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마르 동맹

칼마르 동맹
Kalmarunionen
깃발문장
1397년 ~ 1523년
위치스칸디나비아 반도와 그 주변,
그린란드, 북해 여러 섬
실질 수도코펜하겐
정치체제봉건제
공동군주
언어덴마크어, 스웨덴어, 노르웨이어
민족덴마크인, 스웨덴인, 노르웨이인
핀란드인, 사미족
종교가톨릭 -> 개신교
주요사건1397년 성립
1523년 킬 조약으로 동군연합 해체
통화크로네
성립 이전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해체 이후덴마크-노르웨이 왕국,스웨덴

1 개요

14세기 말 덴마크를 중심으로 해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1] 삼국이 동군연합하여 탄생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위치했던 세력.이름이 칼마르 동맹인 이유는 스웨덴의 항구도시 칼마르에서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성립의 주된 이유중 하나는 발트해 방면으로 영향력을 확장해 나가 스칸디나비아국가들의 상업을 위협하던 한자동맹에 대응하기 위함이다.

2 역사

덴마크 국왕 발데마르 4세의 딸 마르그레테 여왕은 노르웨이의 왕 호콘 6세와 결혼하였는데, 남편 호콘 6세가 죽자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마르그레테 여왕과 호콘 6세의 자식인 올라프 2세 아래 동군연합을 이루게 된다. 어린 아들을 대신해 섭정으로 양국을 통치하던 여왕은, 아들의 사후 1387년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위에 올랐다.

한편, 스웨덴에서는 국왕과 귀족층간의 갈등이 끊이지 않자, 스웨덴 의회는 마르그레테 여왕을 스웨덴의 섭정으로 선출하고, 여왕은 스웨덴의 왕 알베르트의 군대를 격파했다.

패배한 스웨덴의 왕 알베르트가 석방 조건인 60,000 은 마르크를 3년안에 지불하는것을 실패하여, 스웨덴에서의 여왕의 입지는 확고해졌다.

북유럽 삼국이 여왕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오자, 여왕은 연합에서의 귀족의 정치적 영향력과 특권을 보호하기로 약속하였으며, 그녀의 증손이자 1389년에 올라프의 사후 노르웨이의 왕위에 오른 에릭이 1396년에 덴마크와 스웨덴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며, 마르그레테는 그가 성년이 되기 전까지 섭정을 맡게 되었다.1397년에 스웨덴의 동남부에 있는 항구도시 칼마르 에서 3국의 귀족회의를 개최하고, 3국의 연합을 결의하게 되었다. 6월 7일 삼위일체축일에 에릭은 합동 즉위식을 하였고 3개 왕국은 통합된다. 이 동맹의 주도권은 덴마크에게 있었으며, 나머지 국가는 종속적 위치에 놓였다.

여왕의 대외 정책 목표는 독일 세력의 영향력을 감소 시키는 것 이었고, 이는 덴마크가 슐레스비히 지방에 대한 관할권을 되찾으면서 어느 정도 실현된다. 그러나 마르가레테 여왕은 1412년 플렌스부르크 지방을 시찰하던 중 흑사병에 걸려 사망하고 만다. 마르가레테의 사망으로 섭정이 끝나자 에리크는 본격적으로 정치에 나선다. 노르웨이에 중과세를 부과하여 세금 제도를 더욱 효율적으로 운영하고자 시도하는 한편, 스웨덴과 노르웨이에 덴마크 출신과 독일 출신의 수령들을 배치하였다.

에리크는 독일의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지방을 얻기 위해 한자동맹과 전쟁을 벌였고, 한자동맹과의 전쟁으로 무역이 봉쇄되고 생필품의 공급이 중단 되는 등 큰 피해를 입은 스웨덴의 베리슬라겐 광산 지대에서는 에리크에 대한 민중 봉기가 일어나고 이는 곧 크게 퍼져나간다.
스웨덴 민중 봉기의 지도자로 나타난 사람은 베스트만란드 지방의 노르베리 광산 지대 출신의 엥엘브레크트


1523년 연합 왕국의 왕 크리스티안 2세의 폭정에 항거하여 구스타브 바사(구스타프 1세)가 독립군을 구성하여 덴마크와 독립전쟁을 벌여 크리스티안 2세를 스웨덴에서 축출해 스웨덴 왕국이 독립하였고, 칼마르 동맹은 해체되었다.
작성중

3 노르웨이·덴마크 연합

칼마르 동맹은 1523년 스웨덴의 독립으로 와해되었지만 덴마크 왕의 노르웨이 지배는 19세기까지 지속되었다.

4 관련 문서

  1. 핀란드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