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다 간베에


1 소개

1547년 1월 1일(율리우스력 1546년 12월 22일) ~ 1604년 4월 19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장악하게 이끈 사람.

원복 당시 아버지 모토타카가 지어준 이름은 구로다 요시타카(黒田孝高). 오늘날에는 구로다 간베에(黒田官兵衛)라는 통칭으로 더 유명한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이자 다이묘. 출가 후에는 조스이(如水)란 호(號)를 사용하여 구로다 조스이[1]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하며 당 문서도 이 명칭으로도 리다이렉트 되어 있다.[2] 그리고 한편으로 돈 시메온(Don Simeon)이란 세례명을 갖고 있는 크리스천이기도 하다.

뛰어난 지략을 가진 책사로 타케나카 시게하루('타케나카 한베에'라고도 불린다.)[3]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병위(兩兵衛, 료베에 - 두 명의 베에란 뜻)혹은 이병위(二兵衛)라 불린다. 하지만 시게하루가 먼저 병사했기에 둘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일한 시기는 없다. 시게하루 사후에 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으로 군사 전략과 다른 다이묘 등과의 교섭에서 활약하면서 도요토미의 천하를 성립시키는데 기여하였다.

2 생애

2.1 출생과 청년기

아명은 만키치, 고데라(小寺) 가문의 중신이었던 아버지 구로다 모토타카(黒田職隆)가 당주 고데라 마사모토(小寺政職)의 양녀와 결혼하면서 성씨를 하사 받았고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났다.[4] 때문에 고데라 요시타카 혹은 고데라 간베에라 불리게 된다. (본래, 간베에는 구로다 가문의 당주에게 간혹 붙는 통칭이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성주 대리를 역임하였다. 성주 대리 당시 이웃한 아카마츠 가가 3천 병력을 거느리고 고데라 가문의 본성인 히메지 성을 침공하자 단 300명으로 이를 격파해 이름을 떨친다. 이후 오다(織田) 가문이 주코쿠로 침공해 올 당시 약소 세력인 고데라 가문은 모리와 오다 중 어느 가문에 붙을지 고심하게 되는데, 대부분의 중신들은 그때까지 주코쿠 최대의 세력을 자랑하는 모리(毛利) 가에 종속되는 것을 주장했으나 오직 간베에만이 모리 가문의 당주 테루모토와 오다 가문의 당주 노부나가의 현격한 기량 차이를 간파했고 주군을 설득하여 마사모토는 오다 가문에 투항한다.

2.2 위기의 시기

덴쇼 6년(1578년), 하리마의 대세력인 미키 성주 벳쇼 나가하루(別所長治)가 오다 가문에 반기를 들자 주위의 여러 세력도 크게 동요하였다. 고데라 마사모토도 이에 호응하여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옛 이름)가 이끄는 주코쿠 원정군에게 패배. 이때 간베에를 높게 보아 노부나가의 부하가 될 것은 권한 히데요시가 모반자의 성씨를 계속 쓰는 건 좋지 않다 조언하여 이에 간베에는 본래의 성씨인 구로다로 돌아간다.

이후 노부나가의 중신으로 셋쓰노쿠니(攝津國)를 맡고 있었던 아라키 무라시게(荒木村重)가 노부나가에 대해 모반을 일으키고 아리오카 성(有岡城)에서 농성하자 그는 무라시게를 설득하기 위해 단독으로 아리오카 성으로 향한다. 하지만 교섭은 실패하고 역으로 붙잡혀 아리오카 성의 토굴에 갇히게 되었다. 이때 단독으로 교섭에 나선 그가 사실은 내통을 하는 게 아닌지 의심한 노부나가는 그의 장자 나가마사를 처형하라고 히데요시에게 명령했으나 타케나카 한베에의 구명으로 나가마사는 목숨을 건진다. 여담이지만 이 인연으로 양가는 친밀한 사이가 되었으며 간베에는 이후 한베에의 아들 시게카도의 대부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한편 간베에 본인의 고생도 말이 아니어서 포위당한 성의 토굴에 약 1년간 갇혀 있었기 때문에 건강에 문제가 생겼고 이후 다리를 절게 되었다. 그 생활이 오죽 처참했으면 빠삐용처럼 바퀴벌레를 잡아 먹으면서 살아 남았다는 이야기도 있는 데다가 매독에까지 걸려 머리에 흉칙한 부스럼이 생겼다고.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두건은 이때문에 쓰게 되었다고 하며(상기 초상화 역시 이를 그렸다.) 여러모로 그의 인생 최악의 시기라 할 만하다.

