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

鄭澈
1536년(중종 30) 12월 18일, 음력 12월 6일 ~ 1594년(선조 26) 2월 7일 음력 1593년 12월 18일

1 소개

조선시대 중기의 정치가. 호는 송강(松江). 본관은 연일(영일). 요즘에야 문인으로 더 자주 언급되지만 선조 중기 당시엔 정적에게 일절 자비가 없는 정치인으로 더 유명했다.죽어서는 후세의 수험생들에게 일절 자비가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사 작품 3개인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은 현존 중인 당대의 흔치 않은 언문 고전문학 작품에 속한다.[1] 이 세 작품은 현대 고등학생들의 교과서에 적어도 1가지 이상 항상 실리고 있으며 따라서 수험 공부에 필수적이며 거의 모든 학생들이 정철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정철은 수험생의 원수 셰익스피어가 독음달린 기미독립선언서 급이라면, 정철은 베오울프 원어판 급으로 자비가 없다.

2 파란만장한 일생

권력의 중심부에 있던 집안에서 태어났고 그의 누나인종의 후궁이었을 정도로 권력과 친밀한 집안이었다.[2] 그러나 아버지 대부터 가문이 기운 후[3] 그의 벼슬살이는 선조와 파벌들의 당쟁에 휘말려 계속해서 유배와 복직을 되풀이하는 파란만장한 인생이었으며 그런 와중에서도 권력에 대한 무서운 집착을 보여 정여립의 난(1589년)에서[4] 수사책임자로 활약한 것이 컸다고 볼 수 있겠다. 이 때문에 정철은 동인계의 인물들에겐 천하의 개쌍놈 급의 악독한 인간으로 평가되었다.

심지어 동인의 주요인물로 정여립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붙잡혀 죽은 전라남도 함평 출신의 동인측 인사 이발의 후손들은 지금도 이발의 제사를 지낼 때 고기를 다지면서 "정철, 정철!" 이라 외칠 정도. 지금도 함평 등지에 가면 이발의 기일에 이 주문(?)을 들어볼 수 있다[5]. 하지만 이발은 동인의 강경파로 서인인 심의겸, 박순, 송익필, 이항복 등을 탄핵하며 서인들의 어그로를 잔뜩 끌었었다.

당시 일으킨 기축옥사에 의해 정여립은 물론 그와 관계한 호남의 유지들, 그리고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동인의 피해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수백명이 죽고 수백명이 유배갔다고 엄연히 선조수정실록에 명기되어있다.[6] 심지어 선조수정실록은 서인들이 정권을 잡고 있을때 만들어졌으니 실제로는 더 많은 수가 희생되었을수도 있다. 호남의 최고 명문가 중 하나였던 이발 형제들은 곤장을 맞다 참혹하게 죽었고 그의 어린 아들과 80이 넘은 노모 윤씨도 곤장을 맞다 죽었다. 이발과 친분이 두텁던 진주의 선비 최영경도 정여립의 두령(!) 길삼봉이라는 누명을 쓰고 희생당했다. 정승까지 하고 있던 정언신은 사건 직후 "이게 다 이이의 제자들 때문이다!"라고 정여립을 옹호하다가 정여립의 역모가 기정사실화되자 버로우했고 정여립과 편지를 19장이나 주고받은 사실이 들켜[7] 작살났다.[8]

여담으로, 을사사화(1545년)로 집안이 풍비박산 났던 청년 정철은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담양에 내려오게 되는데, 이때 김윤제[9]의 도움으로 공부도 하고 그의 외손녀와 혼인도 하면서, 출생은 서울 태생이지만 사실상 호남 출신이나 다름없었다[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철은 정여립의 난을 다루면서 자신의 사적인 원한으로[11] 관계된 인사들을 처벌[12]하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고향이라 아는 사람이 많았기에 엮어넣기는 쉬웠고[13] 심지어 전라도 유생 정암수를 사주해 이산해마저 엮어넣으려 했으나 실패한다.[14]

