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키스 시절.
이름 | James Augustus Hunter |
출생 ~ 사망 | 1946년 4월 8일 ~ 1999년 9월 9일 |
출신 | 노스캐롤라이나 주 허트포드 |
포지션 | 선발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64년 캔자스시티 어슬레틱스 자유계약 |
소속팀 | 캔자스시티-오클랜드 어슬레틱스 (1965~1974) 뉴욕 양키스 (1975~1979) |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영구결번 | ||
9 | 24 | 27 |
레지 잭슨 | 리키 헨더슨 | 캣피시 헌터 |
34 | 42 | 43 |
롤리 핑거스 | 재키 로빈슨 | 데니스 에커슬리 |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캣피시 헌터 | |
헌액 연도 | 1987년 |
헌액 방식 | 기자단(BBWAA) 투표 |
투표 결과 | 76.27% (3회) |
1974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사이 영 상 | |||||
짐 파머 (볼티모어 오리올스) | → | 캣피시 헌터 (오클랜드 어슬레틱스) | → | 짐 파머 (볼티모어 오리올스) |
1 개요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에이스 투수로, 역대 가장 센세이셔널한 우완투수를 논하는 자리에서 빠지지 않는 시대를 지배한 완투형 에이스지만 혹사와 부상으로 커리어를 일찍 접게 된 투수이기도 하다. 아울러 FA 제도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상 첫 FA로 기록되었다.
2 커리어
어린 시절엔 야구 뿐만 아니라 미식축구에서도 큰 재능을 보였는데, 라인배커-오펜시브 태클을 맡았고 야구에서는 유격수로 뛰면서 4번타자를 치기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스카우트들은 빠른 볼과 칼날 같은 제구력을 앞세운 투수로서의 역량에 더욱 주목했다.
하지만 고교 졸업을 앞두고 취미로 사냥을 나갔다가 사고를 당해 발가락 하나를 절단하게 되었고, 매의 눈으로 헌터를 지켜보던 스카우트들은 망했어요를 외치며 관심을 끊고 말았다. 다행히 발가락 외에 투수로서의 기량에는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캔자스시티 어슬레틱스와 계약에 성공했고, 계약 이듬해인 1965년부터 MLB에서 활동하게 된다. 한편으로, 본명이 워낙 개성 없는 이름이었기 때문에 찰리 핀리 구단주가 캣피시라는 별명을 하사했다. 이 일화는, 핀리 구단주가 "취미가 뭐냐?" 물어서 엉겁결에 "메기 낚시요"라 답했더니 "오, 그래? 그럼 오늘부터 니 이름은 메기(Catfish)다ㅋ"라 해버린 것(...) 뭐, 실제로도 도시 생활보다는 낚시와 사냥을 즐기는 전원의 삶을 더 좋아했던 사람이고 고교 때 사냥하다가 사고쳐서 발가락 하나 날려먹었던걸 보면 메기 사냥꾼(Catfish Hunter)이란 이름도 어울리긴 하다(...)
첫 2년간은 선발과 불펜을 오가면서 딱히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3년차인 1967년부터 선발로 확실히 내정된 후 13승과 2.81의 ERA를 찍는 기염을 토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팀이 오클랜드로 옮겨온 첫 해인 5월 8일에서 미네소타 트윈스를 상대로 퍼펙트 게임을 던지는 기염을 토한다.[1][2] 하지만 매년 두자릿수 완투를 기록했음에도 팀의 성적은 워낙 꽝이어서 승률은 매번 5할 밑에 머물러야 했는데, 60년대 말 레지 잭슨이 데뷔하고 아메리칸리그가 동/서 디비전으로 나뉘면서 헌터의 승률과 팀의 성적도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다. 69년과 70년 서부지구 2위를 차지한 에이스는 1971년 101승을 거두더니 72년부터 74년까지 월드시리즈를 3연패했고, 헌터는 71년부터 매년 21승 이상을 거둔데다 74년엔 2.49로 AL 평균자책 1위를 찍고 퍼거슨 젠킨스를 제치고 사이 영 상을 받았다. 이쯤 되면 슬슬 리즈시절이라 할 수 있겠는데…
그런데 구단주와 갈등이 생겼다. 당초 핀리 구단주는 양측이 동의한 10만불의 연봉 중 절반에 해당하는 5만불은 따로 헌터의 연금보험으로 입금한다는 약속을 했는데, 즉시 지불하는 5만불만 지불하고 연금보험에 관한 계약조건을 지키지 않았던 것. 결국 이 문제로 헌터는 여러번 다툰 끝에 73년 MLB 선수협의 단체교섭을 통해 이끌어낸 합의에 따라 이를 조정위원회에 회부했고, 피터 시츠(Peter Seitz) 조정관은 이 계약의 무효화를 선언하였고 헌터를 어느 팀에도 소속되지 않은 자유계약 신분으로 풀어줬다. 커트 플러드의 트레이드 거부 사건 이래 사상 최초의 FA가 탄생한 것.
