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데르-나이세 선

Oder-Neiße-Grenze (독일어)
Granica na Odrze i Nysie Łużyckiej (폴란드어)
Oder-Neisse Line (영어)


[1]

1 개요

2차대전의 종전 이후 새로이 형성된 독일폴란드 사이의 국경선. 폴란드어로는 오드라-나이제 선이라 불린다. 동프로이센슐레지엔, 포메른을 비롯하여 전쟁 이전 오데르-나이세 선 동부에 자리잡은 독일의 영토는 종전 후 폴란드와 소련에게 분할되어 할양됐으며 기존에 거주중이던 독일인들은 강제로 추방되었다.[2]

당연히 독일 내부에서는 오데르-나이세 선을 두고 엄청난 적개심과 반발이 있었다. 폴란드 회랑 시즌2 서독의 경우 한동안 이 국경선의 승인을 거부[3]하다가 1970년대 빌리 브란트가 집권하고 동방정책을 펼치는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승인한 데 이어,[4] 1990년 통일 과정에서 영구적으로 포기하면서 오늘날에는 명실상부한 독일과 폴란드의 국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2 형성

엘베 강 유역은 10세기 동방식민운동까지만 하더라도 슬라브인들의 영토였기 때문에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의 전간기에서 극단적인 폴란드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엘베 강까지 영토를 확장하자!'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물론 폴란드 내부에서조차 이에 대한 반응은 '남의 힘으로 독립한 주제에 환빠짓 하냐?' 정도(...).

이후 폴란드 침공에 따라 폴란드가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한 뒤 런던에 수립된 폴란드 망명 정부에서는 독일과 새로 국경선을 수립해야한다는 주장이 진지하게 검토되기 시작한다. 폴란드 망명 정부 측이 원했던 영토는 단치히, 동프로이센, 슐레지엔, 포메른의 일부 등이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구 독일 영토랑 똑같잖아

종전 후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기는 했지만 망명 정부가 가질 수 있는 정치적 영향력은 정말 눈물나게 미미한 것이었고, 실제로 이 국경선의 형성을 주도한 것은 스탈린처칠이었다.[5] 폴란드 침공을 통해 삥 뜯은 구 폴란드 동부 영토(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당시 폴란드가 얻은 벨라루스 서부와 우크라이나 서부)를 돌려주기 싫었던 스탈린은 그에 대한 보상으로 독일의 동부 영토를 폴란드에게 넘겨주기로 결정했고[6] 독소전쟁이 발발한 이후인 1941년 10월 '동프로이센을 슬라브인들의 품에 되돌릴 것'을 주장했다. 같은 해 12월 처칠의 특사로 파견된 영국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 역시 스탈린과의 만남에서 스탈린이 제안한 새로운 국경선에 얼추 동의하면서 서서히 오데르-나이세 선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후 한동안 전쟁이 격화되면서 일단 전쟁에서 이기는게 선결과제였던지라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국경 문제는 연합군이 본격적으로 승기를 잡은 1943년 무렵부터 다시 논의되기 시작한다. 테헤란 회담에서 스탈린은 폴란드의 국경을 오데르 강 근처까지 서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독일을 견제할 Poland Stronk! 강한 폴란드를 원했던 처칠과 루즈벨트 역시 이에 동의를 표했다. 그러나 전쟁이 사실상 연합국의 승리로 굳어진 후 1945년 2월에 개최된 얄타 회담에서 연합군은 다시 한 번 폴란드의 국경선 문제를 놓고 논의를 전개한다. 이 시기는 서서히 냉전의 기미가 보이던 시기였고 소련이 동유럽에 세력을 뻗치고 폴란드가 공산화하여 소련의 꼭두각시가 되어가는 것이 명백해지자 공산 폴란드에 지나치게 영토를 줄 필요가 없어짐에 따라 서방은 종전 후 유럽에서 최대한 자신들의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소련과 치열한 머리싸움을 벌인다.

이로 인하여 독일과 폴란드의 국경선을 둘러싸고도 충돌[7]이 빚어진다. 대표적인 충돌 사항으로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슈테틴을 누구의 영토로 할 것이냐(슈테틴은 전통적으로 베를린의 외항이었기 때문에 이를 폴란드에게 넘기면 독일의 반발이 격렬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런데 결국 넘겼다), 다른 하나는 나이세 강 서안까지도 폴란드에게 넘겨줄 것이냐 마느냐의 문제였다. 헌데 역시 넘겼다 당초 미국과 영국은 오데르-나이세 선이긴 한데 동쪽에 있는 글라처 나이세 강(Glatzer Neiße. 폴란드어로는 니사 크워즈카 강(Nysa Kłodzka))을 새 국경으로 만들려고 했으나,[8] 소련의 반대로 실패했다.