이게 결코 그냥 가볍게 넘길만한 사실이 아닌 것이 이 사건과 연루되어 까딱하면 이순신[15]을 비롯해 서산대사, 사명대사 같은 인물들까지 줄줄이 엮여 처형될 뻔했다. 만약 그것이 현실로 일어났다면 조선의 앞날은...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정철이 권력을 잡기 위해 체제비판적 성향인 호남의 유력인사 정여립이 모반을 꾸몄다고 조작하여 사건을 일으킨 게 아닌가라고 보고 있는데 이는 실제로 조선조 동인들의 시각이기도 했다. 당시 정철이 전라도로 사람을 보내 정여립이 모반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냈다는 식의 명백한 기록 또한 남아있다. 하지만 정철의 혁혁한 기여 덕에(?) 전라도에는 '반역향' 이라는 낙인이 따라붙는다는 건 완벽한 오해로 정여립 사건으로 몰살당한 건 이발을 위시한 호남 동인 강경 인사들 뿐 사건을 부추기고 확대시킨 것 역시 정철을 위시한 같은 호남의 선비들이었다. 이 사건으로 호남엔 동인 세력의 씨가 말렸고 이후로 호남에는 서인 세력이 득세하게 된다. 서인의 기호지방(경기, 충청) 양반만큼은 아니지만 호남의 서인 양반들도 서인 세력의 한 축을 담당할 정도 득세한다.

후술하듯이 정철이 이 모든 일에 주도적으로 나서긴 했지만 결국 최종적 지휘자는 선조였다.

권력의 중심에 다시 오른 정철은 세자책봉 문제에서 결정적인 판단착오를 하고 만다. 후사 논의를 조심스러워하는 선조의 의중을 모르고 서둘러 광해군으로 세자 책봉을 해야 마땅하다는 읍소를 올린 것(송강연보의 기록). 당시 선조는 인빈 김씨의 아들인 신성군을 세자로 마음에 두고 있었으며 신료들의 입장에서는 빨리 후사를 명확히 해두지 않으면 불상사가 일어날 소지가 있었다 이에 동인의 대표인 이산해와 서인의 대표인 정철이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철과 원한이 있었던 동인 측이 도중에 빠지는 바람에 정철만 혼자 나서는 모양새가 되어 정치 생명에서 가장 큰 위기에 직면한다. 이산해는 아예 나서질 않고 류성룡은 나섰어도 입을 다물어버렸는데 정철만 홀로 후계 책봉의 정당성을 열을 내며 주장했던 것이다.

정여립 모함 사건 당시 큰 피해를 입었던 동인은 정철에게 카운터로 '신성군 목숨이 오락가락' 드립을 날린다. 물론 이전의 정여립 모반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사실 그 자체에 주안점을 두기보단 애초에 정계의 밉상인 정철을 탄핵시키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선조는 이 절호의 찬스를 적극 활용, 세자책봉 논의 자체를 막는 한편 정여립 모반사건 이후 지나치게 입지가 커진 서인 세력을 손보기 위해서 모르는 척 받아들인다. 이것 역시 정여립 모반사건 때와 완전히 동일한 수순.

정철을 밟아버리기로 결심을 굳힌 선조는 정여립의 난에서 정여립의 수괴 길삼봉으로 누명을 쓰고 죽은 남명 조식의 제자 최영경의 죽음을 애도하며 정철을 비난했다. 선조는 이 구실로 정철을 지근지근 밟아버렸는데 실록에는 조회에서 정철을 가리켜 "간철(간사한 정철), 흉철(흉악한 정철), 독철(독한 정철)" 이라고 대놓고 깠을 정도였다[16]. 또한 윤근수는 삭탈관직, 양천경, 양천회 등 최영경 등을 무고한 자들도 국문을 받다가 죽었다. 웃긴 것은 양천회, 양천경 등의 무고를 보고 선조는 처음엔 이런 상소를 이렇게 늦게 올리다니! 라고 한탄할 정도로 띄워줬다는 것이다. 정철이 얼마나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했으면 이런 선조의 후장을 끝까지 핥았을까. 선조도 최후의 양심인진 몰라도 역모 조작자로 몰릴 수도 있는 정철에게 추가적인 죄를 내리진 않았다.[17]

이는 결국 정여립의 난의 참혹한 옥사의 배후에는 선조가 있었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지나치게 세력이 커진 동인을 정철을 내세워서 제거한 다음 그 죄는 모두 정철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었다. 후일 기축옥사의 고변자들이었던 양천회 형제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정철이 건저 사건으로 몰락한 이후에 잡혀와서 정철의 사주를 받아 그랬다고 자복하곤 곤장을 맞다 죽었는데 정작 정철에겐 죄가 더해지지 않았다. 정철은 그냥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반증이다.