2.3 전성기

악전고투 끝에 아리오카 성에서 구출된 후 구로다는 히데요시의 군사로서 종횡무진 활약한다. 다만 군사라고 해도 일본의 군사는 중국의 군사와는 다른 개념으로 주로 후방 보급이나 적에 대한 교란책 등을 담당하는 일종의 보조지원 역할이며 그의 이러한 면모가 가장 두드러진 것은 1582년의 이른바 '주코쿠 대회군(中国大返し)'이다.

1582년,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죽자 모리 군과 대치 상태였던 당시 히데요시는 심히 당황한다. 눈앞에는 당장 그때까지 공격하던 모리군이 있는 데다 한편으로는 재빨리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하지 않으면 다른 경쟁자들이 노부나가의 후계자로서 큰 소리를 칠 것이 뻔한 상황. 이 때 간베에는 히데요시에게 '지금이 천하를 차지할 절호의 기회(天下を取るべき好機ではないか)'라고 부추기며, 미츠히데를 즉각 끌어내리고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우뚝 설 기회임을 적극적으로 어필하였고, 간베에 본인은 모리군과 강화를 맺고, 강화 교섭에도 직접 나서 주도적으로 세력간의 경계를 정하고 한편으로는 모리 가의 장수 시미즈 무네하루의 할복을 받아낼 정도로 활약한다. 그리고 이 회군(주코쿠 대회군)은 히데요시가 일본 천하를 차지하는 최대 수훈갑이 된다.

단지 이 당시 정작 발등에 불이 붙은 건 히데요시 측이었는 데도 주군 히데요시마저 냉정함을 잃은 상황에서 유독 혼자 냉정침착함을 유지하였고 모리와의 교섭에서도 지나칠 정도로 멋지게 성공한 점, 원래 두드러졌던 뛰어난 지략 등이 기화가 되어 히데요시는 그를 경계하게 된다. 아울러 여담이지만 결과적으로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된 모리는 분통을 터뜨리며 히데요시 군의 후미를 추격하려 했으나 모리 측의 걸출한 인물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이를 반대하였다고 한다. 타카카게는 조약서의 먹이 마르기도 전에 조약을 깨는 것은 바르지 못하다는 '의'를 앞세운 명분과, 이미 대세는 히데요시에게 기울었으니 히데요시에게 빚을 하나 더 만들어두는 편이 이롭다는 '실'의 이치로 당주를 설득하였고 이 설득이 결과적으로 모리 가를 살린다.

2.4 부침의 세월

회군 이후 히데요시는 빠른 시간내에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하고 마침내 노부나가의 후계자 자리를 공고히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히데요시는 간베에의 걸출한 지략을 두려워 하게 되었고(혹은 그렇다고 여겨지며), 1587년 규슈 평정 임무를 맡기면서 간베에를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규슈로 보내고 이후 부젠(豊前)국 나카쓰(中津) 12만 5000석의 소규모 다이묘로 임명하여 중앙에서 밀어낸다.