전쟁은 독일의 패배로 끝났고 결국 최종적인 합의는 1945년 8월의 포츠담 회담에 가서야 이루어지게 된다. 포츠담 회담을 통해 양국의 국경선이 최종적으로 확정됐고, 연합국 사이의 합의에 따라 전후 독일과 폴란드 사이의 국경이 오데르 강과 나이세 강으로 정해짐에 따라서 이 국경선 외부에 위치했던 오데르 나이세 선 이동이 고스란히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에게 넘어갔다. 양 측의 인구를 이동시키는 움직임을 거쳐[9] 오데르-나이세 선 동부에다가 오데르-나이세 선보다 더 서부에 위치한 슈테틴까지도 공식적으로 폴란드에게 할양되었다. 그 때까지 남아있던 독일계 주민들 8백만 명을 선 서쪽으로 이주시키는데 이는 세계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강제 집단 이주로 기록된다. 또한 구 폴란드 영토에서 추방된 폴란드인을 신 폴란드 영토로 이주시켜 채웠다. 허나 칼리닌그라드(쾨니히스베르크)를 비롯한 동프로이센 북쪽 영토들은 정말 뜬금없이 러시아에게 병합됐다.

더 나아가서 스탈린은 동프로이센 전체를 소련이 차지하거나 독일민족과 소수민족 위주의 동프로이센 북부 3분의 2를 차지하려 했지만 관대하게(...) 폴란드에게 동프로이센 남부 3분의 2를 넘겨주었다.[10]

3 이후

2차대전 후 독일에 대해서 거의 노이로제에 걸려있던 폴란드 입장에서야 당연히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애초에 오데르-나이세 국경선이 독일의 침략 전쟁에서 패전함에 따른 결과였던만큼 인과응보다라는 반응이 절대다수였으며, 또한 르부프를 비롯해 소련에게 상실한 동부 영토[11]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라고 보는 시각도 우세했다. 폴란드인들은 이 국경선에 의거해 추방된 독일인들에 대해서도 전반적으로 냉담했는데, 2차대전 기간 내내 이들이 독일 점령군에게 빌붙어 각종 특권을 행사하고 학살과 같은 전쟁범죄에도 도움을 줬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겠다.[12]

전승국들의 경우 이 국경선에 대한 반응이 제각각이었다. 이 국경선의 가장 큰 수혜자였던 소련이야 당연히 대찬성. 소련은 아예 '독일이 통일하고 싶으면 이 국경선부터 인정해라.'라고 못을 박았을 정도였다. 게다가 알자스-로렌의 영유권을 두고 독일과 오랫동안 대립하였던 프랑스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에게 해를 당했던 전 유럽국가들 역시 전반적으로 오데르-나이세 선을 지지하는 편이었다. 프랑스의 경우 냉전 초기에야 미국의 눈치를 봐야했으니 오데르-나이세 선의 승인을 거부했지만 제4공화국 정부가 무너지고 들어선 샤를 드 골 대통령의 제5공화국 정부가 들어선 이후 1959년 오데르-나이세 선을 승인해버려 서독과 외교적으로 마찰을 빚었다. 미국과 영국의 경우엔[13] 오데르-나이세 선을 수정할 '최종협상'을 한동안 주장했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고 냉전도 진정되면서 오데르-나이세 선을 인정하였다.