정여립의 난이 과연 정말로 모반 사건이었는지 아니면 (주체가 누구던 간에) 조작된 정치적 사건인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연루되어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면모를 볼 때 조작된 사건 쪽에 좀 더 무게가 실린다. 그러나 기축옥사의 공초가 임진왜란을 거치며 불 타 없어져 버렸고, 그 때문에 더 자세한 연구가 어렵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리고 기존의 서인 주도론은 별로 설득력이 없는 것이 노인과 아이를 법에 따라 고문할 수 없다는 서인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발 가문을 개발살내고 아이와 노인까지 고문해서 죽인 장본인이 선조고 최영경도 정철이 풀어주자고 한 것을 선조가 거부했다.[18] 정언신의 경우, 선조는 처형시키려 했으나 정철이 재상을 함부로 죽여선 안된다고 말려서 유배로 감형한다. 후일 정철을 팽해버린 과정을 볼때 강경파 정철을 희생양으로 삼고 조정의 절대다수였던 동인의 세력을 축소하기 위해 선조가 술수를 부린 것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당시 동인이 정철의 처리를 놓고 갈등하던 것은 이산해의 강경파이자 광해군의 지지기반인 북인, 류성룡의 온건파인 남인으로 갈라지는 한 계기가 되었다. 북인의 인맥은 조식의 근거지였던 지리산 일대(호남+영남 서부)였고 남인의 인맥은 그보다 동쪽인 경상도 일대였는데 정철이 주도한 기축옥사가 호남 동인 인사들의 씨를 말렸던 만큼 크게 피해를 보았고 심하게 당한 북인이 정철을 더 괘씸하게 여겼음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을 간 사람들도 풀어주어 활용하기 위한 결정들에 의해 복직되었지만 임진왜란 중 선조를 수발하는 과정에서도 니나노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막장짓을 많이 저지르는 바람에 또 미움을 샀다(...) 결국 얼마 안 가 과거 탄압했던 동인 세력에 의해 파직당한 후 낙향하여 끝내 재기하지 못하고 죽었다.

3 인간성

기록에 따르면 한마디로 막장. 매우 아집이 강하고 속이 좁아 주변에 사람들이 다가서지 않는 괴팍한 성격이었다. 이렇듯 대인관계가 개판이었던 그에게도 온건한 관계를 유지했던 대인배가 더러 있는데 하나는 율곡 이이[19][20], 또 하나는 서애 류성룡. 특히 류성룡은 당파가 남인이었는데도 정철과 무난한 관계였으니 류성룡이야말로 진정한 대인배일지도.[21] 그 외에 노선이 일치하여 친밀했던 인물로는 같이 서인을 이끌어갔으며 정철과 마찬가지로 과격하게 정적들을 제거해 욕을 먹은 성혼도 존재한다.[22]

한때 정철의 부관이자 지금은 의병장으로 유명한 중봉 조헌 역시 특기할 만한데 조헌은 그 성깔 더럽기로 악명 높은 정철이 자신의 상관으로 부임하자 사퇴를 청원했으나 정철은 "그럼 잠깐만이라도 같이 일해보고 그래도 싫으면 가라"며 조헌의 스승인 이이를 통해 극구 말린다. 결국 그렇게 시작된 이후 둘은 나름대로 원만한 관계가 되는데 그 이유는 조헌 또한 기축옥사 당시 앞장서서 정여립의 측근들과 동인 상당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과격파였기 때문. 이렇게나 정치적 노선이 비슷한데 으르렁댔다니 이건 아무래도 일종의 동족혐오인 듯 싶다. 또한 서인으로 정여립을 혐오해 정여립을 중용하면 사림 전체의 수치가 될 것이라고 말한 이경중하고도 사이가 안좋았다. 심지어 이경중은 병사할 정도.

