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나루 전투

1 개요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의 일부분인 과달카날 전투에서 일본제국 육군이 펼친 첫 번째 공세. 미국에서는 Battle of the Tenaru로 기재하며 일본측에서는 イル川渡河戰(일루강 도하전)으로 기재한다.[1]

이름과는 달리 실제 전투가 벌어진 장소는 테나루강이 아니라 일루강이다. 이는 당시 미국 해병대에서 들고있던 지도가 제작된지 좀 오래된 버전이라 지형묘사는 그럭저럭 비슷했는데 강 이름을 테나루강으로 잘못 적어놓았던 것이 원인이었다. 완전히 없는 이름을 적었던 것은 아니고 지도 제작가가 위치를 착각하는 바람에 일루강과 테나루강의 이름을 반대로 적어놓았던 모양. 그 때문에 일부 역사가들 중에는 이름이 잘못됐다는 점을 지적하며 일루강 전투(Battle of the Ilu river)로 기재하기도 하며, 전투가 벌어진 장소를 따서 앨리게이터 지류 전투(Battle of Alligator Creek)로 기록하기도 한다.

2 배경

미군의 기습상륙으로 과달카날에 건설중이던 비행장을 빼앗기자 대본영에서는 탈환의지를 천명하고 작전을 시작했다. 사실 기습이란 표현처럼 일본군은 미군의 공세를 예측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즉각적인 반격작전 따위는 준비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나마 미카와 군이치 제독이 재빠르게 움직여 사보섬 해전을 통해 미 해군을 떡실신시킬 수 있었고 초반 제해권을 일본군이 가져가는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문제가 있었다면 과달카날 공격을 책임진 17군이었다. 당시 라바울 인근에 머무르고 있던 17군은 가용병력이 부족한 상황이었는데 그나마도 병력이 분산되어 있는 상태였다. 17군의 직속부대였던 가와쿠치 기요다케 소장의 35여단은 팔라우에 있었고, 4보병연대는 아예 필리핀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나마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이 괌 인근에서 라바울로 접근하고 있던 이치키 기요나오 대좌의 28보병연대였다. 이에 따라 하쿠타게 하루키치 중장은 이치키 대좌에게 900명 가량의 선발대를 뽑아 과달카날로 급행을 지시했다.

2,300명 중에서 916명을 선발한 이치키 대좌는 7일치의 식량을 들고 느려터진 수송함에서 보다 빠른 구축함으로 환승하여 1942년 8월 18일 미 해병대 교두보에서 35km 떨어진 지점에 상륙했다. 이 때는 헨더슨 비행장이 완공된 상태라 비행기들도 몇 대 들어와있는 상태[2]였고, 과달카날 상륙 이후 첫 보급이 이루어져 해병대의 보급선이 불안하게나마 회복되어 있는 상태였다.

다만 이 때부터 일본육군의 병크 대행진이 시작되고 있었다. 일본군은 사보섬 해전 이후 제공권과 제해권을 틀어쥐고 수시로 미 해병대 교두보를 폭격했다. 게다가 미 해병대도 자신들의 병력을 숨기거나 위장하는 노력을 투자하지도 않았는데 이치키 대좌가 받아든 브리핑에는 여단 규모가 주둔중인 것으로 보고받았다. 막판에 가서 최소 여단 ~ 최대 사단 규모로 정정되긴 했지만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당시 일본군 안에 널리 퍼져있던 미군의 이미지란 '겁쟁이'였기에 한 일본군 병사는 "에이, 뭐 그까이꺼 그냥 좀 겁만 주면 항복하겠지."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3 발각

상륙한 이치키 대좌는 100여명 정도를 상륙지점에 남겨놓고 800명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해병대 교두보를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 다만 미 해병대는 일본군의 상륙을 어느정도 추측하고 있었다. 밤에 경계중인 병사들이 구축함 항행소리를 청음한 상태였고, 심지어 함포를 쏘고 가는 모습까지 목격한 상황이었다.동네방네 광고를 하는구나 게다가 당시 연합군이 훈련시켜둔 해안감시원들을 여기저기 배치해둔 상태였는데, 이 중 아무도 예상 못한 초인이 한 명 나오는 바람에 일본군의 상륙위치와 그 존재가 완전히 까발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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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콥 보우자경