하지만 이 시점까지는 아직 천하를 완전히 평정하지 못 했던 히데요시로서는 그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며 그 역시 규슈에서 일어난 반란을 제압하거나, 1590년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호조 가의 거성 오다와라에 교섭차 방문하여 호조 가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등 히데요시의 측근 책사로서 소임을 다한다. 이 시기 시마즈 가와 다투어 승리를 거두고, 오다와라 성에 방문하면서 총과 화살로 위협함에도 평정을 유지했다는 등의 일화를 통해 그의 전략가로서의 면모는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1592년에 히데요시가 임진왜란를 일으키자 아들이자 구로다 가의 가독을 맡긴 적장자 구로다 나가마사가 참가한 것과 별개로, 그 자신도 우키타 히데이에의 군감(군사, 지휘에 대한 사항을 감독하고 조언하는 역할)으로 참군했으나 도요토미 가 직계 장수들이 전횡을 부리자 조선 상륙 직후 병을 핑계로 전선에서 이탈하여 일본으로 돌아왔으며 이듬해 3월 히데요시의 명으로 다시금 조선에서 보급로 등을 정비하는 임무를 맡아 조선으로 건너가지만 당시 전군 참모 격이었던 이시다 미츠나리 등과 마찰을 빚어 5월 일본으로 돌아와 버린다. 이렇듯 조선 출병에 대해 태업인지 비협조인지 모를 태도로 일관한 것과 이후 1593년 조스이(如水)라는 법명을 받고 출가한 정황은 히데요시와 간베에의 관계 악화설에 힘을 보태는 근거이다. 특히 이 당시 다이묘 혹은 높은 지위의 인물들의 출가는 '완전히 세상 일과 무관해 진다.'는 의미가 강하여 단순한 은거와는 다르며 대외적인 선언의 성격을 띄고있었다.

다만 1597년,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군감을 맡으라는 히데요시의 명으로 다시금 조선으로 건너갔는데 전황이 이미 기울었음을 눈치채고 전선을 축소하며 철군하는 방향으로 일을 진척시키려 했으나 이때도 히데요시의 최측근 무사들의 불만을 사 아들 나가마사가 처벌받는 단초가 되기도 하였다.

2.5 재등장과 말년

1598년, 히데요시가 죽고 이시다 미츠나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대립하면서 전운이 감돌자 간베에는 구로다 가문의 사재를 죄다 털어내는 등 재화를 쏟아부어 영지 부젠국과 그 인근에서 재빨리 농민과 낭인을 모집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규슈 평정에 나선다.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 참전을 위해 영지를 비운 주변 다이묘들의 영지를 간단히 병합하는 등 전광석화 같은 솜씨로 연전연승하여 큐슈 최남단의 시마즈 가 등을 비롯하여 그와 뜻을 같이할(혹은 빠르게 토벌하기 껄끄러운) 무력 집단을 제외하고 규슈를 거진 평정한다.[5] 그 의도는 그가 직접 말한 바 없어 공식적으로는 수수께끼이나, 오늘날 대부분의 연구자들이나 당시 사람들의 인식 모두 그가 형세를 보아 천하를 다투려 했다는 데 의견이 일치해 있다. 도쿠가와와 이시다가 서로 싸우고 있을때 큐슈전역을 평정한 다음 재빨리 출병하여 교토에 있는 덴노나 오사카에 있는 히데요리를 확보한다면 대의명분을 잡을 수 있었다.[6]

하지만 세키가하라의 결전이 싱거울 정도로 빨리 끝나면서 그의 의도가 어쨌거나 일본 천하는 재빠르게 이에야스의 지배 체제 굳히기로 사실상 들어갔다. 그러자 간베에는 평생 보여준 지략에 못지 않은 처세술을 발휘, 미련없이 지금까지의 규슈 토벌이 모두 이에야스를 위해 행동한 것처럼 포장한다. 실제로도 복속시킨 규슈의 영지들을 이에야스에게 깔끔하게 모두 헌납했으며 그의 이런 처세술 덕분에 그는 물론 가문을 계승한 나가마사 역시도 일신의 안위와 함께 가문을 지킬 수 있었다. 사실 그는 죽을 때까지 도요토미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했기 때문에 이렇게 처세술을 발휘하고 재빨리 은퇴, 타이밍 맞춰 죽어주지 않았다면 막부의 숙청 대상에 올랐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일련의 일을 마친 후에는 은퇴했고, 교토 후시미에서 병으로 생을 마감한다. 항년 60세.

3 일화

3.1 음흉한 인물?