참고로 선조실록에서는 그를 아래와 같이 평가하고 있다.

정철은 성품이 편협하고 말이 망령되고 행동이 경망하고 농담과 해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원망을 자초(自招)하였다. 최영경(崔永慶)이 옥에 갇혀있을 적에 그가 영경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나라 사람이 다같이 아는 바이고 그가 이미 국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도 모두 정철과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런데 마침내 죽게 만들었으니 남의 손을 빌려 했다는 말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

선조실록이 쓰일 당시는 정철이 이미 몰락한 시점임을 염두해야겠지만 정철이 선조에게 그토록 충성을 바친 결과가 이 모양임을 생각하면 안습하기도 하다.

하지만 선조실록은 철저하게 동인, 그것도 강경파인 북인의 시각에서 쓰였으며 심지어 평생 동서인의 화합에 힘썼던 율곡 이이마저도 매우 심하게 매도하고 있다는 점은 고려해야 한다. 참고로 정철에 대한 (서인의 시각에서 쓰인) 선조수정실록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23]

(전략) 선조 초년에 전랑(銓郞)으로 기용되었는데 오로지 격탁 양청(激濁揚淸)만을 힘썼으므로 명망은 높았으나 그를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많았다. (중략) 정철의 재주로서 조금만 비위를 맞추었더라면 어찌 낭패를 당하여 곤고하게 되어 종신토록 굶주린 신세가 되기까지야 했겠는가. 그런데도 그는 한 번도 기꺼이 굽히려 하지 않았다. 이는 바로 그가 부회(附會)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소인이 과연 그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그는 단지 결백성이 지나쳐 의심이 많고 용서하는 마음이 적어 일을 처리해 나가는 지혜가 없었으니 이것이 그의 평생 단점이었다. (중략) 편벽된 의논을 극력 고집하면서 믿는 것은 척리(戚里)의 진부한 사람이었고 왕명을 받아 역옥(逆獄)을 다스릴 때 당색(黨色)의 원수를 많이 체포하였으니 그가 한 세상의 공격 대상이 된 것은 족히 괴이할 게 없다. 그의 처신은 정말 지혜롭지 못했다 하겠다.

선조는 정철에 대해서 총애할 때는 한 마리의 매와 같은 사람이라고 칭찬했지만 그가 죽은 다음에 한 뭉치 독기로 사람을 해쳤다고 평가했다.

4 평가

뛰어난 문인, 무능한 정치가, 탐관오리형 지방관료

수험생, 고시생의 영원한 주적. 괜한 빠심때문에 주적이 되신 분 그런데 그 빠심 대상이... 내가 강원도에 놀러갔던 건 너희들을 괴롭히기 위함이었다

서인의 당수를 지내며 정여립 일파와 정적인 동인에 대해 피비린내나는 잔혹한 탄압과 견제를 가하고 이후 서인의 분열에도 한몫을 한 사람, 정치적인 업적은 별로 없지만 정치사에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기묘한 위치에 있다. 또한 성격이 극단적이고 독선적이며 알콜 중독자이기까지 했다. 실제로 그가 틈만 나면 탄핵당한 이유는 정적의 모함 이상으로 그가 민심을 못 샀기 때문이다.

