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트-폴란드 전쟁 | ||
적백내전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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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
1919년 2월 14일~ 1921년 3월 18일 | ||
장소 | ||
소련의 유럽 부분 영토[1] 및 폴란드 제2공화국 | ||
교전국 | 폴란드 제2공화국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 |
지휘관 |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2] | 레프 트로츠키(국방장관) 미하일 투하체프스키(서부전선군 사령관) 알렉산드르 예고로프(남서전선군 사령관) 이오시프 스탈린(남서전선군 정치장교)[3][4] 세묜 부됸늬(제1기병군 사령관) |
결과 | ||
리가 조약 체결 발트 3국의 독립[5] 폴란드의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점령 | ||
병력 | 73만 8천여 명 | 80만~95만여 명 |
피해규모 | 전사 4만 8천~6만여 명 부상 11만 명 포로 5만 명 | 전사 6만~10만여 명 포로 8만~15만 7천여 명 |
1 개요
소파[6]전쟁, 혹은 폴란드-볼셰비키 전쟁이라고도 한다. 소비에트[7]-폴란드[8] 전쟁은 1919년 2월 14일부터 1921년 3월 18일까지 약 2년 간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은 서방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유럽의 정치사와 군사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 중 하나다. 정치적으로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군사적 혁명 수출 계획이 좌절되어 세계 혁명을 주장하는 레프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 대신 이오시프 스탈린의 '먼저 우리 식대로 잘 살아 보자'는 일국사회주의가 득세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전쟁에서는 기병의 기동력에 의해 승패가 결정되었는데, 이 때문에 소련에서는 이때의 전훈을 가지고 종심 전투 이론을 개발하게 된다.
2 전개
폴란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이루었다.[9] 한편 소비에트 러시아는 당시 러시아 혁명 후 적백내전이 시작되어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블라디미르 레닌이나 트로츠키 같은 혁명가들은 서유럽에서 혁명이 벌어지지 않는 한 러시아의 지위가 위험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서유럽으로 가는 통로인 폴란드를 반드시 확보하고자 했다. 그러나 폴란드는 자신의 독립을 위협하는 러시아의 혁명 수출에 휘말리려 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양국 간에는 필연적으로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국경 부근에서는 볼셰비키 적군(赤軍)과 폴란드군 사이에 잦은 교전이 벌어졌다. 여기에 폴란드는 폴란드대로 독립 직후 팽배한 민족주의로 말미암아 옛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크고 아름다운 고토를 되찾기 위하여 러시아를 침공하려 했다. 한마디로 빌뉴스와 민스크와 키예프까지 다 차지하겠다는 것이었다.환빠쩌네
결국 본격적인 전쟁은 폴란드군이 벨라루스로 진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919년 2월 14일, 폴란드는 베레자 카르투스카(Bereza Kartuska)에 주둔하던 소련군을 공격하여 80명을 사로잡았다. 이후 폴란드군은 북동쪽의 소련군을 몰아내면서 빌뉴스와 민스크를 점령했다. 이후 1920년에는 친폴란드 우크라이나인들의 원조 요청을 받고 한창 내전이 벌어지던 우크라이나를 침공해서 승리를 거두었고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절반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폴란드의 지배를 원치 않는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공산주의자들이 소비에트 러시아에 구원을 청했고,[10] 이에 붉은 군대가 개입하게 되었다.
반격은 성공적이어서, 소비에트군은 폴란드-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어서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까지 진출했다. 더욱이 러시아 공산당은 폴란드를 넘어 독일까지 진출, 독일 공산당을 원조하여 정권을 장악하여 러시아-폴란드-독일을 아우르는 거대한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을 만들자는 대소련 구상도 하였는데,[11] 이것이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이 폴란드를 원조하는 계기가 되었다.[12]
파일:Battle of Warsaw 1920.jpg
▲ 바르샤바 근방에서 폴란드군에게 노획된 붉은 군대 군기.
