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제도

Themata. 중기 동로마 제국의 군사 제도의 중핵을 이룬 제도로, 일종의 둔전병 제도라고 할 수 있는 제도다.

1 배경

동로마 제국은 그 지정학적 특성상 양면전쟁을 항상 강요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갖고 있었다. 파르티아를 무너뜨리고 동방의 패자로 자리잡은 사산 왕조와는 피로 피를 씻는 열전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게르만계 민족들, 또 이들이 이주하고 난 뒤 빈 자리를 메운 슬라브계 민족들이나 튀르크계[1]민족들과도 제국 서부, 북부에서 치열한 접전을 펼쳐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국은 필연적으로 행정 업무와 군사 업무를 일체화한 일종의 군관구제를 통해 군사력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군관구제는 640년대에 제국 동부의 경제적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소아시아의 대부분과 이집트가 이슬람 세력 하에 떨어지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대개의 경우 이 시점을 테마 제도의 출발점으로 잡는데, 테마 제도는 아직 제국의 영향력 하에 남아 있는 소아시아 지역에 우선적으로 적용되었다. 크게 5개의 테마가 이 시점에 조직되기 시작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2 초기의 테마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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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0년 경의 테마

테마는 스트라티고스[2][3]라 불리는 사령관에 의해 행정/군사가 통합되어 운영되는 군관구 조직이었다. 초기의 테마는 기존에 소아시아 지역에서 운영되고 있던 야전군의 관구 조직을 근간으로 하여 조직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초기의 테마 제도는 크게 테마 아르메니아콘(Thema Armeniakōn)/테마 아나톨리콘(Thema Anatolikōn)/테마 옵시키우(Thema Opsikiou)혹은 옵시키온/테마 트라키시온(Thema Thrakēsiōn)/카라비시아니(Karabēsianoi)[4]의 다섯 조직으로 분류할 수 있다.

각기 4~6세기의 코미타텐세스 야전군들인 아르메니아 기동군/오리엔툼 기동군/제1프레센탈군과 제2프레센탈군/트라키아 기동군/일리리쿰 기동군을 승계 및 재조직하여 이루어졌으며, 무려 2~3세기에서부터 유래하는 각 기동군 안의 연대들도 테마 아래 투르마 단위에 정착하였다. 그 군인들은 테마 구역 내에 거주하면서 가족을 부양하고 스스로를 무장할 경제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종래의 황실 영지에서 토지를 수여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각 테마 관구는 줄어든 제국의 영토에 비하면 지나치게 컸고, 실질적으로 테마 제도에 의거한 둔전 지급은 9세기 초에 니키포로스 1세 치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일 정도로 주먹구구식인 면도 있었다.

결국 이런 단점은 테마를 통치하는 사령관들의 손에 대규모 병력을 쥐어주는 꼴이 되므로 사령관들의 발호 및 반란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불러왔다. 7세기 말엽부터 8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 동안의 빗발치는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한 제국은 테마를 보다 작은 조직으로 세분화시켜 운영하는 것을 기본 방침으로 삼게 되었다. 842년의 기록에 따르면 개편된 테마 조직 내에는 18명의 스트라티고스가 있었고, 940년에는 28명이, 970년대에 이르면 90명에 육박하는 스트라티고스 및 분견군 사령관이 존재했다.

3 테마 제도의 정착과 그 운영

본래 군사적 효용성에 입각하여 구 행정 구획에 기초하여 설정되던 테마는 점차 제국 행정 구획을 맞추는 기초적인 단위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더불어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초엽에 이르는 기간 동안 설치된 소규모 군관구들인 클리수라의 대부분이 정식 테마로 승격되었다. 원래 이런 클리수라들은 상당수가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하는 요새화된 산악 지대에서 소규모 게릴라전과 반격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도 중요하므로 단순한 지역방어의 개념을 넘어서기 시작한 테마 제도의 규모는 점차 확대되었다.

초기 소아시아 지역 일대에서 운영되던 테마 제도는 그 효용성을 입증하면서 제국 국방의 기본 체제로 자리잡게 되었다. 10세기에 이르러 숨가쁜 방어전에서 벗어나 여력이 생긴 동로마 제국은 발칸 반도와 동방 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하게 되었다. 니케포루스 2세요한네스 1세, 바실리우스 2세로 대표되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갖춘 황제가 군대를 지휘하면서 제국은 새로이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고, 확장된 영토에 기존의 테마와는 규모 면에서 다소 열세하지만 새로운 테마들을 편성하여 국경 일대를 요새화시켰다.