당대 사대부들의 유학적 세계관 상 상소나 조정회의에서 신나게 왕을 까는 것과는 별개로(...) 사대부들은 왕을 찬미하는 시나 문학을 짓는 경우가 많았다. 정철은 뛰어난 글솜씨를 가지고 시를 지을 때 화려한 미사어구와 여러 수사들을 말 그대로 도배한 가사를 다수 남겼는데, 우리 역사에 남아있는 문학 자표가 희소하다 보니 아이러니컬하게도 이것이 문학적으로 평가를 받아 후세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그렇다고 정철이 임금에게 아첨만 해 댄 간신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명종 21년(1566)의 기록을 보면 종친인 경양군이 처가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서얼 처남을 꾀어 죽인 뒤 강물에 던져버린 사건이 있었다. 당시 국왕 명종은 자신의 종형이 관여된 일이므로 정철을 설득시켜 조용히 넘어가려 했으나 정철이 명종의 요청을 거부하고 만다. 이로 인해 명종의 눈 밖에 나서 파면되고 한직을 전전당하게 되기도 하였고, 선조에게도 "아무리 청천병력과 같은 진노가 계시더라도 신의 말씀은 다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해 분노한 선조에 의해 삭탈관직당한 적 또한 있다. (참고) 또한 서인 쪽의 변호에 따르면 정철이 자기 관리를 못해 망가진 것은 사실이나 간적이라 할 정도로 무슨 세도를 부릴 위상은 아니었다고 한다.[24]

4.1 민간의 평가

정치인으로서의 악명은 민담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강원도 지역에 전해내려오는 정철 관련 설화들에선 성질이 고약하고 사소한 것에 트집을 잘 잡는 쪼잔한 인간으로 나온다. 예를 들면 어느 마을에 갔더니 주민들이 바위를 섬기니까 바위를 쪼개버렸다는 둥의 이야기가 있는데 왠지 강원도 관찰사 시절 강원도 백성들한테 이미지가 좋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정철 같은 놈' 은 한동안 탐관오리를 상징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다른 평가도 있기는 한데, 징비록에는 선조가 왜란발발 후 몽진을 갈때 길가의 백성이 "정철 정승을 불러 쓰시오소서." 해서 정철을 복직시켰다는 얘기가 있다. 이는 실은 개성의 유생들이 선조가 사람을 천거케하자 정철을 청한것으로 당시 개성은 유생들의 절반이 우계와 율곡의 제자였다고 전해질정도로 기호학파의 세가 강한 곳이었다. 정철이 성혼과 이이의 친구이자 동반자였으니 이 사건은 이를테면 '동인들 때문에 나라꼴이 이렇게 됐잖음 우리 사숙어른 복귀좀요 징징' 정도의 사건으로 이해 가능하다.

4.2 알콜중독

개인적으로는 엄청난 주당으로 폭음에 따른 주사를 부려 낭패를 본 일도 많았다고 한다. 작품 중에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세어가며 무진무진 먹세 그려" 라는 장진주사도 있을 정도로 술을 매우 좋아했다고. 왕인 선조가 정철의 애주에 감탄(?)해 하사한 술잔 역시 지금까지 남아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선조가 '그대가 술을 좋아하나 너무 과함이 걱정되니 앞으로 이 잔으로 하루에 한 번만 마시라=술 좀 작작 먹어라 라는 의미로 하사한 은잔을 이 작자가 한 방울이라도 더 먹겠다는 집념으로 망치로 두드려 펴서 사발로 만들어 마셨다나(...) 이 때문에 윤승운 화백의 맹꽁이 서당에 나온 손순효의 일화와 혼동하는 이들도 많다.[25] 아무튼 정철과 친분이 있던 류성룡조차도 정철의 술버릇에 대해 "정송강은 술에 취해있느라 정사를 돌보지 않는다" 고 깠을 정도.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1592년 7월 25일자 선조실록 기록이다.

밤 이경에 급보가 평양으로부터 왔다. 임금께서 여러 대신을 빈청으로 불러서 회의하였는데 영중추부사 정철은 술에 취하여 오지 않았다.

기록의 날짜를 보자. 그렇다. 1592년 7월 25일로 임진왜란 와중이다! 게다가 의주까지 몽진을 온 상태로 조승훈의 명군이 평양성에서 패전했다는 급보가 왔는데도 저러고 있었다.

4.3 문학적 평가

임금 후빨러
후세에 남긴 대표작으로는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26]이 있다. 그러나 관동별곡은 제7차 교육과정의 국정교과서 시절 고1 국어과정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고등학생들을 괴롭혔다. 교사들이 얼마든지 이것을 꼬아서 기출문제로 낼 정도.

