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1 現場

어떤 사물이 위치하거나 일이 일어나는 자리. 사무가 벌어지는 데스크의 반댓말로 쓰이기도 한다.

2 중국의 승려

현장(玄奘)
중국 당나라승려. 생몰년도 A.D 602? ~ 664. 속명은 진위(陳褘). 하남성(河南省=허난 성) 낙양(洛陽=뤄양) 동쪽에 있는 구씨현(緱氏縣거우스현) 출생. 고전소설서유기》의 '삼장법사'의 모티브가 된 인물. 삼장(三藏)이란 명칭은 경장(經藏) · 율장(律藏) · 논장(論藏)에 능했기 때문이다. 먼치킨 법상종(法相宗) · 구사종(俱舍宗)의 개조이다.

60년의 생애를 대략 나누면 유년기를 빼고 처음 15년은 수도, 중간 19년은 인도행과 귀국, 마지막 19년은 경전 한역으로 나누어진다.

10세에 낙양의 정토사(淨土寺)에 들어갔으며, 13세에 승적에 올랐다. 장안(長安), 성도(成都=청두)와 그 밖의 중국 중북부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불교 연구에 진력한 뒤, 많은 의문을 풀기 위하여, 또한 불교 경전을 가져오기 위해 627년(일설에는 629년) 국외여행을 금한 나라의 법을 어기고 몰래 인도로 떠났다현장답사. 불교를 믿는 관리들이 몰래 길을 터주었다고 한다. 머리가 똑똑하니 일탈 스케일도 남다르다!!

여행 도중 고창국(高昌國) 왕 국문태(麴文泰)의 대접(630년)을 받았으며, 인도에 도착한 후 나란다 사원에 들어가 계현(戒賢:시라바드라) 밑에서 불교 연구에 힘썼다. 거의 인도 전역을 돌며 수학했으며 당시 카나우지에 도읍하고 있던 하르샤 대왕 등의 우대를 받았기도 하였다. 다만 이때 가지고온 경전이 일부 오는 도중 잃어버려 재수집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1][2]. 국문태에게 받은 극진한 대접에 귀로에서도 들르려고 했으나 이미 당태종이 보낸 소정방에게 멸망(;;)해 뿔뿔히 흩어진 상황이었다고.

641년 많은 경전과 불상을 가지고 귀국길에 올라 힌두쿠시 산맥파미르 고원의 두 험로를 넘어 호탄을 거쳐서 645년 정월에 조정과 민간 모두의 대환영을 받으며 장안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그의 생애와 서역에 대한 중국인들의 상상력, 편견 등이 덧붙여져 '서유기'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당 태종은 공로를 치하하고, 현장에게 환속하여 조정에서 중신으로 활동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현장은 이를 거절하고 단순히 승려로서 살아가기를 원해서 당태종은 이를 받아들였다.이후 당태종(太宗)의 후원을 받아 74부 1,335권의 경전을 한문으로 옮겼다. (전진 때의 구마라습과 함께 양대 한역자로 손꼽혀 구마라습의 한역경을 '구역경', 현장의 한역경을 '신역경'으로 분류한다.) 또한 번역과정에서 이전에 사용되던 용어와는 다른 형태를 사용하는 것도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범어 sattva의 구역인 "중생" 대신에 "유정"이라고 번역하거나 승려를 뜻하는 범어 bikkhu를 "비구" 대신에 "필추"라고 번역한 것 등이 그 예이다. 기존에 번역에서 충분하게 그 의미를 반영하지 못하거나 올바른 음사가 아니라고 판단한 경우 이처럼 독자적으로 용어를 고안하여 사용하였다. 이외에도 인도 여행기인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12권)를 저술하였다.

서유기의 영향도 있고 워낙 유명한 인물이라 서브컬쳐에서 불교와 관련된 소재가 있을경우 어떻게든 연관을 지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근데 이 사람의 실제인생을 보면 웬만한 창작물보다 훨씬 파란만장하다.
  1. 이때문에 한자문화권에서의 인도 불교의 원형 연구가 대단히 어렵다고. 물론 현장만 해도 충분히 엄청난 과업을 해냈지만..
  2. 서유기에도 이 부분을 암시한 에피소드가 있다. 천축 갈 때 강을 건너게 해준 큰 거북이가 있었는데, '부처님을 만나 제 업이 언제 끝날지 물어봐주십쇼'라고 부탁해서 현장 일행이 알았구마 하면서 갔는데 이 부탁을 까먹었다.(...) 불경을 갖고 돌아오던 중에 다시 그 강을 건널때 거북이의 도움을 받았는데, 강 중간에 와서 거북이가 '부처님께 물어보셨나요?'라고 하니 다들 묵묵답답. 열받은 거북이가 제 몸을 뒤집으며 난동을 부린 덕분에 불경의 일부가 강물에 떠내려가고, 또 일부가 훼손되었다고 한다. 나머지는 강가에 말렸다가 당나라로 들고 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