쾨니히스베르크

1 옛 동프로이센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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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쾨니히스베르크, 쾨니히스베르크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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쾨니히스베르크 시 문장칼리닌그라드 시 문장

Königsberg in Preussen / Königsberg i. Pr.

폴란드의 그단스크에서 동쪽, 발트 3국 남쪽, 정확하게는 리투아니아의 서남쪽에 위치해 있는 러시아 영토 '칼리닌그라드'의 과거 명칭. 약칭으로 쿄니그(Кёниг) 라고 한다. 본래는 구 독일동프로이센 지역의 주요도시였다. 1939년 기준 인구는 37만 2천 명으로, 구 독일 동방영토에서는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1]

사실 쾨니히스베르크는 '왕의 산'이라는 뜻으로 독일기사단에게 성의 건설자금을 지원해준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2]를 기리기위해 지어진 이름이다. 즉 쾨니히스베르크는 북방 십자군의 전진 기지 역할을 했던 이 쾨니히스베르크 성을 기반으로 발달한 도시이고, 프로이센 왕국 초창기의 수도였던 독일계 도시였다. 수도가 베를린으로 옮겨간 뒤에도 프로이센 국왕들은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대관식을 했고, 1945년까지 프로이센의 국가기록원(Preußisches Staatsarchiv Königsberg)이 있었기도 했다. 이게 다 나치 때문이다

철학자 칸트가 태어난 곳이자,[3] '쾨니히스베르크 다리 건너기 문제'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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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

7년전쟁 중이던 1757년부터 1763년까지 러시아가 점령하기는 했었지만, 쾨니히스베르크가 속한 동프로이센은 근대 독일 제국에 있어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지역으로, 독일 제국의 근간이 된 프로이센의 발상지이다. 독일 제2제국 유수의 귀족 가문이 이 곳 출신이며,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 이 곳을 지키기 위해 많은 예비 병력들의 발이 묶여 있었다. 1차대전에서 동프로이센, 포젠, 갈라치아랑 더불어 러시아의 합병 목표였으며 1차대전 패전 이후에도 차라리 다른 곳을 내줄지언정 동프로이센은 포기하지 않았고, 단치히 회랑을 내주면서 독일 본토와 분리되었지만 이 땅은 계속 독일의 치하에 있었다.[4]

이후 제2차 세계대전초반에 폴란드가 독일에게 점령당하면서 다시 독일 본토와 육상통로가 연결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독소전에서 소련이 독일을 밀어내고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전후 처리 과정에서 동프로이센은 둘로 나뉘어 남부는 폴란드에, 쾨니히스베르크를 비롯한 나머지 지역은 소련에 귀속됐고, 독일계 주민들은 거의 대부분 전쟁 말기에 도망치거나 전투에서 죽었거나 강간당했으며, 나머지 얼마 안되는 사람들은 향후 영토 회복의 빌미를 없애기 위해 강제로 혼혈당하거나 독일 본토로 추방에 이주되었다. 쾨니히스베르크는 소련의 몇 안되는 부동항이었다. 냉전 말기, 발트 3국의 독립으로 인해 본토와의 육상통로가 단절되었다.[5]

그 이후의 역사는 칼리닌그라드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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쾨니히스토르(왕문)

참고로 쾨니히스베르크 시절의 건축물들은 2차대전 말기의 시가전 및 폭격으로 상당수가 파괴되었으며, 쾨니히스베르크 성 역시 이때 복구조차 불가능할 만큼 치명적으로 무너졌고 남은 잔해마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지시로 프로이센 군국주의 잔해를 없앤다는 명목 아래 1968년 철거되었다. 그 자리에 '소비에트 하우스'라는 해괴한 건물이 들어서 있으나(...) 의외로 구 쾨니히스베르크 역이나 쾨니히스베르크 성당, 십자가교회(Kreuzkirche), 증권거래소, 쾨니히스토르(왕문), 칸트 동상 등 프로이센 시절 주요한 시설이나 상징물도 여전히 군데군데 잘 남아있다. 게다가 쾨니히스토르에는 프로이센 상징인 검은 독수리 문양이 선명하게 잘 남아있기도 하고...또한 독일인들이 이 시절의 유물 유지보수 및 고향 방문 등의 목적으로 적잖게 칼리닌그라드에 방문하고 있으며, BMW 공장이나 영사관을 설치하는 등 이 지역에 공을 들이는 중. 현재는 러시아 영토가 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독일의 흔적은 여전히 살아남아있다.

이 지역을 대표했던 음식으로는 미트볼 요리[6]인 쾨니히스베르거 클롭스#레시피(영문)가 있는데, 현재는 독일 본토로 추방된 실향민들을 중심으로 독일 전역에 퍼져있다. 갈아놓은 고기(돼지고기와 소고기를 섞는다.)와 계란과 향료에 유럽 멸치를 섞어서 반죽하고 소금물에 삶아 크림 소스를 뿌려 내오는 식. 삶은 감자도 곁들여진다.

2 독일 구(舊) 브란덴부르크주의 도시

Königsberg in der Neumark

1945년까지 독일 브란덴부르크주 동북부에 있었던 도시. 여기도 제2차 세계대전까지는 독일 영토였으나, 이후 폴란드의 도시 호이나(Chojna)로 바뀌었다.

3 독일 바이에른주의 도시

Königsberg in Bayern

1920년까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의 도시였다가 이후 바이에른주의 도시가 되었다. 둘 다 인지도는 1에 밀려 듣보잡 수준이다. 안습

4 독일의 경순양함

쾨니히스베르크급 경순양함 참조.
  1. 가장 컸던 도시는 슐레지엔의 주도 브레슬라우로 63만 명.
  2.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대공위 시대 때 합스부르크 왕가의 루돌프 1세와 왕위를 놓고 대립하다가 마르헤펠트 전투에서 패해 살해당하였다.
  3. 칸트는 이 도시에서 평생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혹은 출생지로부터 몇 마일 바깥을 여행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 바람에 졸지에 무덤이 러시아에 들어가버렸지만(...).
  4. 대신 항구지역인 메멜란트를 리투아니아에게 할양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은 약 500년간 프로이센의 일부로 있어왔으며 차별대우도 없었기 때문에 주민들 대부분이 자신을 리투아니아계 독일인으로 생각했으며 동족들의 국가에 통합되는걸 좋아하지 않았다. 즉 민족자결주의가 허상임을 드러내는 좋은 예로 꼽히는 지역이다.
  5. 현재 육상 통로로 러시아에서 칼리닌그라드로 가려면 무조건 2개국 이상의 국경을 거쳐야 한다.
  6. 사실 미트볼은 독일뿐만이 아닌 북유럽 전반에 퍼진 요리로 스웨덴이나 노르웨이에도 독자적인 미트볼 레시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