얼핏 보면 사모하는 님 으로 교묘하게 포장되어 있어 마치 그리운 연인을 묘사하는 게 아닌가 싶지만 국어시간에 졸지 않은 학생들이면 다들 알다시피 이게 전부 당시 선조에 대한 묘사다. 실제 교육과정에서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절대자'로 표현하고 있는 중.

예시로 다음은 사미인곡의 일부이다.

하루도 열두 때, 한 달도 서른 날,

잠시라도 임 생각을 말아 가지고 이 시름을 잊으려 하여도
마음 속에 맺혀 있어 골수까지 사무쳤으니,
편작과 같은 명의(名醫)가 열 명이 오더라도 이 병을 어떻게 하랴.
아아, 내 병이야 이 임의 탓이로다.
차라리 죽어서 범나비 되오리라
꽃나무 가지마다 간 데 족족 앉았다가
향 묻힌 날개로 님의 옷에 옮으리라
님이야 나인 줄 모르셔도 내 님 좇으려 하노라.

다시 말하지만 이거 왕한테 쓴 시다. [27]

아마 고등학생 시기를 경험한 사람들 중에는 정철을 떠올릴 때 국사 과목에 묘사되는 선조서인을 대표한 권력 투쟁의 화신이라는 기억보다는 국어 과목을 통해 대학수학능력시험/국어 영역에서 외계어에 가까운 문장으로 한층 더 골머리를 앓게 만드는 악독한 이미지로 각인된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다행히(?) 이과생은 원문에 있는 고어를 그대로 출제하는 문과의 국어 B형과 달리 이과생이 보는 국어 A형에서는 모조리 현대어로 번역이 되어 나오기 때문에 외계어를 읽고 내용을 유추하는 불편함은 사라졌으나 현대시와 마찬가지로 상황을 찾고 정서와 태도를 찾아야 하는 문제가 늘어났다(...) 하지만 2014년 수능완성 국어 A형에서도 정철의 시가 고어체로 나온다!!!

이건 정철의 시가 중학교 교과서와 고1 교과서에도 나오기 때문인데, 책 만드는 인간들이 '니들 어차피 중학교 고등학교 공통과정으로 다 배웠잖아? 그러니까 A형도 고어체로 내도 문제 없지?' 라고 생각하고 책을 만들었다 카더라.

학교대사전에서는 수험생을 괴롭히는 사천왕으로 꼽기도 했다. 그가 쓴 시가의 극악한 난이도와 오글거림으로 인해 문이과 상관없이 학생들을 괴롭히는 존재. 실제 7차 교육과정[28] 시절 고1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관동별곡' 은 그 중에서도 백미로 꼽히며 개정 8차 교육과정 고 1 국어 교과서에서도 16종 중 8종에 관동별곡이 수록되어 있다.

선조에게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건의했다가 강계로 유배되었을 때 만난 진옥이라는 기생과 나눈 화답시조가 있다. 꽤나 로맨틱하면서도 야한 시조다. 두번째 항목.

그리고 2016년 수능 국어 B형에서 또 다시 어와 동량재야 로 시작하는 정철의 시조가 나와 뭇 수험생들의 화딱지를 돋우어 놓았다. 2016년 3월 전국연합학력평가에 성산별곡이 출제되어 비문학에서 고생했던 고3 학생들의 멘탈을 한 번 더 후려갈겼다.

5 대중매체에서의 정철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에서는 오승룡이 담당하였다. 자기 고집을 밀어붙이는 성격으로 나오지만 머리는 좀 안돌아가게 묘사된다. 덕분에 이산해와 유성룡이 세자책봉문제에 소극적인데도 이들을 자기 멋대로 동의시키고 선조에게 세자책봉을 건의했다 제대로 당한다.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선동혁이 열연하였다. 성혼과 함께 서인 강경파로 나오며 건저문제로 잠깐 퇴장했다가 임란이 일어나자 복귀. 이후 선조의 행각에 질린 다른 대신들과 마찬가지로 선조에게 정나미가 떨어진듯. 이제는 오히려 선조보다는 광해군을 지지하고 있다.
경략 송응창과 제독 이여송이 일본과의 강화[29]를 핑계로 공격을 멈추자, 만력제를 알현하여 적극적으로 진격할 것을 요청하기 위해 사신으로 파견됐다. 하지만 석성 역시 핑계를 대며 거절하자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왔고, 대간들은 그를 탄핵하였다. 결국 선조가 마지못해 그를 삭탈관직시킨다. 돌아왔을 때는 건강이 악화되어 죽음을 앞둔 상태[30]였기 때문이 선조가 나름 배려를 해준 셈. 이후 윤두수를 만나 훈민가 16수를 읊고 나레이션과 함께 쓸쓸히 퇴장하는 모습이 나온다.

