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마라지바

1 개요

힌디어 : कुमारजीव
영어 : Kumārajīva[1]
한자 : 鳩摩羅什[2]

"번역은 이미 한 번 씹은 밥을 다시 뱉어서 다른 사람에게 먹이는 것과 같다. 원래의 맛을 잃어버릴 뿐 아니라, 구역질까지 느끼게 한다."
"천축(天竺)의 풍습은 문채(文彩)를 몹시 사랑하여 그 찬불가는 지극히 아름답다. 지금 이것을 한문으로 옮겨 번역하면 그 뜻만 얻을 수 있을 뿐 그 말까지 전할 수는 없다."[3]
"내가 번역한 불경에 조금의 틀린 점이 없다면 내가 죽은 뒤 내 만은 타지 않고 남을 것이다."[4]

현장과 더불어 불경 번역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불교계의 거물.[5]
번역계의 대선배

쿠차 왕국[6] 출신의 승려. 생몰연대는 344년 - 413년[7]

생전에 300권에 달하는 불경을 번역하였으며 그가 번역한 불경은 동아시아에서 손꼽히는 발자취를 남겼다. 4대 역경가의 한 사람으로써, 현장이 천축에서 산스크리트어 원전을 갖고 와서 번역한 불경이 퍼지게 된 뒤에도 쿠마라지바의 불경은 구역(舊譯)으로 불리며(현장이 번역한 불경은 신역(新譯)) 오늘날까지 손꼽히는 한역 불경의 고전으로 꼽히고 있다.

2 생애

아버지 쿠마라야나는 인도 카슈미르 태생의 명문 귀족 출신이었고, 어머니 지바는 쿠차 왕국의 공주였다. 356년에 어머니를 따라 출가해, 원시 경전이나 아비달마 불교를 배우며 자랐고, 369년에 대승불교로 전향, 불경 공부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384년에 중국 전진(前秦)의 장군 여광이 쿠차로 쳐들어왔을 때 쿠차국 왕이 살해되고, 여광의 포로가 된 쿠마라지바는 이후 18년 간 양주(涼州)에서 여광의 포로 생활을 해야 했다. 이후 여광은 양주에서 후량(後凉)을 세웠다.

여광은 쿠마라지바를 잡아놓고 온갖 수모를 주었는데, 그를 달리는 말 위에서 떨어지게 하기도 하고, 쿠차 왕녀(즉 쿠마라지바의 사촌여동생)를 강제로 쿠마라지바의 방에 밀어넣어 "동침하지 않으면 여자를 죽이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결국 이때 쿠마라지바는 계율을 어기고 만다.

401년에 후진(後秦)의 요흥(姚興)이 그를 맞이해 장안으로 옮기고, 402년부터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을 한역했다고 한다. 흔히 알려진 불교 용어 극락(極樂)이나 지옥(地獄),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말들이 모두 그가 번역한 것.

쿠마라지바의 번역 불경은 그때까지와 다른 엄격한 규칙을 갖고 번역한 것으로 그 정확성이나 번역 수준이 그전까지의 불경에 비해 상당히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번역 스타일은 현장과 비교하면 의역직역으로 설명되는데(현장은 직역, 쿠마라지바는 의역) 원전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아미타경 같은 경우는 공명지조(共命之鳥)[8] 같은 원전에 없는 내용을 추가시켰다.

쿠마라지바는 죽기 전에 "내가 번역한 불경에 조금의 틀린 점이 없다면 내가 죽은 뒤 내 만은 타지 않고 남을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실제로 그를 화장하고 나서 보니 그의 혀는 온전히 남아 있었다고.오오 쿠마라지바 오오 [9] 도올 김용옥 또한 자신의 강의 '인도를 말하다' 제20강에서 쿠마라지바의 번역에 현장보다 높은 점수를 주었다(김용옥은 번역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입장이다).

