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회랑


Polish Corridor (영어)
Polnischer Korridor (독일어)
Korytarz polski (폴란드어)

1 개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립한 폴란드에게 바다로의 길을 만들어주기 위해 만들어진 발트해를 잇는 너비 32-112㎞의 기다란 땅이다.

2 위치 및 구성

1920년대 독일이 새로 만든 명칭으로 비스와(Wisła) 강 하류를 따라 뻗어있는 지역이다.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이 폴란드에게 반환한 서프로이센의 대부분과 포젠[1]의 일부지역으로 구성된다.

3 역사

3.1 배경

10세기 이후로 슬라브족들이 이곳에 이주해와서 살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폴란드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후 튜튼기사단과 폴란드 왕국 사이의 여러 차례 전쟁의 결과로 생긴 폴란드 왕령 프로이센폴란드 왕국의 일부로, 우리가 흔히 프로이센이라고 부르는 독일 제2제국의 모태가 되는 프로이센 공국과는 다르다!의 자치구역으로 15세기 이후 편입됐다. 이렇게 18세기까지는 폴란드의 영토였지만... 1772년 폴란드 분할을 통해 프로이센이 이 지역을 차지했고 이에 따라 이 지역은 약 200년 가까이 독일과 폴란드 양측의 무수한 다툼과 격렬한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분쟁지역으로 부상하게 된다.

3.2 베르사유 조약에 의한 폴란드 귀속

1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연합국은 폴란드를 무려 123년 만에 부활시켰다. 문제는 무려 123년만에 새로 생긴 나라였던 만큼 영토가 분명히 규정되어있지 않았다는 점.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은 14개 조항 중 13번째 항목에서 이미 폴란드에게 바다로 가는 통로를 보장해 줄 것을 결의했다. 문제는 이제 어느 나라가 폴란드에게 바다로 가는 길을 내주기 위해 자국의 영토를 양보해야 하느냐라는 문제였다. 그리고 연합국이 지정한 곳이 바로 이 포즈난과 서프로이센 지역이었다.

이 지역이 독일 영토의 연결부분이고, 따라서 독일인들의 반발이 엄청날 것이 뻔히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연합국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이 지역을 폴란드에게 넘긴 가장 큰 이유는 일단 이 지역이 민족자결주의 원칙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폴란드 분할 점령 이전의 천 년 가까이 폴란드의 영토였으며 주민 구성 또한 폴란드인이 대부분이었다. 1차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이었던 1910년 독일 당국에 의해 시행된 인구조사를 보면 이 지역의 인구 중 대략 60% 가까이가 폴란드인이었다.

게다가 독일 당국이 이 지역을 게르만화시키려고 노력하면서[2] 폴란드와 기타 소수 민족을 제 2국민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이 지역의 폴란드인들은 당연히 폴란드로의 귀속을 원했다. 문제는 연합국이 독일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독일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일부 지역도 폴란드의 영토로 만드는 병크를 저지른 것.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회랑과 인접한 그단스크(Gdańsk, 독일명 단치히(Danzig)) 시. 이곳은 독일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연맹이 관리하는 자유시로 설정되었다.[3][4]

하지만 이런 논리대로라면 폴란드 인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했던 빌뉴스와 그 이동지역, 리비우와 그 인근 지역은 모두 폴란드 영토가 되어야 한다. 거기에다가 위에서 주석으로 말한 상 실롱스크(독일어: 오버슐레지엔, 영어: 어퍼 실레지아) 지역도 폴란드인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폴란드 영토가 되어야 하며, 1938년에 폴란드가 뮌헨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뜯어간 치에쉰(Cieszyn) 지역도[5] 폴란드계가 절대 다수니 폴란드 영토가 되어야 한다. 그단스크는 역사적으로 분명히 폴란드 영토였고(폴란드로부터 중세적 특권을 인정받은 도시이긴 했는데 어디까지나 폴란드의 영토로서 그랬다), 그렇다고 폴란드에 넘겨주기엔 너무 독일인들이 많으니 자유시로 독립시킨 국제연맹의 결정은 당시로서는 꽤 합리적인 편이었다.[6]