폴란드군은 수도 바르샤바 근처에서 진격하던 붉은 군대의 허술한 남쪽 측변을 돌격대로 들이받아 포위 격멸시키는 작전으로 대승을 거두었고,[13] 이를 기점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어 폴란드에 유리하게 되었다. 우크라이나를 잃은 폴란드는 벨로루시만큼이라도 차지하려 했고 소비에트 측은 폴란드 말고도 각지의 반소련 백군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14] 폴란드와의 전쟁에만 신경 쓸 수가 없었으므로 일단 1920년 10월에 정전을 했고, 이후 협상에서 폴란드에 대폭 양보해서 벨라루스를 분할하여 3분의 2는 폴란드에게, 민스크를 비롯한 3분의 1은 러시아가 분할하는 강화 조약을 맺었다. 이것이 바로 1921년 맺어진 리가 조약이다.
바르샤바 전투의 패인을 둘러싸고 국방장관 레프 트로츠키, 전선 사령관 미하일 투하체프스키는 명령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지휘권을 행사한 정치장교 이오시프 스탈린과 크게 싸웠고,[15] 이게 스탈린 집권 후에 대숙청의 한 원인이 된다. 당장 트로츠키는 당내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고 축출된 뒤 암살당했고, 투하체프스키는 전간기 소련 육군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끌었음에도 대숙청으로 처형당했으며, 심지어 그의 군 경력에 흠집을 낸 폴란드인들은 카틴 학살로 보복당했다.[16] 뒤끝 쩐다
3 영향
이 전쟁에서 폴란드는 크고 아름다운 동방 영토를 할양받았으나[17] 그 영토의 대부분은 폴란드인이 살고 있는 영토가 아닌 벨라루스인과 우크라이나인이 사는 영토였다. 역사적으로 우크라이나는 몽골의 침입으로 키예프 공국이 멸망한 이래 동부는 전통적으로 몽골 제국과 그 후계의 지배를 받아오다 러시아에 넘어갔고, 서부는 리투아니아의 지배를 받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치세에 폴란드의 지배로 넘어갔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망하면서 우크라이나 대부분 지역을 러시아가 지배했으나[18] 폴란드가 부활하면서 다시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배를 주장했고, 러시아의 후신인 소련은 소련대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배를 회복하고자 했기에 양국은 우크라이나를 두고 대립했다. 벨라루스도 마찬가지로 양국이 대치하여 분할 통치를 시행하였다.
서부에서는 서부대로 단치히와 서프로이센[19] 지방을 빼앗긴 독일이 폴란드에 이를 갈고 있었다.[20] 그래서 독일-소련은 폴란드에 관한 태도에 있어서는 견해가 일치했고 이것이 아돌프 히틀러 집권 이전까지 양국의 군사 협력을 이끌었다.
히틀러는 집권 후, 처음에 소련에 적대 정책을 취했으나 폴란드를 침공하기 전 소련과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고 폴란드를 반분하기로 밀약을 했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벌어지자 소련은 뒷짐지고 구경하고 있다가, 폴란드군의 전열이 거의 무너진 9월 17일 폴란드의 동부를 침공했다. 대부분의 병력이 독일군을 막으러 서부전선에 가 있던 폴란드는 뒤통수를 친 소련에게 무너졌고[21] 소련은 침공 명분을 '폴란드에게 빼앗긴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반의 수복과 독일의 침공으로부터 폴란드 내 우크라이나계와 벨라루스계 주민들의 보호'라고 선전했다. 물론 실제로는 둘이 짜고 친 거지만.
1945년 나치 독일이 패망한 이후, 연합국으로서 대지분을 가지고 있던 소련은 폴란드의 영토반환 요구를 무시하고 1939년에 수복한 영토를 소련령으로 확정했다.[22] 소련은 폴란드에게서 뺏은 땅을 합쳐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랑 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이루게 된다. 대신 폴란드는 독일의 동부 영토를 대거 할양받았고, 덕분에 폴란드의 영토는 전쟁 전과 확연히 달라지게 된다. 사실 그 영토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이었기 때문에 폴란드는 본의 아니게 역사상 처음으로 단일민족국가를 이루게 되었다. 근데 얻은 서쪽 땅은 전통적인 독일 땅 물론 이때 폴란드 귀속 영역권에 거주하던 독일인들은 거의 대부분 독일로 추방되었다.