당시 과달카날 원주민 출신 해안 감시원이던 자콥 보우자(Sir Jacob C. Vouza, 1900(?)~1984)경은 일본군이 상륙한 직후 재수없게 포로로 잡혔다.(팬티, 정확하게는 요의(loincloth) 속에 미국국기가 들어있는 걸 발견했다고 한다. ) 이치키 대좌는 정보를 캐내기 위해 보우자를 고문했으나 그가 입을 열지 않자 총검으로 목과 배를 찌른 다음 그대로 내버려둔다. 치명상에 이를 수 있는 중상을 입었음에도 보우자는 고통을 씹어먹으며 이빨로 포승을 끊고 정글 속을 달려서 미 해병대 교두보에 도착하여 일본군 상륙사실을 보고했다.[3] 즉시 미 해병대에서는 정찰병력을 파견했고 곧 이치키 대좌가 파견한 일본군 정찰대와 맞닥뜨렸다. 이때 일본군 정찰대는 통신선을 가설하고 있었는데 해병정찰대를 보자 '쟤들 어디에서 왔지?'하면서 머뭇거렸지만, 해병대는 '저 색히들 잽스구나!'하면서 전투태세를 갖추고 교전, 전사자가 1명이 나왔지만 적 정찰대를 전멸시키고 서류 한 장을 노획한다. 정확한 병력의 수가 기재되어 있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이 일본군 병력이 단순한 정찰대가 아니라는 점은 파악할 수 있었다. 보고를 받은 밴더크리프트 소장은 즉시 방어선을 강화하도록 지시했다.

한편 이치키 대좌도 정찰대가 미 해병대와 충돌했다는 사실을 파악했고 즉시 병력을 파견하여 전사자들을 수습했다. 어쨌든 해병대 교두보의 위치를 대충 파악할 수 있었기에 이치키 대좌는 공격을 결정했다.

4 전투

함성을 지르며 돌격한 병사들의 눈에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광경이 펼쳐졌다. 중기관총의 십자포화였던 것이다.

8월 21일 자정 직후, 이치키 대좌의 병력이 엘리게이터 지류에 도착했다. 이 장소는 미 해병대 1연대 2대대가 방어하고 있었으며 37mm 대전차포와 75mm, 105mm 야포까지 배치해 둔 상태였다. 이렇게 압도적인 화력이 갖춰진 방어선을 일부 중화기가 있었다곤 해도 고작 800명의 알보병으로 뚫으려 했으니…… 후새드.

미 해병대 전방 초소에서 사람들의 목소리를 비롯한 여러 소음이 들린다는 보고가 올라왔고, 마침내 새벽 1시 30분을 기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첫 공세가 시작됐다. 이치키 대좌는 기관총과 수류탄, 박격포를 발사하여 교두보를 공격하고 100명의 병력을 투입한 1차 돌격을 시작했다. 해병대에서는 준비해둔 37mm 대전차포에 산탄을 장착하여 응사했지만 일본군은 모래톱을 무사히 건너 해병대 방어진지에 도달했다. 이후 방어진지를 놓고 육박전이 벌어졌고 일부 진지를 점령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바로 뒤에서 대기중이던 미 해병대 예비 병력이 지원에 나서자 그대로 쓸려나갔다. 새벽 2시 30분, 200명 가량이 2차 공세를 시작했고 마찬가지로 모래톱을 건너 일부 진지에 육박하긴 했으나 마찬가지로 역시 해병대의 방어를 뚫지 못하고 실패. 이 무렵 겐지로우 이누이 중위가 공세는 무리니 남은 병력을 철수시키자고 제안했지만 이치키 대좌가 거절했다고 한다.

이치키 대좌는 병력을 재규합하여 공세를 준비했고 다시 한 번 미 해병대 방어진지에 박격포를 발사했다. 하지만 미 해병대에서 75mm 야포로 반격을 가해오는 바람에 큰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그리고 5시가 되자 이번엔 공세방향을 바다와 가까운 방향으로 변경해서 해병대 진지를 향해 병력을 투입했다. 하지만 이를 포착한 미 해병대에서 중기관총을 난사했고 일본군은 엄청난 사상자를 낸 끝에 공세를 포기하고 철수했다.