여담으로 폴란드 회랑의 탄생 배경에는 민족자결주의 의외에 경제적 이유도 일정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신생 폴란드의 탄생을 결코 반기지 않을 독일이 폴란드의 바다를 통한 경제교역을 방해할 수 있다는 우려가 그것. 1937년 무렵, 폴란드 무역의 77.7%가 폴란드 회랑의 그단스크와 그디니아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던 걸 보면 엄연히 현실적인 걱정이었던 셈.

3.3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1922년 바이마르 공화국은 동프로이센 해상교통부(Seedienst Ostpreußen)를 설치하고 수송선들을 운용, 독일 본토와 단절된 동프로이센이 고립되지 않도록 했다. 물론 폴란드 회랑의 철도를 통하여 이동하는 방식도 있었지만 폴란드 당국의 감시가 너무 가혹해서 독일 민간인들은 보통 쓰지 않았다.[7] 어쨌든,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나 정부에서나 자신들의 영토가 강제로 분할되어 자신들의 밥이었던 폴란드에게 넘어간 일은 폴란드인들에 대한 독일인들의 인종주의적 태도와 결합되어 엄청난 분노를 일으켰고[8] 독일은 로카르노 조약을 통해 서부 국경선은 인정했지만 폴란드와의 국경선을 승인하는 것은 거부하였다.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폴란드에 대한 야욕을 아직 버리지 않고 있다는 인상을 폴란드에게 심어주었다.

또한 독일은 폴란드를 상대로 국경선의 수정을 계속 요구하면서 무역전쟁을 일으켰다. 1925년 1월 1일부로 베르사유 조약이 정한 독일과의 무역 특혜 기간이 만료되면서 폴란드는 새로 조약을 체결해야만 했다. 하지만 베르사유 조약의 수정을 추구하던 독일이 폴란드의 석탄 수입을 금지하자 폴란드가 독일 제품에 대한 관세를 인상하면서 맞섰다.

독일의 무역전쟁으로 인해 폴란드는 경제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는데, 독일은 폴란드의 최대 무역상대국(수입 43%, 수출 35%)이어서 무역 면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 거기에다가 상(上)실롱스크 지역의 중공업이 큰 타격을 입었으며, 석탄 수출이 급감하면서 전국적인 경기 침체와 함께 실업률이 증가했다. 이외에도 폴란드에 대한 외국 자본이 빠져나가면서 폴란드는 경제적 위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위기는 정치적 위기로 변화하여 1926년 5월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폴란드 민주정부를 상대로 5월 쿠데타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무역전쟁은 1934년까지 계속되었고 여기에 1929년 대공황으로 크리티컬 히트를 맞게 되면서 폴란드의 발전이 늦춰졌다.

폴란드는 1차 대전 후 폴란드-독일 국경이 민족 분포에 따라 대체로 잘 형성된 합리적인 국경이라 인식하고 있었고[9], 독일이 이런 폴란드를 상대로 국경수정을 요구하고 무역전쟁으로 사정이 악화되자 폴란드의 대독 인식은 더욱 악화되었다. 무역 전쟁이 한창이던 1925년 10월의 로카르노 조약으로 서부 국경은 인정하면서 동부 국경은 불인정한 독일의 태도는 이걸 더 악화시켰고, 여기에 과거 식민지배에 대한 기억까지 겹친 탓에[10] 1920~30년대 폴란드는 독일과 굉장히 적대적인 관계였다.