단 폴란드의 구 동방 영토가 대부분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이 사는 지역이었다곤 해도 그 지역에 살던 폴란드인의 숫자 역시 상당했다. 그러나 2차 대전 후 소련 귀속 영역권에 거주하던 폴란드인들은 대부분 폴란드로 추방당했다. 이들은 주로 독일인들이 추방된 땅에 정착하게 되었다. 돌려막기
4 결론
약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동정론도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사례가 이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폴란드는 1차 대전에서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라 꼴도 갖추기 전에 바로 침략자의 본성을 드러내었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난 배경을 세세히 살펴보면 단순히 폴란드의 영토욕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일방적으로 매도하긴 어렵다. 폴란드 입장에서는 123년에 걸친 러시아의 점령으로 인한 원한과, 서방으로의 진격을 기도하던 신생 소련의 혁명 수출에 대한 공포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시기의 소련은 서부 전선에 대한 공세를 진행하고 있었고, 이에 폴란드가 대항하면서 부딪힌 것이 바로 폴란드-소련 전쟁이다.
애초에 전쟁이 벌어진 주무대인 폴란드 동부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는 원래 소련 영역도 아니었다. 위에도 보면 알겠지만 원래 우크라이나 중앙부는 신생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의 영역으로 러시아 제국 붕괴 이후 세워진 우크라이나인들의 민족국가였다. 하지만 이후 소련의 공세를 당하면서 계속 밀리더니 급기야 전염병까지 겹쳐서 군대는 박살나고 폴란드 국경지대로까지 피신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반소적이라는 점에서 일치하던 폴란드와 서로 손을 맞잡은 것이다.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폴란드에게 동갈리치아의 영유를 그대로 인정하는 댓가로[23][24] 폴란드를 대소전쟁에 끌어들인 것. 이미 북부의 벨라루스 전선에서 소련과 싸우던 폴란드는 어차피 전쟁이 벌어진 이상, 이왕 이렇게 된 거 우크라이나에서도 싸우자! 라는 생각으로 우크라이나로 진격했다. 거기에 소련도 서전에서 승리를 거두자 폴란드를 영향권 아래 넣으려고 폴란드 국경을 넘어 패주하는 폴란드군을 추격했기 때문에 전쟁을 확대시킨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말로 폴란드가 침략자로 비판받아야 하는 것은 전쟁 기간 동안 이웃 국가이자 한때 연합을 이루던 나라인 리투아니아의 수도를 군대를 앞세워 강탈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영토욕에 사로잡혀 이웃한 약소국을 침탈한 대표적인 사례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리투아니아는 이 사건 직후 격분하여 즉시 폴란드와의 외교를 단절했으며,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이때의 앙금이 남아 폴란드에 대한 국민 감정이 그리 좋지 못하다. 이후에도 폴란드는 뮌헨 협정으로 독일이 체코를 분할 강점할 때 꼽사리 껴 폴란드계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체코의 톄신 지방을 강탈하고 얼마 후에는 슬로바키아 국경의 야보리나와 토르스테냐까지 합병했다. 단 톄신은 독립 당시 폴란드 영토였던 곳을 체코슬로바키아가 1919년 무력으로 빼앗아간 곳이라 약간은 영토 반환의 성격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다른 침략자들에 동조하여 이웃나라를 침탈한 것을 정당화하긴 어려우며, 결과적으로 보면 앞을 내다보지 못한 치명적인 외교 실책이 되고 말았지만.