그에 대한 일화중에서는 특히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나고 돌아온 아들 나가마사가 "도쿠가와 공께서 제 오른손을 잡고 치하해 주셨습니다."라고 말하자 구로다는 "그렇구나. 그럼 네 왼손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말하자면 왼손으로 이에야스를 베지 않고 뭘하고 있었느냐로 해석되는 이 일화는 그러나 역사적인 실증자료가 없어 후세에 그의 냉정함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위의 발언이 최초로 문서에 명기되어 나오는 것은 타이쇼 시대의 문헌으로, 문헌의 저자는 후쿠오카 번사의 아들이며 시어도어 루즈벨트와 하버드 대학 동창이라는 경력도 가진 메이지 시대를 풍미한 외교관인 가네코 겐타로이나 그가 출전을 명확히 밝힌 바는 없다.

그러나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이 일화는 시바 료타로의 소설 '세키가하라'에도 기술되어 널리 퍼졌고 또한 속설 등을 의욕적으로 소개하는 경향이 있는 코에이의 공로(?)가 더해져 날개를 달면서 간베에가 속 검고 충성심도 별로 없는 야심만 많은 인물이라 알고 있는 이도 많지만, 상술한대로 이는 증거자료가 없으며 그나마 그의 충성심에 대해 나쁘게 언급한 자료는 히데요시의 언급 정도밖에 없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도 그 전말을 따져보면 아래와 같다.

간베에는 생전에 히데요시에게 많은 계략을 주었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종종 자신 이외에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마에다 토시이에도 아닌 구로다 간베에라고 말하며, "간베에가 마음만 먹는다면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천하를 빼앗아버릴 게다."라며 경계심을 드러내곤 했다. 이에 주위 가신들이 "구로다 공은 겨우 10만 석에 지나지 않는 다이묘일 뿐입니다."라고 의아해하자 히데요시는 도리어 "너희들은 그의 진짜 역량을 몰라. 그에게 100만 석이라도 줬으면 단숨에 천하를 빼앗았을 게다."라며 타박했다고. 이외에도 "내가 죽으면 천하를 노리는 것은 이에야스나 간베에겠지. 그나마 이에야스는 온화하기라도 하지……."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다만 이들은 당시 시점에 기록된 출전은 발견되지 않았고 모두 에도 시대 말기에 쓰여진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에 나오는 말이라 역사적인 신빙성은 크지 않다. 참고로 동서에는 오다 노부나가의 사위이기도 한 가모 우지사토에 대해서도 비슷한 에피소드가 기록되어 있다.

물론 명장언행록의 기록 외에도 야설에 따르면 오사카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히데요시를 걱정하여 오사카 성으로 달려온 장수들에게 히데요시는 일일히 치하했으나 유독 간베에에게만은 "내가 죽지 않아서 몹시 실망했겠구나."라고 말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사실 히데요시는 미천한 출신 때문인지 아니면 그자신도 권력투쟁을 통해 출세했기 때문인지 부하라도 유능한 인물이나 인기있는 인물을 경계했다는 것이 정설이기는 하며 이때문에 이러한 일화들이 생명력을 얻고 있기는 하다. 다만 적어도 2014년 시점까지 밝혀진 출전과 시기에 따른 신빙성이 인정된 기록에 따르면 딱히 히데요시와 간베에의 관계가 악화되었다는 이야기는 없으며, 말년의 히데요시가 근거없는 의심병 등에 사로잡혀 있던 것을 감안하면 앞선 일화들은 간베에의 의중에 대한 신뢰성 높은 참고 자료로 인정되지 않는다. 또한 실제로 하극상과 배신이 당연한 시대에 태어났으면서도 간베에는 주군이 먼저 자신을 버리거나 베려고 하지 않는 한 주군을 바꾼 적이 없다. 다만 실제 여부와 상관없이 이러한 속설이 널리 퍼진 것은 그가 마음속을 적극적으로 밝히는 타입의 인물이 아니었으며 책략가로서의 인상이 널리 퍼진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할 수 있다.

