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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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4월 30일, 멕시코에서 벌어진 프랑스육군 외인부대전투.

나폴레옹 3세의 멕시코 개입으로 멕시코에 파병되었던 외인부대원들 중 당주 대위[1], 빌랑 중위, 모데 소위가 지휘하는 65명의 장병들이 금화 수송 임무를 맡았지만 정보가 새어나가 800여명의 기병대가 포함된 2000명 규모의 멕시코 정규군에게 습격을 당하였다.

멕시코 정규군의 교전 끝에 물, 식량, 금화, 탄약을 수송하던 당나귀는 사라졌고 42명의 외인부대원만이 생존하여서 작은 농가에 피신하였지만 곧 멕시코 정규군에게 포위되었다. 오전 9시쯤 첫 전투가 벌어지고 멕시코 기병대가 돌진하나 잘 구축되어 있는 방어선과 뛰어난 훈련을 받은 외인부대에게 멕시코 기병대는 피해를 입고 물러난다. 잠시 공격을 멈춘 멕시코 육군 지휘관이 항복을 권유한다.

돌아온 대답은 "외인부대에게 항복이란 있을수 없다."였다. 그리고 당주대위와 외인부대원들은 "죽음이 우리와 함께하길"을 외치며 선제공격에 나선다. 뜯긴 지붕에서 날아오는 탄에 지휘관 당주 대위가 전사하고 빌랑 중위가 지휘권을 넘겨받는다. 멕시코군은 집요하게 농가를 허물며 외인부대원들을 압박하였고, 멕시코군 12000명이 지원을 와서 가세한 상황이었다. 총알이 바닥나기 시작하고 사상자가 늘어나는 가운데, 이들은 마실 도 없어 피와 오줌을 마시며 계속 저항하였다. 그리고 빌랑 중위 마저 전사하고 모데 소위가 지휘권을 넘겨받는다. 그리고 두번째 항복권유가 이어졌다. "그대들이 잃을것은 전혀 없다. 이미 금화와 보급품의 행방은 찾을수가 없다.우리도 마찬가지다. 이 무의미한 전투를 중단하자." 대답은 단 한 마디였다.

"우리들은 외인부대다."

전투는 재개됐고 농가는 외인부대와 멕시코군의 시체로 가득찼고 외인부대원은 하나둘씩 쓰러지고 있었다. 단 하나 남은 농가에 항복권유가 떨어진다. 그러나 외인부대원들은 이를 거부하였고 멕시코군은 다시 포위망을 좁히며 외인부대원들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오후 6시 하사관 1명, 병사 4명만이 남게되자 탄약이 모두 소모한 외인부대원들은 착검을 하고 "비바 라 레종" 을 외치며 일제히 돌격을 개시한다. 제일 먼저 모데 소위가 쓰러지고 그를 감싸려던 까또 대원은 19발을 맞고 쓰러진다. 빗발치는 총알 앞에서 다시 일어났다. 그 용맹함에 감동과 충격을 동시에 받은 멕시코 육군 지휘관인 대령은 " 이것이 생존자의 전부란 말인가? 그대들은 사람이 아니다, 악마다" 라며 사격을 중지하라고 명령하여 남은 외인부대원들을 살려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다섯 명의 생존자는 "건방지게도" 자신들이 항복해 주는 대신 자기편 전사자 시체 전부와 무기 전부를 가지고 가겠다고 요구했다. 이걸 받아들인 멕시코군 대령도 어지간한 대인배인 듯. 시체 60구와 널브러진 병기들을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중상자 2명 포함 5명이 무슨 수로 가져가나 궁금해서 그랬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맥시코군의 피해는 500여명 정도였다고 한다.

이 전투의 지휘관이었던 당주 대위는 본래 외팔이라 나무로 된 의수를 하고 있었는데, 이 의수는 오늘날 외인부대 박물관에 전시되어 외인부대의 최고 보물로 간주되고 있다. 전투가 있었던 매년 4월 30일을 "카메론 데이"라고 하며, 외인부대의 최고 기념일이다. 이 날이 오면 당주 대위의 의수가 밖으로 나와 정렬한 외인부대 장병들의 사열을 받고, 간부들이 병사들의 침대로 아침식사를 날라다 주는 이벤트도 있다. 퇴역한 대원들도 가족과 함께 부대를 찾는다. 전 세계 어디에 있든 외인부대원이라면 이날은 현역과 퇴역을 막론하고 외인부대 배지를 달고 기념한다고 한다.
  1. 당주 대위는 원래 지휘관이 아니라 참모장교였으나, 다른 장교들이 전부 다 앓아누워서 대신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