또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강력한 황제 집권을 이룩한 황제들은 대토지 보유를 꿈꾸는 중앙 귀족층과 치열한 갈등을 빚었고, 니케포루스 2세가 암살당하는 등 이 갈등은 치열한 양상을 빚었다. 하지만 최소한 바실리우스 2세로 대표되는 유능한 황제들의 즉위는 중앙 귀족들의 욕망을 어느 정도 억제하는 데 성공했다.

테마 제도 하에서 각 테마는 약 1만여 명에 이르는 수의 병력을 제공할 수 있었다. 테마는 투르마-드룽고스-반돈-켄타키아-콘투베르니아로 이루어지는 전투 서열 하에 일정 단위의 정규 병력을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했고, 이러한 동원 체계가 제 기능을 완벽히 발휘하던, 바실리우스 2세가 사망하던 1025년 당시 동로마 제국은 25만여 명에 이르는 군사력을 동원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였다. 이 병력은 395년도 동서 분리 당시의 동로마 제국군의 수효 110%에 해당한다!

물론 이렇게 동원된 테마 산하의 군사력만이 동로마 제국 군사력의 핵심은 아니었다. 테마에서 동원된 병력들은 익숙한 지형에서 싸운다는 이점을 바탕으로 지연전 및 게릴라전을 수행해 적의 주력을 지치게 한 후 인접 테마의 지원군과 중앙군인 타그마[5]가 지친 적의 주력을 격파하는 것이 동로마 제국 전략의 기본으로 자리잡았다. 테마 제도는 강력한 중앙군 타그마타와 함께 제국의 국방력을 지탱하는 강력한 축으로 작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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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5년 당시 각 테마의 이름과 경계.

4 테마 제도의 몰락

하지만 이러한 테마 제도는 둔전병 제도라는 본질적인 한계에 부딪히며 몰락으로 치닫게 된다. 그 이유는 테마의 병사 대부분이 자신이 경작하는 둔전의 수입으로 무장하고 식량을 조달하기 때문에 자신의 테마를 떠나서 멀리 원정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적이 지속적으로 테마를 침공하는 것을 막는데는 유리하지만, 적을 선제공격한다던지, 멀리 떨어진 다른 테마에 지원군을 편성할 때는 테마의 전체 병력숫자에 비해 극히 적은 수만 편성이 가능했다.

더군다나 바실리우스 2세로 대표되는 대대적인 제국의 확장이 펼쳐지면서 제국은 긴 전란을 겪어야 했고, 동로마 제국은 과거 로마군포에니 전쟁을 거친 이후 체감하게 된 문제를 고스란히 느끼게 되었다. 군사력의 중핵을 이루고 있는 자영농 계층은 테마가 둔전병 제도인 이상, 테마 내에 거주하는 자영농 계층은 테마가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의 핵심이었는데, 이들이 몰락하며 테마 내에서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이 심각할 정도로 감퇴하는 현상을 겪게 된 것이다.

여기에다 제국 군대의 지휘관 노릇을 하던 군사귀족층이 대거 몰락한 여파가 제대로 들이쳤다. 테마의 병력을 무장시키기 위해 일정 수준의 가치를 가진 토지를 분배해야 했으므로 10세기 경 둔전병들은 최소한 금 4파운드의 가치를 가진 둔전을 지급받아야 했다. 니케포루스 2세는 이를 최소 금 12파운드에 이르는 규모로 확대했다. 결국 이렇게 재산이 되는 토지를 받고 이를 유지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소규모 귀족층의 성장이 시작되었으며, 이들 신흥 귀족은 테마나 타그마 등에서 군사적 실적을 올리면서 제국 군대에서 중추적 노릇을 했다. 문제는 이들 소규모 군사귀족의 상당수가 바실리우스 2세 사후 약한 군주권을 틈타 정계의 주도권을 잡은 중앙 귀족들의 대토지 확장과 정치적 주도권 다툼에 휘말려 몰락했다는 것. 제국 군대에서 중추 역할을 하던 군사귀족들이 대거 몰락하면서 제대로 된 군사적 역량을 갖춘 인물들이 사라졌고, 이런 사건 이후에는 제국은 쓸만한 장교가 극히 부족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그나마 잔존한 자영농층 역시 무거운 군역을 벗어나기 위해 납세를 선택하는 경우가 늘었으며, 또한 세수 확대를 위해 의도적으로 군역에서 빼내어 납세 의무를 지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점차 지방 방위력의 중핵을 이루던 테마는 더 이상 제대로 된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작동하지 못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 나선 것이 군인 귀족 출신의 콤네누스 황조였다.