3.2 그 외

아들이 적의 함정에 빠져서 목숨이 위험한데 그걸 보면서 빵터져서 낄낄 웃어댄 일화가 있을 정도로, 빵터지는 포인트가 다소 이상했다고 알려져 있다. <구로다 가보>에는 가문의 중흥을 이끈 인물인데도 불구하고 '공은 미친 것처럼 웃어대는 일이 많았다.'라고 할 정도. 히데요시에게 경계받거나 모략가로서 위험인물 취급 받은 데에는 이런 이상하거나 눈치가 없는 기행이 한몫 했다고도 하고, 아들인 나가마사가 아버지를 포장하기 위해 위험인물 수준의 명군사로 떠받들었다고도 한다.

한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와는 모략에 능한 자들끼리 통하는 것이 있었는지 서로 오고감이 있었는데 간베에는 타카카게를 높게 평가하였으며 그가 먼저 세상을 뜨자 "이제 일본의 현자가 사라졌다."고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정작 코바야카와 쪽에서는 자신의 사후에 구로다가 찾아오면 경계할 것이며 가문의 일에 절대로 지나치게 관여하게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신중한 지장으로 유명한 코바야카와는 생전에 칸베에에게 "당신은 머리가 너무 빨리 돌아가기 때문에 행동을 해 놓고 후회하는 일이 많을 것이오"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아울러 히데요시의 양자인 도요토미 히데츠구와도 친분을 맺었는데 히데츠구가 양자로 들어온 뒤 적장자 히데요리가 태어나자마자 "이제 나리의 목숨이 위험해졌으니 태합 전하의 눈에 벗어나는 행동을 삼가십시오."라는 충고를 해줬다고 전해진다.

사생활에 있어서는 특히 검약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말년에 규슈 정벌 계획을 세웠을 당시 계획을 위해 빠르게 모병할 필요가 있자 그동안 아껴둔 재산을 몽땅 풀어서 영지의 농민들에게 나누어준 다음 무기를 사서 전열에 합류케 하는 과단성도 아울러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때의 재미있는 일화로, 간베에가 영지의 많은 농민을 다 알아보지 못할 거라 지레짐작하고 두 번 돈을 받아가려 한 파렴치한 자들이 있었는데 머리가 좋은 그는 그들을 기억하면서도 그냥 한 번 씨익 웃고는 돈을 더 주었다고 한다. 물론 주변에 흘리듯 넌지시 알려 쐐기를 박아두는 것도 잊지는 않았다지만.(…)

하여간 그는 책략가로서는 냉정하고 철저해도 인간적으로는 다정다감한 면모도 분명 있었던 입체적인 인물로, 세키가하라 이후 완전히 세상에 뜻을 두지 않고 나서는 그냥 사람 좋은 영감님마냥 방문객들을 접대하고 영지의 아이들과 놀아주면서 유유자적한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4 기타

간베에에 대한 기타 참고할만한 이야기로는 일본의 코미디언 마츠모토 히토시가 말하는그의 야망과 좌절이 있다. 그 특유의 맛깔나는 설명이 재미의 포인트지만 한편으로 일본내에서 전국 시대의 무장에 대한 지식 자체가 관심 있는 사람들이나 아는 분야라는 걸 잘 보여준다.

여담이지만 그의 이름 이니셜이 하필 KY(Kuroda Yoshitaka)인 탓에 전국 시대 팬들 사이에서 KY[7]라는 동인 설정이 붙어있다. 특히 혼노지의 변 소식을 듣자 히데요시에게 이건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한 것이 그의 인생 최대의 눈새짓이라나.

5 대중매체 속의 간베에

5.1 전국무쌍 시리즈

구로다 간베에(전국무쌍) 항목 참조.

5.2 바사라2

f_5mb5.jpgmp5_kanbee.gif

호오? 네놈이 굴러들어 왔는가.

황금색 전차를 타고 나온다. 강화형으로 아들 구로다 나가마사가 등장.

5.3 전국 바사라 시리즈

해당 항목 참조.

5.4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파일:黒田官兵衛.jpg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노부나가의 야망 창조 전국입지전

아주머니 국 좀 더 주세요

항상 일류급 모사로 등장하며 통솔력도 높은 편이라 전장에서 굴리기도 좋다.