한편 독일의 경우, 동독은 처음에는 이 국경을 승인하는 것을 거부하였지만 스탈린의 무지막지한 압박으로 인하여 결국 1950년 이 국경선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서독의 경우에는 초대 수상이 강경 반공주의자[14]로 유명했던 콘라트 아데나워였던만큼 당연히 오데르-나이세 선의 승인을 거절했다. 이후 빌리 브란트가 총리에 오른 뒤에야 1970년 동방 정책의 일환으로 폴란드와 외교노선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오데르-나이세 선을 국경으로 승인하였다. 브란트의 파격적인 외교정책은 독일 내부에서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정작 아데나워의 정치적 양자였던 헬무트 콜이 집권한 이후에도 독일은 동방 정책을 지속해나갔다. 이미 도장찍은 걸 어떻게 깨 이후 1990년 독일 통일 과정에서 독일은 옛 영토를 영구히 포기할 것을 선언했고 이에 따라 옛 영토의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법적 근거였던 기본법 23조를 폐기하면서 오데르-나이세 선은 독일과 폴란드의 국경선으로 고착되었다. 물론 아직까지도 정신 못차린 독일 극우세력들과 신나치주의자들은 이 국경선을 승인 못한다면서 맨날 시위하고 반발하고 있다.
  1. 진한 파란색이 오데르 강이며 연한 파란색이 나이세 강(정확하게는 라우지처 나이세 강이다. 나이세 강이라는 이름은 글라처 나이세 강을 비롯, 오데르 강의 지류 여러 곳에 붙어있다)이다. 이 두 강을 연결시켜서 국경이 형성됐기 때문에 오데르-나이세 선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2. 이렇게 추방된 실향민들은 거의 1,500만에 가까운 수였으며 '추방민 연합회'라는 이익단체를 조직해 1970년대까지 서독 정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3. 동독의 경우 이 국경선을 종주국 소련의 압력으로 마지못해 일찌감치 승인했다.
  4. 이 과정에서도 서독 내부에서 엄청난 반발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이 국경을 실질적으로 승인했다고 빌리 브란트는 하마터면 의회에서 불신임안을 받을 뻔했다. 다행히 아슬아슬하게(2표 차)로 불신임은 피했다.
  5. 그런데 정작 스탈린은 폴란드 망명 정부가 상술한 동프로이센, 슐레지엔, 단치히 등을 합병하기를 원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저색휘들 전쟁에서 그렇게 털리고도 아직도 꿈꾸고 있네 ㅋㅋㅋ'라고 비웃었다고 전해진다(...).
  6. 덧붙여서 독일의 동부 영토를 폴란드에게 넘겨주면 당연히 독일과 폴란드 사이의 충돌이 생길 것이니 이 충돌을 이용해서 외교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계산도 다분히 깔려있었다. 이이제이?
  7. 여담으로 처칠은 '나이세 강 서안에 거주하는 독일인까지 싹 추방하고 폴란드에게 이 일대를 할양하면 영국인들이 충격을 받을 것이다'라며 반대했는데, 이에 대해 스탈린은 '독일인들 어차피 붉은 군대 피해서 다 서쪽으로 도망갔잖아? 뭔 상관?'이라고 일갈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오데르-나이세 라인 동부지방에 살던 독일인들이 싹 다 소련군을 피해 서쪽으로 피난갔다는 것은 소련의 프로파간다이다. 종전 직후에도 최소한 수백만명의 독일인들이 여전히 이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다. 결국 소련은 끝까지 남아있던 독일인들을 모두 추방하거나 강제 혼혈하여 독일인의 흔적을 지워버렸다.
  8. 이 시나리오에 따르면 주도 브레슬라우를 비롯한 슐레지엔의 절반은 독일이 건질 수 있다.
  9. 폴란드 영토로 새로이 편입될 구 독일 영토에 거주하던 독일인은 이미 전쟁 말기에 피난을 떠난 사람을 합쳐 거의 1,500만에 육박했다. 또한 독일 내에서도 나치에 의해 강제로 노예노동을 하러 끌려온 폴란드인들이 꽤나 많았다.
  10. 다만 주도인 쾨니히스베르크나 부동항인 필라우 등 알짜배기는 모두 소련이 먹은데다가 소련이 독소전쟁에 대한 보상으로 커즌 선 이동의 폴란드 영토를 요구해서 전쟁 전 폴란드 영토 중 18만 km2에 달하는 영토를 집어삼킨지라...이건 거의 개평 수준. 뭐 폴란드도 오데르-나이세 선 이동의 독일 영토를 합병하면서 소련에게 잃은 영토 손실을 벌충하긴 했다.
  11. 물론 당시 폴란드가 소련에 뺏긴 땅을 그대로 인정하고 싶어한 건 당연히 아니지만, 소련은 결코 땅을 돌려줄 생각도 없었고 폴란드가 저항할 수도 없었다.
  12. 정작 아이러니한 것은 독일인들은 전후 추방과정에서 폴란드 인들의 학대로 인해 수십만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며 폴란드인들에게 이를 갈았다.
  13. 특히나 영국의 경우 공산주의 국가로 거듭난 폴란드에게 너무 많은 영토를 떼준 것을 후회하는 목소리가 보수당 내부에서 컸다.
  14. 아예 서독의 건국후 한동안은 공산주의 국가와는 수교조차 하지 않았다. 할슈타인 원칙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