 이들도 있지만, 애초에 이 시점에서 최치원이 살아있는지조차 불분명하다는 것이 문제다.
  12. 擧世少知音(거세소지음)이라고 쓴 것도 있으며 중학교 한문 교과서에서도 이렇게 쓰고 있다.
  13. 관련 작성글에서 고전소설 최고운전에나 나오는 이야기라고 자꾸 들먹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최고운전의 창작연대는 높게 잡아도 1700년대를 넘어가지 않고, 이 이야기 자체는 이 작품이 나오기 이전인 고려말-조선초부터 당시의 유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졌던 일화이다. 학자들의 문집 등을 보면 심심찮게 볼 수 있다.
  14. 소금 밀매상인 황소가 글자를 읽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가 많지만, 실제 황소가 지었다는 한시가 존재한다. 부제후부국(不第後賦菊), 즉 '과거에 떨어진 뒤에 국화를 보고 지음'(황소 본인은 국화를 몹시 좋아했던지 얼마 안 남은 그의 한시 작품은 모두 국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이라는 이 한시의 제목은 황소가 한때 과거 시험에 응시했다가 낙방한 적이 있음을 시사하는데, 한시를 짓고 과거 시험에 응시한 경험도 있다면 글을 자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상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글을 모른다고 보는 것도 편견인데, 당장 중국 소설이나 영화들만 봐도 상인의 아들로서 공부한다던가 공부하다가 때려치우고 상인이 된다던가 하는 내용이 숱하게 나온다. 부를 축적하는 만큼 오히려 글을 접할 기회가 늘어나는 것.
  15. 해당 한시는 다음과 같다. "가을이 되어 9월 8일을 기다리니/내 꽃이 피고 나면 다른 꽃은 질 테지/충천하는 향기는 마침내 장안을 채우고/온 성이 황금 갑옷 두르리(待到秋來九月八/我花開後百花殺/衝天香陣透長安/滿城盡帶黃金鉀)" 이 한시의 마지막 구절인 '만성진대황금갑(滿城盡帶黃金鉀)'은 2007년 중국에서 개봉한 장예모 감독의 영화 '황후화'의 중국 원제목이기도 하다.
  16. 말 그대로 얻기 어렵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