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zon Line
1 개요
1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국 최고 위원회에 의하여 정해진 폴란드 제2공화국의 국경선. 1차 대전 직후에는 전후로 발생한 러시아 혁명 및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으로 인해 무시당했다가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이 이 선을 다시 소련과 폴란드 사이의 국경선으로 정해야 할 것을 주장하며 주목을 받았다. 다만 소련이 폴란드 침공 때 차지한 르부프와 같은 폴란드 동부의 영토를 다시 반환하기를 거부하면서 1차 대전의 커즌 선과 2차 대전의 그것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1]
2 탄생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내건 14개 조항 중 13번째 항목은 "독립된 폴란드 국가는 폴란드인이 살고 있는 명확한 영토를 포함해야 하며, 바다로 자유롭고 안전하게 나갈 수 있어야 한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폴란드는 18세기 말 러시아 제국,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제국에 의하여 분할된 이후 120년 가까이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나라였기에, 연합국 측은 신생 폴란드의 국경선을 정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연합국 최고 위원회는 고심 끝에 폴란드 분할 이후 프로이센과 러시아 제국의 국경선[2]을 폴란드의 동쪽 국경선으로 삼을 것을 제안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폴란드는 제국주의적 야심에 물들어(...) 16세기 폴란드 최고 전성기 영토 회복을 기치로 내걸면서 이 제안을 고려조차 하지 않고 거부한 채로 소련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폴란드군은 패기롭게 키예프까지 진군했지만 붉은 군대에게 참패하고 전황도 급속도로 악화되자 1920년 7월 연합국에게 SOS를 쳤다. 그리고 폴란드와 소련의 휴전을 중재하고자 나선 조지 커즌(George Curzon) 경이 1919년의 국경선을 약간 수정[3]해서 양 측에 제안하고, 그 결과 커즌 선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소련이 이 중재를 무시하고 바르샤바 근교까지 진격하지만 폴란드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후퇴해야만 했다. 1차 대전으로 인해 이미 전쟁을 지속할 힘이 없었던 소련은 결국 폴란드에게 커즌 선보다도 무려 250km나 동쪽으로 밀려난 국경선[4]을 강요당했다. 이 국경선은 1923년 국제연맹에서 승인되었다.
3 조정
2차 세계대전 직전에 체결된 독소 불가침조약에 의하여 폴란드 침공 이후 소련과 독일 사이의 국경은 커즌선 보다 훨씬 서쪽으로 옮겨졌다. 이후 독소전쟁을 거치면서 폴란드를 점령한 소련은 폴란드 임시 정부와의 합의없이 커즌 선을 소련과 폴란드 사이의 국경으로 삼아야 한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했다. 이후 테헤란 회담과 얄타 회담을 거치면서 소련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던[5] 서방측은 소련과의 협상을 통해 르부프를 포함한 갈리치아 지역이라도 건지고자 협상을 시도했지만 강철의 대원수에게 그냥 씹ㅋ혔ㅋ다.[6] 그리고 연합국이 폴란드에게 꿩 대신 닭으로 준 것이 바로 슐레지엔과 동프로이센 등 독일의 동부 영토. 이로 인해 옮겨진 독일의 국경선을 오데르-나이세 선이라고 부른다. 오데르-나이세 선에 관련한 내용은 2차대전 후 독일과 폴란드의 영토 문제 참고.- ↑ 위의 지도에 등장하는 연한 파랑색 선이 1919년 제시된 커즌 선이며 짙은 파랑색 선이 폴란드 침공 당시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분할한 폴란드 분할선으로 2차 대전 이후 소련이 연합군에게 제안한 커즌 선이다.
- ↑ 1919년 당시의 민족분포도도 고려했기 때문에 완벽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 ↑ 연합국 최고 위원회의 제안에서는 폴란드의 영토에 포함됐던 르부프 및 갈리치아 지방이 러시아에게 넘겨졌다.
- ↑ 글 최상단의 회색영역.
- ↑ 쿠르스크 전투 이후 커즌선을 국경으로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런던에 있던 폴란드 임시 정부는 엄청나게 반발했다.
- ↑ 이때 스탈린이 서방측에게 한 말이 걸작이다. "러시아 사람들에게 내가 커즌 경보다도 러시아인스럽지 않다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