  • 천하창세에서는 전장 모든 범위에 걸친 혼란을 쓸 수 있는 셋 중 한 명이다. 마지막 시나리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다이묘로 등장하는데, 컴퓨터가 플레이해도 대개 규슈 북부를 제압한다.
  • 혁신천도에서 모두 고유기로 '화우(火牛)'를 들고 나온다. 기능은 적 부대의 혼란과 함께 병력을 줄이는 것인데, 혁신에서는 대미지가 쏠쏠했지만 천도에서는 너프되어 쓰기가 애매하니 그냥 정공으로 갉자. 덧붙이면 혁신에서 91이던 우월한 통솔력이 천도에서는 84로 너프.
  • 창조에서는 통솔이 89로 오르고 원래 우월했던 지략 수치도 여전하여 중요하게 쓸 수 있다.
  • 삼국지 12의 추가 무장으로 나오는 스펙은 통77, 무55, 지95, 정87. 전법은 화계.
  • 2014년 대하드라마 군사 간베에로 지명도가 상승하던 도중, '타다테루'라는 유명 니코동 유저가 업로드한 노부나가의 야망 천상기 막장 플레이 실황중계 영상 시리즈에 주인공으로 출연해서 일본 웹에서 상당히 인기를 끌었다.[8] 이 영상은 막장 플레이의 진수로 꼽히는 1인 플레이를 하는데, 우선 당주를 돌격시켜 죽게 만들어서 칸베에를 군주로 만든 뒤, 모든 무장을 추방하고 그 뒤로도 단 한명의 무장도 고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정을 절대 하지 않고 오로지 전쟁만으로 천하통일을 지향하는 막장 중의 상막장 플레이이다. 전투중 현지 징병이 가능하고 능력치 성장 시스템으로 인해 한 장수를 육성시켜서 엄청나게 활약시킬 수 있는 천상기의 시스템 덕에 가능한 플레이. 이 시리즈의 칸베에는 피에 굶주린 마귀로, 전장에서 붙잡은 모든 무장을 처형할 뿐 아니라[9] 무장을 처형하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영토를 얻지 못해도 적 무장의 목을 따면 큰 성과를 거둔 싸움으로 취급하고, 멸망한 가문의 잔당들이 마구잡이로 반란을 일으켜서 엄청난 시간을 들여 모두 소탕하는 것이 주가 되는 마지막화에서는 수백 명의 무장을 배경음악의 리듬에 맞추어 두다다다 참수하는 엽기적 행동으로 머신건 참수리듬 센고쿠라는 별명을 얻기까지 했다. 게다가 칸베에는 책략가로 유명한 인물이라 지략 수치가 탑급인데다가 작중의 무장 타입이 '다인' 으로 설정이 되어 있어서, 전투중에 마구잡이로 적을 혼란에 빠뜨리고 나서 '적을 혼란시킨 후에 마시는 차의 맛도 각별하구나...'라는 명대사가 시도때도 없이 작렬. [10]
이 시리즈에는 '히소치(非そち)'라는 일종의 비공식 제목에 가까운 별명이 붙어 있는데, 이것은 '잘못은 그쪽에 있는 것이 아닐런지(非はそちらにあるのでは)'의 준말. 이 시리즈에서는 적과 전쟁을 벌일 때 인접세력에게 참전을 권유할 수 있는데, 성공확률이 꽤나 낮은데다가 막장 전쟁광 플레이를 하는 중인 칸베에 측의 평판은 애초부터 매우 낮아서 성공할 가능성이 한없이 제로에 가까운데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계속 정직하게 참전을 권유하고 거절당하는 중계자의 행동이 일종의 의례나 클리셰로 승화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

아무개, 아무개 가문 다이묘 : 슬슬 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소이다.
</br>쿠로다 칸베에, 쿠로다 가문 다이묘 : 이번의 싸움에서 우리 편이 되어 싸워주시오.
</br>아무개, 아무개 가문 다이묘 : 이번의 전쟁, 잘못은 그쪽에 있는 것이 아닐런지... 그럴 순 없겠소이다.
</br>쿠로다 칸베에, 쿠로다 가문 다이묘 : 아쉽지만 아무개 가문을 움직일 수는 없었구나.