위 전투에서 미군의 한 기관총 진지는 부사수는 손을 다쳐 무기를 다룰 수 없고, 사수는 눈을 다쳐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부사수가 방향을 지시, 사수는 사격하는 방식으로 몇 시간이나 진지를 지켜낸 일화가 있다.

이후 일출이 시작되고 아직 철수를 하지 않고 강 건너편에서 얼쩡거리는 일본군의 모습이 보이자 미 해병대는 반격을 결정했다. 레나드 B. 크레스웰 중령이 지휘하는 1대대가 즉시 강을 건너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바다쪽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헨더슨 비행장에서 출격한 비행기와 M3 스튜어트 경전차 5대까지 가세하여 일본군을 철저하게 압박했다. 전투는 17시 무렵 정리됐는데 30여명의 병력만이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지점에 남아있던 잔여병력에 합류했고, 15명의 부상자가 포로로 잡혔다. 그 외에는 싸그리 전멸크리. 이치키 대좌는 연대장이 돌격하다가 거름이 되었다고 하면 쪽팔리니 군기를 불태우고 자결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미군 측에서는 교전중에 전사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5 여담

"장군님. 저는 이러한 전투 방식은 일찍이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일본군은 포로가 되기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수류탄으로 자폭하거나, 스스로 자결을 기도합니다."
- 전투 후 미 해병대 사령관 홀컴 중장에게 밴더크리프트 장군이 제출한 전투 보고서 中

그 광경은 지금도 눈에 선명해서 잊을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도 참담한 광경에 저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카메라를 찍는 손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쨌던 간에, 그것은 미군이 일본군을 무찌른 첫 영상이었으니까요.
아마도 그 영상은 일본군의 패배를 기록한 최초의 영상이었을 겁니다.
- 미 해병대 정보장교 세이어 소울 (당시 소위)

고작 800명으로 사단 병력이 우글거리는 교두보로 돌격한 것 부터가 삽질이다. 이치키 대좌의 결정 자체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역사가들도 많은 형태로 해석을 내놓고 있다. 다만 일본군이 지니고 있던 말도 안되는 자부심 자체를 탓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견해이다. 아무리 그 놈의 곤조니 야마토 정신이니를 강조했다고 해도 1:10이상으로 벌어진 병력차를 극복할 수 있을리가 없는 문제. 덕분에 미 해병대가 가지고 있던 일본군의 평가가 "막상 붙어보니 별거 아니네"란 식으로 수정될 수 있었다. 특히 이 전투에서는 미군이 전쟁 발발 즉시 일본어 능력자를 모아서 일본말을 배운 정보 장교들이 처음 파견되어 이치키 부대의 전멸을 영상으로 기록했다.
  1. 참조자료 - 히스토리 채널 - 세기의 총격전 과달카날 전투, NHK다큐멘터리 '태평양 전쟁 - 적을 모른 채 나를 모른채 ~과달카날~ 편, <헨더슨 비행장> 등
  2. 초반의 제공권, 제해권 상실로 미군의 고생이 워낙 심했기에 미군 비행기가 착륙하여 조종사들이 부임보고를 할 때 밴더크리프트 소장은 너무 반가워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뻔 했다고 회고했으며, 해병대들은 도착하자마자 조종사들과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고 한다.
  3. 모두가 부상 때문에 그가 곧 죽을거라 생각했으나, 보우자 상사는 후송된 후 놀랍게도 부상에서 회복되어 과달카날 전투 후반에 다시 일선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그의 공로를 인정한 미정부와 영국정부에서 각각 훈장을 수여했으며, 과달카날 전투와는 무관하게 1979년에 영국에서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가 만약 원주민이 아닌 미국인이었다면 명예 훈장이 수여됐을지도 모른다. 이후 수십년간 공로에 걸맞은 대우(과달카날 명예 대통령으로 연금까지 줬으며 국가원수급으로 고급 관사에 후손들 학비 면제 등등)를 받으며 잘 살다가 그가 사망하자 미해병대는 조문단을 보냈고 그에게 진주만에서 침몰된 아리조나호에 게양되었던 성조기를 기증한다.375px-Sir_Jacob_Vouza_memorial_at_Rove%2C_Honiara_Solomon_Islands.jpg 그리고 솔로몬 제도에 그의 동상도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