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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의 기 |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의 문장 |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의 위치 | |
국가 | 독일 |
주도 | 킬(Kiel) |
시간대 | UTC+1 (서머타임 준수) |
서울까지 | 9시간 10분 8150킬로미터 |
한국과의 시차 | -8시간 |
1 개요
슐레스비히 - 홀슈타인 주, Schleswig-Holstein
독일의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덴마크와 접해있는 주(州). 서쪽에는 북해, 동쪽에는 발트해가 있다. 주도는 킬(Kiel). 한때 슐레스비히(Schleswig)라는 소도시에 주도가 있기도 했었으나, 1945년 최종적으로 킬로 이전하였다.
2 역사
고대의 홀슈타인 지방은 현재는 "앵글로색슨"이란 말로 더 유명한 작센 부족이 살던 곳으로, 810년 카롤루스 대제가 작센 부족의 왕국을 점령하면서 이 지역의 통치권을 얻게 된다.[1] 그러나 곧 덴마크와의 조약을 통해 아이더 강 이북의 영토를 떼주었다. 기존에 살던 작센 부족을 학살하거나 하는 일도 딱히 없어 이후로도 한동안 작센 공작령이 되었고 이를 노르트알빙기아(Nordalbingia)라고 불렀다. 신성 로마 제국이 선포된 이후로도 덴마크와의 국경 분쟁이 꾸준히 있어왔으나 결국엔 아이더 강이 국경으로 자리잡게 된다. 지금도 홀슈타인과 슐레스비히의 지리 구분은 아이더 강을 기준으로 한다.
홀슈타인이란 이름은 고대 작센족의 한 부족 Holcetae에서 유례한 것으로, 고대 작센어로 "숲속의 난쟁이들"이란 뜻이다. 이들은 현재 함부르크의 서쪽 엘베강 북쪽 강변에 살았던 걸로 추정된다.[2] 본래 홀차티엔(Holcetae에서 유례)은 노르트알빙기아의 한 하위 지방명이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역전하게 된다.
신성 로마 제국이 수립되면서 작센 공작령은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령이 되었고, 1111년 작센 공작의 제후로서 홀슈타인 백작령이 신설된다. 황제에게 대들던 하인리히 사자공이 토사구팽 당한 후 1235년 작센 공작령이 분할될 때 홀슈타인 백작령은 작센-라우엔부르크 공국의 제후가 된다. 홀슈타인 백작령은 샤움부르크 가문이 통치하게 되는데 이 가문의 문장이 현재 홀슈타인의 문장과 동일하며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의 문장 우측 빨간 배경의 하얀 별, 섬광 같은 것이 그것.
1058년 올라프 1세는 유틀란트 남쪽, 신성로마제국과의 국경지대에 슐레스비히 공작령을 설치한다. 원레 작위명은 쇠너윌란 (Sønderjylland: 남부유틀란트) 공작이라고 불리었고, 14세기부터 슐레스비히라는 도시명이 지역명으로도 쓰이게 되면서 완전히 대체하게 된다.[3] 여기는 왜이리 지명 하극상이 자주 벌어지는거지.. 이후 대대로 덴마크의 왕이 가지고 있던 작위였는데 1115년 덴마크왕 닐스가 조카에게 잠시 양도하기도 했었다. 결국 다시 덴마크 군주의 작위가 된다.
이후 홀슈타인 백작령은 분할 상속에 따라 여러 영주령으로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다, 1386년 덴마크의 왕 올라프 2세와 그의 어머니이자 섭정인 마가렛 1세가 홀슈타인-렌트스부르크 영주에게 슐레스비히 공작령을 영지 공시 양도한다.[4] 1390년까지 홀슈타인-렌트스부르크 백작은 상속을 통해 다른 홀슈타인 영주령들을 홀슈타인-렌트스부르크 영주령으로 모두 통합시키는데, 홀슈타인-핀네베르크만 빠졌다.[5] 샤움부르크 가문은 1459년에 단절되었고 덴마크의 왕 크리스티안 1세가 홀슈타인-렌트스부르크 백작령과 슐레스비히 공작령을 상속받게 된다. 이때 덴마크 군주가 홀슈타인 백작령을 상속받는 대가로 리펜 조약에 서명하여 슐레스비히 공작령과 홀슈타인 백작령은 반드시 동일 인물이 두 작위를 동시에 가져야 하며 홀슈타인 백작령은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령임을 확인시켰다. 슐레스비히 공작령은 덴마크의 제후이고 홀슈타인 백작령은 신성로마제국의 제후인 작센-라우엔부르크 공국의 제후이며 이 둘의 작위를 가진 사람은 덴마크의 왕이니, 매우 복잡해지는 상황. 그래서 1474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3세는 홀슈타인-렌트스부르크 영주령을 홀슈타인 공작위로 승작시켜준다.