콤네누스 황조 치하에서는 군사적 봉건 제도인 프로니아 제도가 제국 국방을 책임지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잡았다. 프로니아를 담당하는 프로니아리오스로 임명된 인물들은, 수세권을 부여받아 세금을 바탕으로 병력을 동원 및 유지하는 임무를 받았다. 얼핏 서유럽의 봉건제도와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많이 달랐다. 일단 가장 다른 부분은 이것이 쌍무적 계약 관계로 보기 어렵다는 부분이다. 토지 자체는 여전히 황제가 법적인 주인이었으며, 프로니아리오스는 단지 수세권을 부여받은 존재였다.

물론 이 상황에서도 기존의 테마 제도가 완전히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지만, 높아만 가는 군사적 수요를 테마 제도로 충당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자영농을 바탕으로 한 테마 제도는 국방의 중핵으로서의 기능을 사실상 상실하기에 이르렀고, 형해만 남아 행정 제도로는 남게 되었다.

5 종언

콤네누스조 이후의 테마 제도는 기능을 정지한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 된다. 둔전제를 기반으로 파트 타임 식으로 운영되던 기존의 테마 병력들은 직업 군인에 가까운 타그마타[6]로 대체되었으며, 더 이상 바실리우스 2세로 대표되는 중기 동로마 제국의 군사적 전성기 시점의 병력을 동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트레드골드의 연구에 따르면 바실리우스 2세 사후 25만여 명에 이르던 동로마 제국의 동원 전력은 2~5만여 명 사이에 머물게 되었다. 이후 1204년의 멸망과 재건을 거치며 그 동원전력은 다시 1만 명 안팎으로 축소되었고, 팔라이올로구스 왕조 시절에는 수천에 머물렀다. 그리고 이 병력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오스만 제국과 싸우다가 전멸했다.

물론 군인 개개인의 전투력은 직업 군인으로 변화하면서 대단히 향상되긴 했고, 그것이 전체 동원 병력의 1/4 이하로 떨어진 상황에서도 제국이 어느 정도 강대국으로 남아있었던 여러 이유 중 하나였다. 또한 이전 테마 시기에도 어차피 한 번에 동원되는 군인 수는 5만을 넘어본 적이 대단히 드물었고, 대체로 2~4만 선에서 수렴되었다. 그러나 양면에서 강력한 군사적 압력을 받는 제국의 입장에서, 수적인 동원 역량의 감퇴는 많은 어려움을 만들었다.

또한 테마 제도의 몰락만이 아니라 동원 역량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던 소아시아 내륙 일대를 상실한 것도 동원 역량의 감퇴에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당장 적이 쳐들어오면 중앙군이 요격하려고 출동하는 동안 현지에서 방어전을 수행해야 하는데, 현지에 그 임무를 수행할 병력이 부족했으며 결국 이를 보충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용병을 상당한 규모로 고용해야 했다. 결국 테마 제도 시행 당시보다 국방비 부담은 크게 늘었다.

하지만 콤네누스 황조에게도 기존 테마 체제를 해체한 나름의 이유는 분명했다. 앞서의 황조들이 지나치게 큰 야전군 조직의 반란자들에게 당하거나 혹은 야전군 조직의 수장들이 서로 싸우는 걸 막기 위해 기나긴 세월 동안 하던 고민을 어찌 되었든 근본부터 해결한 것이다. 이것은 로마 제국이 술라의 로마 점령 이후부터 근 천 년이 넘게 지긋지긋이 해왔던 고민이었고 아우구스투스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콘스탄티누스 5세, 테오필루스 등의 난다긴다하는 황제들도 결코 해소할 수가 없는 문제기도 하였다. 로마 제국을 괴롭히던 내전 또한 인력에 상당한 피해를 주던 요소였음을 고려해봐야 한다.