거의 이런 식.[11] 최종화에서는 초반에 칸베에만의 세력을 만들기 위해 내쫓은 쿠로다 칸베에의 아버지 쿠로다 모토타카를 포로로 잡는데, 중계자가 감정이입해서 '에엑?! 아버지가 왜 여기 있는 거야. 크...크윽...!' 하는 고뇌 어린 한마디와 함께 여태까지 한번도 건드리지 않았던 석방 버튼을 누르면서 시청자들에게 수수께끼의 감동을 선사했다. 영화화 확정이라는 코멘트가 화면에 도배됐을 지경. 결국 전 일본의 무장들을 거의 몰살에 가깝게 살육해버리고,[12]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 가까운 전국통일 엔딩.

5.5 군사 간베에

2014년, NHK 대하드라마 시리즈 53번째 작품으로 '군사 간베에'가 방영된다.

2014년 1월 5일 첫 방송을 시작하였으며 주인공 간베에 역에는 V6의 멤버 오카다 준이치가 캐스팅되었다. 상세 사항은 해당 항목 참조.

5.6 태합입지전

내정, 전투 양쪽에 능하다. 무력이 다소 낮긴 하지만 어차피 직접 플레이할 것이 아니라면 무력은 제일 불필요한 능력치이고 나머지는 80~90 수준. 사기스킬 중 하나인 위압까지 들고 있다. 근데 1560년부터 나오면서 1575년까지 신분이 가장 낮은 아시가루 병사에서 바뀌지 않는다. 히데요시 휘하로 들어간 1582년에선 부장으로 급성장하고 1598년 시나리오에선 가독을 아들에게 물러준 상황이라 신분은 가로.

직접 플레이할 경우 1560년, 1568년, 1575년 시나리오에선 고데라 가문의 가신이긴 한데 고데라 자체가 다이묘가 아니고 아카마츠 가 산하의 성주로 나온다. 1575년 시나리오에서는 시작하자마자 이벤트로 아카마츠 가가 오다 가에 종속되고 이때 간베에가 사자로 나서는데 분기에 따라 오다 가에 사관할지 아카마츠 가에 남을지 선택할 수 있다. 오다 가에 사관할 경우 히데요시의 배하가 되는데 아카마츠 가에 남아봤자 고데라의 배하 신분인 건 마찬가지라서 오다 가에 사관하는 쪽이 좋다.

이후 전용 이벤트는 딱히 없이 오다 가 범용 이벤트로 점철. 사실 간베에는 특이하게도 다른 캐릭터로 플레이할 때 이벤트에서 임팩트를 보여주는 쪽으로, 가령 다른 인물로 1575년 시나리오를 하게 되면 아라키 무라시게가 모반할 때 간베에가 억류되면서 이후 아리오카 성을 탈환할 때까지 간베에를 만날 수 없는 이벤트가 발생하지만 간베에로 직접 플레이할 때는 그런 거 없다. 또한 1598년 구로다 나가마사로 세키가하라 전투까지 끝마치고 아버지 간베에의 자택을 방문하면 예의 상술된 일화인 "왼손은 뭐하고 있었냐."라는 이벤트가 나오지만 역시 간베에로 직접 플레이 할 경우엔 발생하지 않는다.

여담으로 아버지도 칸베에에 비하면 초라하지만 내정쪽으론 그럭저럭 쓸만하다. 가장 높은 능력치인 정무가 70 수준이지만 내정쪽 기능은 2레벨이상을 갖춘게 많아서 꽤 쓸 만한 편.

5.7 효게모노

이 작품에서는 대담하게 실제 역사와 정 반대의 행동을 한 것으로 그린다. 노부나가의 타도는 히데요시 형제가 꾸민 것으로 되었고, 구로다 간베에는 히데요시의 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에게 속아서 그저 아케치 미츠히데가 노부나가를 죽인 것으로 알고 회군하자는 히데나가의 의견에 따르게 된다.