1490년 홀슈타인 공작령은 분할 상속 때문에 홀슈타인-고토르프와 홀슈타인-제게베르크로 분할된다. 홀슈타인-제게베르크는 슐레스비히와 함께 덴마크의 왕에게 상속되어 "로얄 홀슈타인"이라 불리었고 홀슈타인-고토르프는 "듀칼 홀슈타인"으로 불리었다. 1533년 홀슈타인과 슐레스비히 공작령은 다시 덴마크의 왕 크리스티안 3세에게 귀속되었다가 두 동생에게 분할 상속을 해야했는데, 리펜 조약 때문에 두 공작위를 서로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삼형제는 두 공작위를 삼등분해버린다.[6] 즉 2개의 공작위에 3명의 공동 공작(그 중 한명은 덴마크의 왕)이 존재하게 된 셈.
다행히 1580년 3개 중 두 곳이 로얄 홀슈타인/슐레스비히로 합쳐졌다. 시간이 흘러 1761년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표트르 3세가 러시아의 황위를 이어 받고, 슐레스비히 공작령을 노리고 덴마크를 침공할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러시아 황제가 된지 몇개월 되지도 않아 1762년 부인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폐위당하고 죽임을 당하는데 이 때문에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령이 완전히 러시아 제국으로 들어가는 상황이 나오려는 것. 결국 덴마크는 올덴부르크 백작령과 교환하여 홀슈타인 공작령으로 다시 하나로 합쳐 덴마크 군주의 영토가 되었다.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이 해산되면서 홀슈타인 공작령은 주권지역이 되어버린다. 1864년까지 독일 연방의 일원이긴 했지만 여전히 덴마크 왕실의 작위였다. 그래서 독일 연방에 덴마크 왕이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고. 나폴레옹 전쟁이 불러온 민족주의가 이 지역에서 퍼져나가면서 독일계 거주민이 많았던 홀슈타인과 남부 슐레스비히에서는 프로이센 왕국으로의 통합 움직임이, 덴마크계 거주민이 많았던 북부 슐레스비히에서는 덴마크 귀속 운동이 벌어지게 된다. 이러한 민족적 대립의 와중에 덴마크 왕국의 왕이었던 프레데릭 7세[7]가 1848년 자유주의에 입각한 헌법을 공표하자 이 지역의 독일계 귀족들이 이것에 거세게 반발한다. 독일계 귀족들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만의 독자적인 헌법과 독일 연방 가입[8]을 덴마크로부터 요구하면서 봉기를 일으키지만[9] 덴마크는 별다른 어려움없이 이를 진압한다.
더 이상 리펜 조약을 지킬 필요가 없는 1863년 프레데릭 7세의 죽음으로 두 공작령이 드디어 분할되게 된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 왕국은 오스트리아와 연합하여 덴마크와 전쟁[10]을 치뤘고, 덴마크는 결국 패하여 이 일대를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게 양보해야만 했다. 이후 슐레스비히 공국과 홀슈타인 공국에 관한 영유권을 놓고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고[11] 7주 전쟁의 결과 승리한 프로이센이 이 지역을 모두 차지하고 독일 제국을 건설한다. 7주 전쟁 이후 체결된 프라하 조약 5항에서는, 북부 슐레스비히에는 덴마크 계 거주민이 많았던 만큼 북부 슐레스비히의 덴마크 복귀 / 프로이센 잔류를 놓고 주민투표를 실시하도록 명시가 됐지만 자기들에게 불리한 결과가 나올 것이 뻔했던 만큼 프로이센 측은 이 주민투표를 결코 시행하지 않았다.
1876년엔 작센-라우엔부르크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방과 병합된다.
이러한 주민투표가 시행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였고, 덴마크계 주민들이 상당수 거주했던 북부와 중부 슐레스비히 홀슈타인에서 1920년 3월 덴마크 / 독일로의 선택을 놓고 주민투표가 이루어진다. 북부 슐레스비히 지역은 75%의 지지율로 다시 덴마크로 복귀하기를 선택하였으며, 중부 슐레스비히 홀슈타인은 80%의 지지율로 독일에 남기를 선택하였고, 영토반환은 같은 해 6월에 이루어졌다. 이 때 확정된 독일-덴마크 국경선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고, 심지어 그 아돌프 히틀러조차도 이 국경선에 대해서만큼은 시비를 걸지 않았다. (...)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붕괴직전의 나치가 세운 최후의 정부가 이 곳에 있기도 했으며, 이후 영국군에게 점령된 이 지역은 동방영토에서 온 피난, 추방민을 대거 받아들이면서 인구수가 폭증[12]했다.