물론 국방비 부담이 커지고 인력이 부족해진다는 큰 단점이 있었지만, 콤네누스 황조는 특유의 능수능란한 외교력으로 용병을 공짜로 제공 받거나 혹은 많이 깎거나, 아니면 적들이 자기네들끼리 싸우게 만들어서 손 안대고 코푸는 방식 등으로 이에 대처했고 군인으로 복무할 인력들은 어떻게든 경제 활동에 종사하도록 장려하여 경제력과 생산력이 크게 개선되었다. 때문에 앞서 언급한 문제들이 적어도 12세기 중반까진 그렇게 큰 부담으로 다가오진 않았고, 콤네누스 황조의 테마 해소책은 국방비 절감, 사회 안정, 경제력 향상 등에서 분명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콤네누스 황조의 정책은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많은 문제가 있었다. 그 전 로마 황제들이 과연 이걸 몰라서 대규모 군조직을 아예 해소해버리지 않은 걸까? 그렇지 않았다. 테마 제도가 내부 분란을 장기화시키는 근원임을 모르는 황제는 없었으나, 반란세력만 진압하고 테마는 내버려뒀다. 누구나 콤네누스 황조의 알렉시우스나 마누엘 같은 뛰어난 황제들처럼 외교를 귀신처럼 잘해낼 수 있진 않았고, 적들이 더 이상 제국의 외교술에 속지 않게 되는 불행한 사태가 올 경우 이런 식으로 스스로가 가진 힘을 제한하는 정책은, 위기 상황에서 크나큰 파국으로 도달할 수 있었다. 예컨대 아예 처음부터 병에 걸리지 않도록 노력을 하면 되므로 유사시의 보험 따윈 들 필요가 없다는 논리인 것인데, 사람이 아무리 병에 걸리지 않게 노력해도 그런 노력과 무관하게 아프거나 다치는 상황이 온다면 그때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때문에 마누엘 콤네누스 황제의 사후 이 부담을 지탱하던 외교와 대외 관계 자체가 무참하게 붕괴된 데다 여기에 수만 명의 4차 십자군까지 쳐들어오면서 유사시에 필요한 병력이 없는 상태[7]에 제국은 맨몸으로 노출되었고, 그 결과는 1204년 제국의 멸망이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테마 제도는 부활하지 못했고, 1453년 여전히 병력이 없는 상태에서 오스만 튀르크의 공격을 받은 제국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6 관련 문서

  1. 불가르족이나 쿠만족, 페체네그 족 등 적잖은 투르크계 민족들이 우크라이나 스텝 지역을 통해 동유럽으로 꾸준히 몰려왔었다.
  2. Stratēgos. 영어 단어 Strategy의 어원이 되었다.
  3. 제도 도입 초기까지만 해도 스트라테고스 외에 민정을 담당하는 프로콘술 지위가 있었고 영향력을 미쳤으나, 점차 스트라티고스가 그 지위를 압도하면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4. 카라비시아니는 공식적으로 테마 제도에 따라 재편되지는 않았으나, 소아시아 남부 일대에서 실질적으로는 테마 제도의 일원으로 기능했다고 할 수 있다. 8세기에 정식 테마가 되었다.
  5. 아주 간단히 말하면 정예 직업군인을 바탕으로 한 카타프락토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더 깊게 파고들면 여기에 덧붙일 요소가 있으며, 그 수에 있어서도 논란이 있다. 트레드골드의 경우는 바실리우스 2세 재위 당시의 타그마타 병력이 42,000명에 육박했다고 추정하지만 J.핼든 같은 경우는 6,000명 남짓으로 추정하는 등 학자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리고 트레드골드는 다른 건 해석 잘 해놓고 왜 이것만 잘못 보냐며 핼든을 극딜했다. 핼든의 경우 저 수의 추정이 막연히, 그 시대에 그런 상비군을 유지할 리 없었다는 개인 가정에 기반을 둘 뿐 이렇다할 주장의 근거가 없어, 까일 빌미를 제공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6. 과거 중앙군을 가리키던 단어인 타그마타는 이 시점에 이르러서는 직업 군인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향이 강하다.
  7. 정확히는 콘스탄티노플 수비군이 있기는 했는데 약화될 대로 약화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