紀伊国屋文左衛門
1 생애
1669(寛文9)년~1734(享保19)년 추정. 출생지는 제설이 분분하나 와카야마의 유아사(湯浅)로 추정된다.
분자에몬이 20대일 무렵[1], 키슈에서는 미깡밀감이 쓸데없이 대풍작이어서 값이 폭락했다. 하지만 당시 에도에선 대장장이들의 축제 풍습에 신께 밀감을 바치는 풍습이 있었는데 밀감이 크게 부족해 가격이 폭등했다고 한다. 그러면 키슈의 밀감을 에도에 팔면 되지 않겠느냐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당연히 당대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했지만, 당시 에도와 키슈를 잇는 항로는 지랄맞은 풍랑으로 개판이 돼서 사실상 폐지 상태인 바람에 농민들의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 때 나선 것이 키노쿠니야 분자에몬. 분자에몬은 근해의 항로를 쓸 수 없으면 원해의 항로를 쓰면 된다는 약을 빨은 생각을 했고, 밀감을 싣고 뱃사람들을 설득해서 태평양으로 나갔다. 뱃사람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악덕상인의 위엄 그렇게 당시의 조악한 배를 가지고 나간 분자에몬은 몇번을 죽을 뻔하면서 근성으로 밀감을 에도에 배달하였고 분자에몬은 순식간에 대부호가 되었다.
그 뒤 오사카에 대홍수가 발발하여 전염병이 돌자, 「전염병에는 연어가 제일」이라는 소문을 퍼트려놓은 뒤 연어를 가져가 비싼 값에 판다던가, 메이레키 대화재가 일어나기 전 노슈 키소다니의 목재를 매점해서 순식간에 백만냥을 버는 등의 악덕상인 뛰어난 지혜로 큰 돈을 벌었다.
분자에몬이 죽은 후 가게와 재산은 자식들이 물려받았지만, 자식들의 능력이 형편 없어 그 재산을 모두 탕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분자에몬의 생애에 대한 사실이 사료 교차검증 결과 불합치하는 부분이 많았다. 반 쯤은 전설상의 가공의 인물이라는 강경한 설도 있으나 현재 일본 학계의 주류는 실존 인물의 행적을 과장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뭐하나 이 인간 안 잡아가고
2 현대 일본에 끼친 영향
가수 미나미 하루오는 이 인물을 매우 좋아하여 이 인물을 주제로 세 곡의 노래를 냈다. 장편 가요 낭곡 「호상일대 키노쿠니야 분자에몬」은 9분짜리 노래고, 나머지 두 곡은 각각 3분 정도.
식품회사 키분쇼쿠힌(紀文食品)이나 서점 프랜차이즈인 키노쿠니야(紀伊国屋)는 분자에몬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창업한 회사다. 단순히 그를 존경해서 이런 이름이 붙은 것.
대항해시대 4에서 분자에몬이 사용한 물건이란 설정이 붙은 주판이 항해사 장비 아이템으로 나와 있다. 회계술 보정 +39인데다 따로 발견할 필요 없이 오사카 조합에서 사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아시아에서 시작하는 마리아의 경우에는 초반 진행에서 교역품 가격 협상을 할 때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파니포니 대쉬17화 에서 언급이된다.[2]- ↑ 그런데 미나미 하루오의 낭곡에서는 1652(承応元)년으로 나온다.
어? - ↑ 강에서 흘러가는 야채 찌꺼기를 간장에 절여 팔아서 부를 얻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