쿠마라지바, 현장 번역이 있는데, 오늘 현장의 번역이 중국입장에서 했으니 벌써 260년 후에 나온 것이니 더 좋을 것 같잖아요. 그런데 훨씬 쿠마라지바가 아름다운 번역이에요. 현장은 훨씬 인도식 스타일이에요. 인도에 충실하게 번역한 거에요. (현장의 번역 : 직역 스타일 쿠마라지바의 번역 : 의역 스타일) 직역이고 음사도 너무 심하게 하고, 그래서 중국인의 감정의 흐름을 봐도, 현장의 번역이 쿠마라지바의 번역에 비해 떨어진다는 거에요. 그러니 쿠마라지바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요.해당 강의록 전문이 뒷부분의 깨알 같은 역사 왜곡 및 자기 번역서 홍보

또한 쿠마라지바의 불경 번역이 중요한 점은 그의 불경 번역으로 불교계의 폐단으로 지목되었던 격의불교를 벗어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때까지의 중국, 한국 등에서 불교는 기존의 토착 종교(중국의 경우는 주로 도교)와 습합되어 설명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10] 이러한 격의불교는 포교에 유용하기는 했지만 포교 과정에서 불교 본래의 가르침이 왜곡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쿠마라지바가 불경을 번역하고 나서부터는 이러한 경향이 다소 완화되었다는 것.

또한 알게 모르게 한국사에서도 영향을 상당히 많이 남긴 사람이다. 고구려의 승려 승랑이 배운 것으로 알려진 삼론종은 쿠마라지바가 번역한 불경을 소의경전[11]으로 하는 불교 종파이기 때문. 한국문학사에서도 한 다리 걸치고 있는데 조선 후기의 문인 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쿠마라지바가 불경 번역에 대해 남긴 말(위의 쿠마라지바의 발언 가운데 밑에 있는 것)을 인용해, 한글로 쓰여진 정철관동별곡사미인곡, 속미인곡 같은 작품을 굳이 중국식 칠언고시로 번역하려 하는 것을 "앵무새가 사람 말을 따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부질없는 짓"이라 비판하고, 민간에서 부르는 노래(즉 한자로 표기하지 않은 순수 한국어)가 소위 배우신 분들학자나 사대부가 말하는 시문(詩文)보다 형식이 저속할지는 모르지만 표현의 진솔함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들이 감히 따라올 수도 없다고 적고 있다. 김만중의 이 비평은 한문이 아닌 국문(한국어)으로 제작된 시문학의 가치를 긍정하는 것으로 한국문학사에서 높게 평가받는다.

3 기타

쿠마라지바와 관련된 다큐멘터리KBS에서 방영되었다. 동으로 간 푸른 눈의 승려

현장반야심경 번역본이 유명한 것처럼 쿠마라지바의 금강경 번역본이 널리 사용된다.
  1. 산스크리트어로는 '꾸마라지와'로 들린다. 본 항목의 제목 '쿠마라지바'는 영어 발음을 따른 것.
  2. 마지막 글자를 습 또는 집으로 읽는데 이에 따라 구마라습 또는 구마라집이 되기도 한다.
  3. 김만중의 서포만필에 인용되어 나오는 쿠마라지바의 발언이다.
  4. 양고승전에 실린 쿠마라지바의 전기에서. 해당 전기는 현재 다이쇼 신수대장경에 실려 있다.
  5. 다소 억지스럽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가 번역한 불경이 동아시아에서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표현이다.
  6. 지금의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아커쑤 지구,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 가장자리 무자트 강의 남쪽에 위치해 있었던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국가 가운데 하나.
  7. 또는 350년 - 409년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8. 공명조라고도 하며, 하나의 몸에 두 개의 머리가 서로 붙어 있는데 두 머리가 사이가 안 좋아서 밤낮으로 티격태격 싸우다 결국 한 쪽이 다른 한쪽에게 독을 먹여 죽이지만 애초에 몸을 공유하고 있던 나머지 한쪽 머리도 죽고 만다는 전설. 이렇게 사이 나쁜 새도 행복의 노래를 부르는 곳이 바로 극락이라는 것이 아미타경의 설명이다.
  9. 쿠마라지바 번역의 생명력은 당장 관세음보살 항목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당장 쿠마라지바가 번역한 관세음보살(관음보살)이라는 단어보다 현장이 번역한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는 말이 산스크리트어 원전에 더 가까운 번역이라 할 수 있음에도, 사람들은 쿠마라지바가 번역한 관세음보살을 더 많이 찾고 더 익숙해하는 편이다.
  10. 당장 공(空)이라는 단어부터가 불교 재래 전까지 중국에서는 주로 도교의 용어였다.
  11. 어떤 종파가 그 종파 교리의 뿌리로 내세우는 경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