나중에 히데요시와 센노 리큐의 사이가 험악해져 리큐가 히데요시 타도의 음모를 꾸미자, 병에 걸려 쇠약해졌음에도 이를 염려하던 히데나가에게 사태가 심각해지고있다는 것을 알려 히데나가를 격앙시켜 죽음에 이르게 한다. 누군가를 불러달라는 히데나가의 부탁을 무시하고 죽을때까지 기다렸다가 의사를 부르는걸로 보아 그 역시 리큐에게 마음이 있거나 난세를 바라는 모양. 세키가하라 당시 그의 행보를 보여주기 위한 복선일지도 모른다.

  1.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인도자이자 전사인 여호수아의 이름을 본 따서 지었다고 한다.
  2. 단, 외래어 표기법상의 원칙인 조스이가 아닌 죠스이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주의.
  3. 히데요시의 참모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시게하루 항목에도 있듯이 엄연한 오다 가의 직속 가신이었으며 히데요시 휘하에서 종군한 것도 '요리키(일종의 파견 근무)' 자격으로 종군한 것이었다.
  4. 간베에도 성년이 되어서 고데라 집안의 여식과 혼인을 맺게 된다.
  5. 큐슈3강 중 북동부에 오랫동안 세력을 유지해왔던 오토모는 1577년 미미가와 전투에서 시마즈군에게 대패를 당하면서 세력이 급속히 쇠퇴했으며, 임진왜란에서의 실책으로 그나마 남아 있던 분고 1국마저 개역당했다. 히젠 류조지의 실권은 1584년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당주인 류조지 다카노부가 전사한 이후, 겉으로는 서군이지만 속내는 동군이었던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잡고 있었다. 그리고 오토모, 류조지를 차례로 격파하고 큐슈 통일을 눈 앞에 뒀던 시마즈는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군에게 항복. 그 댓가로 사츠마, 오스미, 휴가 3국을 받게되었으나, 다된 밥에 코를 빠뜨린 심정인 당주 요시히사의 마음에 찰리가 없었다. 결국 시마즈 가문은 히데요시의 명에 의해 강제적으로 은거하게된 요시히사와 당주로 임명된 요시히로 사이의 반목으로 거의 내분직전이었다. 이 때문에 구로다를 가로막을 만한 세력은 없는거나 마찬가지.
  6. 잘하면 천하를 차지하고 못해도 도요토미, 도쿠가와에 이은 제 3의 세력으로 급부상 할 수 있다.
  7. '空気読めない'의 약자로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은어. 번역하면 눈새 내지는 넌씨눈 정도.
  8. 꽤나 장기간 지속된 시리즈인데, 모든 영상이 수십만 이상의 조회수, 만 개 이상의 코멘트를 기록하는 엄청난 인기도를 자랑했다.
  9. 3살짜리를 죽이는 위업을 달성해서 시청자들을 식겁하게 하기도 했다.
  10. 이 대사가 'XX 후에 마시는 차의 맛도 또한 각별하구나...'로 여기저기서 패러디되는 것은 물론, 케이온을 패러디한 참수후 티타임이라는 드립이 생겨났다. (...) 사실 이 대사는 천상기에서 다인으로 설정된 무장들(호소카와 후지타카가모 우지사토 등) 모두가 똑같이 하는 대사다. 간디(문명 시리즈)와 비슷한 예.
  11. 천상기의 외교 대화창 인터페이스가 우연히도 카톡과 흡사하게 일본에서 널리 쓰이는 메신저인 LINE의 인터페이스와 비슷해서 많은 사람들을 웃겼다.
  12. 한 명이라도 남아있으면 내정을 아예 건드리지 않는 특성상 반드시 어딘가의 빈 영지를 점거해서 반란을 일으키고, 당연한 결과로 텅 비어있는 주변의 영지를 논스톱으로 마구잡이로 점령하고 넘쳐나는 재야 무장들을 등용해서 순식간에 무시무시하게 세력을 불려버리기 때문이다. 즉, 적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무장들을 죽여 없애는 것이 유일한 수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