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미에시 4세

1 개요

1427년 11월 30일 ~ 1492년 6월 7일
브와디스와프 2세의 네번째 아내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꼭두각시로 써먹히기 위해 옹립당하기도 했지만,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합을 공고히하고 뛰어난 내치로 내정을 다졌으며 동유럽에서 깡패질이나 하던 튜튼기사단을 복속시킨 명군.

2 행적

2.1 어린시절

개요에서 설명되듯이 네번째 아내의 둘째 아들이란 입지 때문인지 별다른 교육도 못받고 관심도 못받는 상당히 안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형 브와디스와프 3세가 즉위하게되자 법적 상속인으로 지명된다. 그래봐야 사실 말이 좋아야 상속자지 아들이 태어나기만 하면 다시 안습이 될 운명이었다.

2.2 리투아니아 대공

그런데 때마침 리투아니아 대공이 후계자없이 사망하자 브와디스와프 3세의 명으로 총독으로 파견된다. 그런데 써먹기 편한 꼭두각시를 원한 리투아니아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강제로 그를 대공으로 임명시키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이렇게 어쩌다보니 대공이된 카지미에시는 나름대로의 통치를 하면서 지내고 있었는데...

2.3 즉위

형 브와디스와프 3세가 자식도 남기지 못한채 바르나 전투에서 어이없게 전사해버리고 얼마 후 1447년 폴란드 왕위도 얻게된다(...) 어찌되었건 왕위에 즉위한 카지미에시는 그동안 귀족들 눈치보며 숨기던 송곳을 드러내며 권력을 강화해나가기 시작한다.

1454년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결혼 동맹을 맺기로하여 합스부르크가의 영애 엘리자베트와 결혼하게된다. 그리고 엘리자베트와 결혼 생활중 무려 13명이나 되는 자식을 얻게되었고. 이 또한 그의 정통성과 권력 외교관계를 강화시키는데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2.4 튜튼 기사단을 복속시키다

그리고 결혼식이 이뤄진 1454년 카지미에시 4세는 프로이센내의 반 튜튼기사단 세력과 밀약을 맺고 기사단을 공격해 단치히를 포함한 서부 영토를 모조리 뜯어내고 쾨니히스베르크에 몰아넣어 잔존 세력을 겁박해 복속시키는데에 성공한다.

2.5 사망

1492년 현 벨라루스 지역의 어느 성에서 죽음을 맞이하며 그의 시체는 크라쿠프의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3 기타

4 대중매체에서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에서 4/4/1의 능력치의 군주로 등장한다.

5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