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山右近
1 개요
타카야마 우콘(高山右近, 1552~1615년)은 일본 전국시대에서 에도시대의 무장이자 다이묘이다. 정식 이름은 여럿 있으나, 후대에는 우콘으로 통칭하며 히코고로(彦五郞)라고도 부른다. 기리시탄으로 유명하며, 세례명은 주스토(Justo)이다. 다인(茶人)으로도 유명하여, 리큐 칠철(利休七哲) 중 한 사람이다.
2 생애
타카야마 가문은 셋쓰(澁津)국 미시마(三島)군의 지방영주이다. 아버지타카야마 도모테루(友照)가 당주를 하던 무렵, 타카야마 가문은 미요시 조케이(三好長慶) 휘하의 무장이자 당대의 효웅으로 유명한 마쓰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를 따르고 있었다.
1552년 우콘이 태어났으며, 12세 무렵에 기리시탄으로서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데, 부모 대에 이미 예수회의 영향으로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1564년 미요시 조케이의 사망 이후 미요시 가문은 몰락일로를 걷고, 1568년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가 쇼군위를 차지하며 셋쓰의 정세는 급변한다. 요시아키는 셋쓰 지역을 셋으로 나누었는데, 타카야마 가문은 세 다이묘 중 하나인 와다 고레마사(和田惟政)에 종사한다. 하지만 좁은 셋쓰 땅이 셋으로 나누어지면서 영토를 놓고 서로 다투는 혼란상이 벌어진다.
1571년, 다카무라 가문의 주군인 와다 고레마사가 또다른 셋쓰 지역 다이묘인 이케다(池田) 씨 휘하의 아라키 무라시게(荒木村重) 등에 패배한다. 승기를 탄 아라키 무라시게는 이케다를 배신하고 오다 노부나가와 결탁, 셋쓰 땅따먹기에 돌입하고 결국 다이묘 지위에 오른다.
한편 타카야마 도모테루(우콘의 아버지)와 우콘은 와다 고레마사를 계승한 고레나가(惟長)와 사이가 틀어져 목숨의 위협을 받는다. 타카야마 부자는 아라키 무라시게의 조언을 얻어 주군을 칠 계획을 세운다.[1]
1573년 고레나가가 화해를 청하는 척하며 살해하려는 계략으로 타카야마 부자를 소환하자, 타카야마 부자는 가신들을 이끌고 고레나가를 야습하였다. 고레나가는 황급히 고향으로 도망치고, 타카야마 가문은 승리했다. 하지만 우콘은 야습 중 아군의 실수로 거의 목이 베이지 직전의 중상을 입고 겨우 목숨만 건졌다.
이후, 타카야마 부자는 와다 가문의 2만석 영지를 흡수하여 다카쓰키(高槻) 성주가 되었다. 그리고 도모테루는 50세가 되자 우콘에게 성주의 지위를 양위했다.
1578년 아라키 무라시게가 갑작스레 오다 노부나가에 반란을 일으켰다. 우콘은 은인인 아라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애를 썼으나 실패했다. 반란을 진압하러 온 노부나가는 선교사와 기리시탄들의 목숨으로 타카야마를 위협하였다. 고민에 빠진 우콘은 성을 무라시게에게 돌려주고, 가족들을 성에 남겨둔 채 단독으로 노부나가에 투항했다. 타카야마 우콘과 나카가와 기요히데(中川淸秀) 등의 이반으로 아라키는 결국 패하여 모리(毛利) 가문에게 도망치고 만다. 이 공으로 우콘은 성을 돌려받고 4만석으로 영지가 늘어나게 된다.
1582년 노부나가의 사망 이후, 우콘은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세력에 들어가길 거부하고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막하에 들어가 분전했다. 다카야마는 전쟁 중에 아즈치(安土) 성에 있던 세미나리오(seminário: 수도사 양성소)를 자신의 본거지인 다카쓰키 성으로 옮기기기도 했다. 이후에도 히데요시 휘하에서 다양한 공훈을 세웠으며, 우콘의 영지도 착착 넓어져갔다.
그 와중에도 포교활동은 계속 되었으며, 그의 인덕에 이끌려 기리시탄 영주들은 크게 늘어났다. 유명한 인물로 구로다 요시타카(黑田孝高, 곧 구로다 간베에)는 세례를 받았으며,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 등은 세례를 받지 않았으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와 동시에 영지 내의 절과 신사를 허무는 정책을 실시했고, 신도나 불교 측에서는 그에 대한 불만이 컸음은 당연지사.
1585년 히데요시가 선교사 추방령을 내렸다. 이에 기리시탄 무장들까지 압박을 받게 되었고, 구로다 간베에 등 종교를 포기하는 경우도 속출했다. 우콘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영지와 가산을 포기할 것을 천명했고, 스스로 추방자가 되었다. 이후 기리시탄 영주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로 들어가 은거했다.
1588년부터는 기리시탄에 호의적이던 마에다 도시이에에게 의탁했는데, 1590년 오다와라의 싸움에는 추방자의 몸으로 마에다군에 종군하여 가네자와(金澤) 성을 쌓을 때 뛰어난 건축술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마에다 가문의 상담역으로 활동했다.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기리시탄 추방령을 내리자, 우콘은 마에다의 영지를 떠나 가족과 함께 선교사들을 따라 필리핀의 마닐라로 떠난다. 마닐라에 도착해 신앙의 수호자로 대환영을 받기는 했지만, 노령의 몸으로 장거리 여행은 무리였는지 병을 얻어 1615년 64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후손들은 귀국을 허락받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3 평가
수만석의 영지를 포기하고 신앙생활을 택한 인물. 최종적으로 성공한 무장은 되지 못했을지언정 성공한 신앙인이 된 셈이다. 일본 가톨릭에서는 그의 성인으로 추증하도록 신청하기도 했다. 평등사상을 가져서 솔선하여 천민들에 대한 차별을 반대했다고 한다. 영민들에게 가톨릭을 강요하지는 않았으나, 한편으로 사원을 훼손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다인으로서도 유명했으며, 센노 리큐(千利休)의 제자로 오다 우라쿠사이(織田有樂齋) 등과 친분을 쌓았다. 우라쿠사이는 그의 다풍에 대해 ‘다 좋은데 결벽증이 있는 듯하다’고 평했다.
4 기타 매체에서
신장의 야망에선 그저 그런 잡장으로 등장.
태합입지전5에서도 등장. 여기서의 이름은 타카야마 시게토모(高山重友)이다. 능력치 자체는 통솔 53, 무력 48, 정무 70, 지모 65, 매력 72(+3 다도칭호)로 고만고만한 편이지만 건축, 개간, 광산등 내정쪽 능력치가 좋은 편. 산술, 변설 기능이 구려서 직위가 낮을때는 마땅히 맡길만한 임무가 없는 것이 조금 아쉽다.
그의 삶을 다룬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타카야마 우콘(高山右近)』이 있다.
만화 효게모노와 2014년 NHK 대하드라마 군사 간베에에도 등장. 대표적인 기리시탄 무장으로 묘사된다.- ↑ 참고로 아라키 무라시게는 항목을 참조하면 알겠지만,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위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