그리고 폴란드가 건국 초 독일 영토 내 거주하는 폴란드인들을 사주하여 봉기를 일으켰던 것에 대한 앙심탓이었던지, 폴란드 내에 거주하는 독일계 주민들의 불만을 부추겨서 폴란드를 흔드는 움직임도 취했다.[11][12] 예를 들어 그단스크의 독일인들은 태업과 파업을 일으키며 폴란드의 대외 무역을 방해했다. 이러한 독일의 움직임에 폴란드 역시 강경해서, 어떠한 도전에도 단호히 전쟁으로 맞대응하겠다고 맞받아쳤고 그단스크가 난리가 나자 폴란드는 서북쪽 해안에 최신 설비를 갖춘 항구 도시 그디니아(Gdynia)를 건설했다.

3.4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다

자세한 사항은 독일-폴란드 국경 분쟁 참조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이 지역을 둘러싼 분쟁은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구실로 이용되었다. 당시의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 침공으로 멸망했지만, 이후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하면서 새로 들어선 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번엔 동프로이센 대부분과 실롱스크 대부분, 포모제 전역도 받은건 덤 그런데 그게 르부프 같은 동부영토를 소련에게 빼앗긴 보상이란게 함정
  1. 폴란드어로는 포즈난(Poznań). 공통적으로는 대(大)폴란드라고 부른다.
  2. 적극적으로 독일인들의 이주를 장려했다. 독일인이 40% 가까이 인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게르만화 정책의 한 결과.
  3. 베르사유 조약 주요내용 3번째 참조.
  4. 이런 상황에서 독립에 한껏 고무된 폴란드 신생 정부는 상(上)실롱스크 지역에 거주하는 폴란드인의 봉기를 장려하기까지 했다. 단 상부 실롱스크 지역의 봉기 발발 배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단순히 폴란드에게만 분쟁의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해당 내용은 폴란드 제2공화국 항목 참조.
  5. 하지만 이 지역은 1차 대전 종전 직후 체코슬로바키아가 폴란드를 침공하여 뜯어간 곳이다.
  6. 사족으로 2차 대전 이후 그단스크에 거주하던 독일인들은 모두 독일 본토로 강제이주되었으며, 현재는 폴란드인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애초에 단일 민족국가로서의 폴란드는 2차 대전 이후에 탄생했다.
  7. 단, 철도를 이용할 때도 폴란드 비자를 받을 필요는 없었다고 한다.
  8. 히틀러의 무모한 대외도발에 전쟁이 날까 식겁하던 독일 군부 내에서도 폴란드는 언젠가 한번쯤 손봐줘야 한다는 여론이 다수였을 정도였다.
  9. 폴란드는 역사적 영토였던 그단스크가 독일계가 많았기에 포기했으며(참고로 명칭이 단치히 자유시다. 폴란드의 간섭을 받긴 했지만 폴란드의 영토는 아니었다), 이런 폴란드의 입장에서 반대로 폴란드계가 많은 상실롱스크를 먹은 것은 합리적인 일이었다.
  10. 1939년은 폴란드가 독립한 지 21년 후다. 한국 입장에서는 1945년 독립한 후 21년만인 1966년이란 거다. 35년의 지배를 받은 당시 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졌을 지 생각하면 123년의 지배를 받은 폴란드인들이 독일에 부정적인 건 거의 당연하다.
  11. 나치 독일 시기 탈퇴하기 전까지 국제 연맹에 폴란드 내 독일계들이 폴란드가 소수 민족의 권리를 탄압한다고 신고한 민원들만 대략 1만건이라고 한다.
  12. 한편 독일의 탄압도 폴란드 못지 않았다. 나치 집권 후 독일은 폴란드계를 가혹하게 대했으며, 폴란드 침공 직전인 1939년 8월까지 2천여 명에 이르는 폴란드계 독일인(주로 지식인 등 지도자 계층)들을 탄넨베르크 작전(Operation Tannenberg)으로 학살하였다. 폴란드가 1차 대전 후 독일계에 가혹하게 대했다고는 하지만 독일계에 대한 학살까지 저지르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