결론적으로 폴란드는 이렇게 독일, 러시아와 원한을 쌓은 대가를 2차 대전 때 혹독하게 치른다. 우방인 영국과 프랑스는 멀고, 바로 국경을 접한 강대국 독일, 소련은 가까웠다. 이후 공산 정권 시기가 되자 소련은 일단 폴란드의 우방국이 되었으나 자신들이 어려울 때 빈집털이 온 폴란드를 매우 고깝게 보았다. 2차 대전 때 워낙 독일과 소련에 당하기만 해서 동정을 사기도 하지만, 이 당시 폴란드는 후에 히틀러가 주동이 된 체코 분할에 참가한 전적도 있다. 힘도 없으면서 멀리 있는 동맹국(프랑스)만 믿고 동서로 접한 양 강대국과 대치하던 폴란드 제2공화국은 실패한 외교의 전형으로 국제관계학에서 중요한 사례로 손꼽힐 정도다.
추가로 이때 폴란드군은 소련군을 대파하고 붙잡은 소련 포로들을 학대하여 8만 명 포로 중 15,000명에서 2만명 가량이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사망율을 보면 약 20-25%인데, 이는 2차대전 당시 독일군 관리하의 소련국 포로 사망율과 비슷할 정도다. 소련 시절 카틴 학살 같은 만행을 저질러 놓고도 공산주의 시절은 물론[25] 공산주의가 몰락한 현재까지도 러시아 측이 뻔뻔스럽게 사과를 거부하는 레퍼토리 중 하나가 이때의 포로 사망율로 물타기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물타기하는 러시아가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그리고 이 전쟁에서 소비에트 측에 붙잡힌 폴란드 포로들도 5만 명 중 2만여 명이 사망했기에 적어도 포로 대우 측면에서는 러시아도 그렇게 자유롭지 못하다.- ↑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일대.
- ↑ 폴란드 침공 당시 폴란드군 원수였던 그 사람 맞다.
- ↑ 일개 정치장교인 데도 무리하게 전선을 지휘하다가 폴란드군에게 역으로 털려 패전을 초래했다는 설이 퍼져 있었으나, 해당 블로그에 따르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 ↑ 국방장관 레프 트로츠키, 서부전선군 사령관 미하일 투하체프스키가 패전의 책임을 스탈린에게 전적으로 전가하고 군에서 물러나게 한 것에 원한을 품은 스탈린은 약 14년 뒤 유례없는 피바람을 일으켜 이들에게 복수했다.
- ↑ 하지만 독소 불가침조약 체결 이후 소련에 다시 잡아먹혔다.
- ↑ 폴란드를 한자로 음차하면 '파란(波蘭)'이라고 한다.
- ↑ 소련, 즉 소비에트 '연방' 설립 이전 시점이라 이렇게 칭한다.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같은 편으로 참전했지만 하나의 연방으로 묶이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 ↑ 정확히는 폴란드 제2공화국과 우크라이나 서부의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이 같은 편으로 참전.
- ↑ 정확히는 18세기 독일 제국, 오-헝 제국, 러시아 제국의 세 차례에 걸친 폴란드 분할에 의해 각 국가에 귀속되었던 영토 중 러시아령 폴란드가 1차 대전 후반기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독일에게 넘어갔고, 이후 다시 동맹군이 패전하며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폴란드령을 포기함으로써 독립할 수 있었다.
- ↑ 당시는 아직 소비에트 연방이 건국되기 전이었다.
- ↑ 독일은 제 2제국 시절부터 사회주의 사상의 중심지였으며, 특히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전쟁 책임론과 사회적 혼란에 힘입어 공산당이 약진하고 있었다.
- ↑ 사실 군사 원조 자체는 폴란드 독립 직후부터 프랑스에 의해 계속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래로 폴란드인들이 계속 복무해 왔던 인연으로 프랑스는 폴란드에 대하여 매우 우호적인 입장이었고, 그래서 1차 대전중 프랑스군에 복무한 폴란드인(약 20만 명에 달했다)들을 종전으로 남아도는 잉여 군수 물자와 군사 고문단과 함께 본국으로 돌려보내 신생 폴란드군을 구성할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당시 폴란드군의 사진이나 기록화를 보면 죄다 프랑스 군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 위의 내용을 보면 폴란드가 서방 연합국의 도움을 받은 덕분에 겨우 승리한 것으로 착각할 수 있지만, 실상에 있어 당시 바르샤바의 작전은 폴란드가 입안한 것이었고, 전투에 참전한 병력도 전부 폴란드 병사들이었다. 물론 이전에 프랑스에서 건너온 폴란드 자원병(폴란드 출신 프랑스 이민자와 폴란드 출신 독일군 포로로 구성)과 각종 물자, 프랑스 장교들이 상당한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이 승리의 주연은 단연 폴란드와 독립 영웅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였다.