삼국지 11의 유즈맵 아이돌 대전에서는 드라마 상에서의 정철 캐릭터가 군주로 등장한다. 지바냥, 후도 유세이, 키라 츠바사, 시마다 마유와 함께 최약의 4대 진영 중 하나로 휘하에는 귀문 특기를 가진 송익필 뿐이다. 귀문이 사기 특기이긴한데 소모되는 기력이 너무 많아서 백출 특기를 가진 무장이 없으면 있으나마나하는 기술인데다 바로 인접한 선조랑 만력제가 동맹 관계라 둘이 같이 쳐들어온다면 디펜스만 하다가 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패치로 선조랑 서로 시작위치를 바꿔 계양으로 옮겼지만 어려운건 여전하다. 그래도 유세이보단 잘 버티는 편이다. 대개 시나리오에서 가장 먼저 망하는게 유세이라서...

  1. 구운몽의 저자인 조선시대의 문인 김만중은 이 세 작품을 좌해진문장(우리나라의 참된 문장)이라며 극찬하였다.
  2. 정철의 누나는 불타는 세자궁에서 인종을 구해낸 일이 있었다고 한다.
  3. 을사사화로 계림군이 죽게 되었는데 그의 가문은 계림군과도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
  4. 혹은 기축옥사
  5. 실제로 이 소리를 들어보면 외친다기보다는 고기를 다지면서 중얼대는 식이다. "정철정철정철정철..." 대충 이런 식. 여기다 특유의 전라도 억양까지 가미되어 실제 발음은 "증철증철증철..." or "증철이 조사라(전남 방언 '조수다(다지다)' 의 명령형. 즉, '다져라') 증철이 조사라..." 혹은 성을 떼고 "철철철..." 이라고 한다는 일화도 있다.
  6. 《선조수정실록》 25권, 24년 5월 1일
  7. 본디 선전관이었던 이응표가 그와 친해서 정여립의 집에 들어가서 정언신의 이름이 적힌 편지를 없앴는데 하필 문인들이 당시 멋을 부려서 이름 대신에 다른걸 집어넣기도 했는데 이응표가 무신이라 그걸 몰라 그 19편은 없애지 못했는데 이응표가 다 없앴다는 말을 믿은 정언신은 부인했다.
  8. 그나마 선조가 사사를 명하나 정철이 재상을 죽인 전례가 없다며 반대하여 유배로 감형됐다.
  9. 충장공 김덕령의 작은 할아버지.
  10. 하지만 당시는 출신지와 당파는 관계가 없었다.
  11. 정개청을 역모에 엮은 이유는 정여립의 집터를 봐줬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정철이 젊었을 적에 훈계한 것에 대한 앙갚음이 크게 작용했다고 전해진다. 그 내용은 정철처럼 술마시고 노는걸 어린애들이 보고 배운다'라고 말한것에 앙심을 품었기 때문이라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건 정개청의 제자들의 주장이고 사실 그보다는 정개청도 정여립같은 철새였기 때문이다. 원래 정개청은 서인의 영수인 박순이 거두어서 가르치고 키운 인물인데 박순이 실각한 이후에 그를 배신하고 동인들과 어울렸고, 박순과 친했던 정철은 그를 비루한 자라고 여겨 가혹하게 고문하여 죽게 만든다.
  12. 역모는 삼족을 멸하는 것이 원칙이나 이 원칙이 그대로 적용된 예가 거의 없다는 걸 생각해보면 단순히 편지를 주고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1,000여 명 이상을 희생시켰다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13. 선조가 이 점을 고려해서 정철에게 사건 처리를 맡겼다는 시각도 있다.
  14. 선조는 이산해, 유성룡, 정인홍 등 동인 수장격 인물들을 탄핵한 상소는 아주 강하게 거부하며 상소한 자를 깠는데 특히 조헌의 상소에는 그를 간귀라 부르기까지 한다.