3 여담
- 풍차와 같은 에너지 산업으로도 유명하다.
- 덴마크와의 접경지역인만큼, 소수의 덴마크 인들도 이곳에 거주한다. 대력 6만명 정도의 주민들이 덴마크어를 모어로 쓰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남슐레스비히 유권자 연합"이라는 정당을 조직해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의회에 참여하며,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정부는 대개[13] "남슐레스비히 유권자 연합"을 연정 파트너로 참여시킨다.
- 전통적으로는 저지 독일어의 영역에 해당되는 지역이지만 2차 대전 종전 이후 슐레지엔, 동프로이센 피난민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지방 고유의 사투리는 사라지고 오늘날에는 표준 독일어인 고지 독일어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 독일이 자랑한 세계적인 역사학자 테오도르 몸젠이 이 곳 출신. 몸젠 본인은 덴마크계 사람이지만, 정작 1848년 무렵 독일계 거주민이 일으킨 봉기에서는 독일의 편을 들어서 덴마크의 높으신 분들의 노여움을 사셨다고...
- 두 차례의 세계대전 기간 내내 독일 해군의 주요 거점지 역할을 수행했는데, 독일 제국의 종말을 시작한 킬 군항의 폭동이 바로 이 곳에서 시작됐다.
- 이 곳에 한자동맹에 속해 있던 도시인 뤼베크가 있다.[14] 현 덴마크, 노르웨이, 옛 그리스 왕실이 이곳의 지배가문이었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왕조의 방계인 글뤽스부르크 왕조이다. 옛 제정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 또한 이곳의 방계이다. 또한 현 영국 여왕의 부군인 필립 공公 역시 이 가문 출신이지만, 영국은 법적으로 왕족은 윈저 왕가에 속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필립 공의 아들인 찰스가 왕위에 오르더라도 영국 왕가 이름이 글뤽스부르크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15]
- 크릭스마리네가 보유한 함선 중에는 이 주의 이름을 딴 전(前)드레드노트급 도이칠란트급 전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호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이라 할만한 폴란드 침공은 당시 단치히에 있던 폴란드군 요새를 이 전함이 포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지옥문을 연 상징적인 함선이라 봐도 무방하다.
4 관련 항목
- ↑ Spielvogel, Jackson J. <Glencoe World History>. New York: McGraw Hill Education, 2004
- ↑ 현대 영어와 독일어에서 각각 목재를 의미하는 Holt와 Holz가 여기서 비롯된 단어이다.
- ↑ 여담이지만 오늘날 영국에서 -wich, -wick으로 끝나는 도시의 지명과 어원이 같다. 가령 노리치, 입스위치 등등. 이런 도시들도 모두 바이킹족이 영국으로 건너가서 세운 도시.
- ↑ 1250년부터 덴마크의 왕위는 아벨 왕가가 가지게 됐는데 이 가문이 샤움부르크 가문과 친척관계이다.
- ↑ 이 곳은 17세기가 되서야 홀슈타인 공작령으로 합병된다.
- ↑ 형제가 한명 더 있었으나 막내 동생이 성직에 몸을 담으며 상속권을 잃었다.
- ↑ 슐레스비히 공국과 홀슈타인 공국을 모두 덴마크의 영토로 확고히 귀속시키려고 했던 인물
- ↑ 홀슈타인이야 애초부터 독일 연방에 가입되어 있지만, 슐레스비히까지 독일 연방에 가입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 ↑ 이를 1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이라고 부른다.
- ↑ 이를 2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이라고 부른다.
- ↑ 본래는 서로 하나씩 차지하기로 했지만, 오스트리아를 독일 연방에서 추방하고 프로이센 중심의 통일 독일을 건설하기를 원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일부러 영유권을 가지고 오스트리아에게 시비를 걸었다.
- ↑ 일년 사이에 무려 40% 증가
- ↑ 집권당이 기독교민주연합이든 사회민주당이든
- ↑ 원래는 함부르크,브레멘처럼 독립된 자유도시였으나 히틀러 시대인 1937년에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 흡수되었다.
- ↑ 애초에 필립 공 본인부터가 모계 성(姓)인 마운트배튼을 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