- ↑ 이 당시 러시아의 적백내전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영국의 지원으로 백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한 시기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의 분수령이 되었다.
- ↑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설도 있는데, 당 차원에서 결정한 전략이 전선을 확대해서 폴란드 곳곳에 혁명을 전하고 소수민족의 혁명을 유도하는 것이라 스탈린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전선을 지나치게 확대한 트로츠키와 레닌의 책임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애초에 주변국에 혁명의식을 퍼트리는 것이 트로츠키가 구상한 방식. 어쨌든 이 사건 때문에 스탈린과 트로츠키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그리고 투하체프스키의 지휘에도 문제가 있었다.
- ↑ 사실 카틴 학살은 폴란드의 엘리트층을 제거함으로써 폴란드의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약화시키고 전후 소련의 지배를 용이하게 하려는 목적이 더 컸다.
- ↑ 이런 동방 영토를 폴란드에서는 크레시(Kresy)라고 한다.
- ↑ 예외적으로 서남부 5주는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차지했다.
- ↑ 신생 폴란드에서는 포모제(포메라니아)라고 불렀다.
- ↑ 그런데 해당 지역은 1772년 폴란드 분할 이전 폴란드 영토였고, 인구 비율로 따져 봐도 절반이 넘게 독일인이긴 했지만 단치히, 그리고 독일 국경을 접하는 동서부에 밀집해 있었으며 그디니아나 다른 지역의 주민은 대부분 폴란드인이었다. 애초에 1795년 제 3차 폴란드 분할로 나라가 멸망한 지 123년 만인 1918년에 국가 재건에 나서는 폴란드에게 있어 베르사유 조약에서 인정된 바다로의 폴란드의 출구는 약속된 것이었다. 폴란드가 과거 자신들의 영토였던 그단스크와 그 주변 지역 및 연결 통로를 먹는 것은 당연했던 것. 그나마도 단치히는 독일계가 절대 다수라 폴란드 지배를 거부해서 자유시가 되어 버리는 바람에 먹지도 못했다(다만 폴란드가 자유시의 내정에 간섭을 하긴 했다).
- ↑ 이때 폴란드 입장에서 두고두고 한스러운 것이, 당시 폴란드 동부 지역은 독일군이 진격하지 못한 상태였고, 침공해 온 독일군은 독일군대로 탄약 재고가 동이 나고 있었다. 만일 소련이 침공하지 않았으면 독일군은 곧 탄약이 바닥나 공세종말점에 도달했을 것이고 폴란드는 후방인 동부 지역에서 병력을 재정비해 탄약이 바닥난 독일군에게 역공을 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으면 오히려 사정이 급해진 독일 측에서 강화를 요청하여 영토를 좀 뺏기긴 하더라도 조금이나마 더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를 맺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 ↑ 단 비아위스토크 인근 지역만은 예외적으로 폴란드에 반환했다.
- ↑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이 특별히 친폴란드 성향이라서 그런 건 아니고(오히려 우크라이나는 폴란드의 혹독한 지배를 경험한 과거가 있기 때문에 반폴란드 감정이 엄청 심하다) 소련에 맞서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폴란드와 협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동갈리치아를 넘겨준 것이다.
- ↑ 당장 폴란드-소련 전쟁에서 폴란드에 열성적으로 협력하던 시몬 페틀류라는 과거 동갈리치아를 놓고 벌어지던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우크라이나측의 주요 요인으로 참전한 인물이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개판스러운 상황. 참고로 대소 전쟁이 끝난 후 페틀류라는 폴란드한테 팽당한다(...).
- ↑ 잘 안알려져 있지만, 소련의 위성국가였던 폴란드 공산정권도 197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소련에 대해 카틴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 및 사과를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