  15. 이순신은 류성룡과는 지기이기 때문에 넘어갔을 수도 있다. 사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이순신은 당파는커녕 중앙 정쟁과는 관계없는 무관에 기축옥사 당시는 임란대비를 위해 초고속 승진을 하던 시기라 숙청되었을 가능성은 낮다.
  16. 이때 같이 까인 인물이 정철과 함께 당시 서인을 이끌었던 성혼이었다. 때문에 간혼독철이라고 같이 붙어서 표현된다.
  17. 어쩌면 또 기축옥사같은 일이 생기면 써먹으려고 남겨놨을 가능성도 있다.
  18. 하지만 후일 동인계열에선 정철이 어차피 선조가 최영경 죽일 것을 알고 일부러 멋부린 것이라고 폄하했다.(...)
  19. 정철도 이이에 대해서는 고마워했는지 이이가 죽자 "나하고 친해봐야 좋은 거 없었을 텐데 율곡 그 친구는 30년간 관대히 대해주었다. 내 안 좋은 성격 때문에 골치 꽤 앓았으니 절교할 만도 했을 텐데..." 라고 추모하기도 했다.
  20. 사실 이이는 정철을 지조 있는 선비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사실 율곡이 정철을 좋아할 수 밖에 없는게 그 당시에 고독했던 율곡의 가치를 인정해주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자신과 같은 서인 계열에 속한 백인걸, 박순, 성혼, 정철 정도였다 실제로 정철은 귀양을 가면서도 이이를 걱정하기도 했다.
  21. 아무리 남인이 온건파라지만 정철이 남북을 망라한 범동인에게 무슨 짓을 했다고 인식됐는지 생각해보면... 남인 내부에서도 정철과 관계를 끊지 않는 류성룡을 원망하는 목소리가 높았고 북인은 아예 대놓고 류성룡을 깔보고 씹어댔다.
  22. '쟤 너머 성권농 집에 술익었다는 말 어제 듣고' 로 시작하는 정철의 시조에 등장하는 성권농이 바로 당시 권농관의 직책에 있었던 성혼이다.
  23. 선조수정실록은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이 편찬해서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건 대표적인 오해이다. 애시당초 선조실록 자체가 권신 이이첨의 주도로 편찬되어 북인 쪽 인물만 극찬하고 (죽어서 서인의 영수가 된) 율곡 이이와 (남인이었던) 서애 유성룡을 소인배로 묘사하는 등(이이의 경우에는 아예 중 출신이라느니 하며 까고있다.) 대단히 편파적이다. 오히려 서인 주도로 편찬된 선조수정실록은 동인 인물들에 대해도 비교적 공정하게 다루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24. 당시에는 이산해, 류성룡 등이 건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보기에도 정철은 그냥 선조에게 놀아난 수준으로 밖에 안 보이고.
  25. 손순효도 애주가라서 이 짓을 했지만 그는 그나마 일은 잘 했다.
  26. 구운몽의 작가로도 알려진 김만중 역시 세곡을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으로 꼽았으며, 그중에서도 속미인곡이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했다.
  27. 구운몽의 저자 김만중이 고평가했던 작품이다. 무려 동방(조선)의 이소라고 평가할 정도. 참고로 이소는 초나라의 현실을 개탄하여 멱라수에 몸을 던졌던 굴원이 쓴 시다.
  28. 학교대사전은 6차에서 7차로 교육과정이 개편되기 시작한 시기에 쓰였다.
  29. 정확히 말하자면 고니시 유키나가심유경이 벌인 국제 사기극으로 맺어진 강화.
  30. 실제로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1년이 지난 1593년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