마침 조지 스타인브레너가 분노의 현질을 시전하던 뉴욕 양키스는 5년 375만불이라는, 당시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충격적인 계약을 제시하며 헌터를 데려갔다.[3][4] 헌터는 양키스에서 첫 해에 23승 30완투[5] 328이닝이라는 미친듯한 투구를 펼쳤지만, 결국 커리어 내내 250~300이닝을 넘나드는 지나친 혹사에 못이기고 1976년 17승 298.2이닝을 끝으로 하락세를 타고 말았다. 다행히 76~78 리그 우승과 77, 78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에이스 시절 3번에 이어 커리어 통산 5번째 우승반지를 획득하긴 했지만 양키스가 우승할 때 헌터는 무너져 있었다. 결국 79년 겨우 33세밖에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헌터는 팔꿈치 부상에 1형 당뇨병 증세까지 겹치면서 은퇴를 선언하게 되었다. 부상과 지나친 혹사만 없었다면 300승이 가시화되던 젊은 에이스의 아쉬운 은퇴였다.
1987년 헌터는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세번째 투표만에 헌액되었다. 에이스 말년에 구단주와 다툰 것도 있고 해서 양키스 모자를 쓰고 갈거란 추측이 있었지만 헌터는 핀리와 스타인브레너 두 구단주와 양 팀 팬들에게 모두 감사를 표하며 명예의 전당 동판의 모자에 어느 팀의 로고도 새기지 않은 유일한 선수로 남았고, 어슬레틱스에서는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의 WS 3연패에 있어 일등공신이었던 캣피시 헌터의 27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하였다.
1988년 자서전도 출간하면서 대도시보다는 주로 고향인 허트포드에서 대투수 캣피시 헌터가 아닌 메기 사냥꾼 짐 헌터로서 여생을 보냈지만, 97~98년 겨울 무렵 전설의 타자 루 게릭의 생명을 앗아간 그 병을 진단받았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죽음만이 다가오는 안타까운 투병생활 끝에, 그는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서 병원에 입원했다가 집으로 돌아온지 이틀만인 1999년 9월 9일 5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어째 기일 날짜가 영... 그의 뒤에는 오클랜드와 뉴욕에서 함께 활동한 동료 레지 잭슨을 비롯한 전 야구계의 추모가 이어졌다. 사망 당시의 기사
- ↑ 여담으로 이 경기에서 헌터는 4타수 3안타 3타점을 기록하며 절륜한 타격을 과시했다. 통산 타율도 투수치고는 괜찮은 편인 2할대를 기록했다.
- ↑ 이후 22년 하고도 하루가 지난 2010년 5월 9일에 같은 장소 콜리시움에서 댈러스 브레이든이 탬파베이 레이스를 상대로 퍼펙트 게임을 던진다.
- ↑ 이 때문에 Catfish → Goldfish Hunter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감안하면 외부에서 바라보는 이 계약은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계약과 맞먹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 ↑ 헌터의 이런 대박 계약에 자극받은 에이스 선수들은 점점 자금력이 떨어지는 핀리 구단주의 에이스를 떠나기 시작했고, 레지 잭슨은 76년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거쳐 77년 뉴욕 양키스와 거액의 계약을 맺었다.
- ↑ 1946년 밥 펠러 이래 이는 최초의 기록이었고, 현재까지 다신 나오지 않고 있다. 로이 할러데이나 제임스 실즈 같은 완투형 투수라는 에이스들도 10완투가 고작인 이 시대에 이건 절대 다시 나올 수 없는 기록이다. 5인 로테이션 시대에는 한해 등판 횟수가 30번 조금 넘는 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