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BC 490년부터 BC 449년까지 페르시아와, 아테네 및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뭉친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벌인 전쟁. 아테네의 급성장을 일궈낸 전쟁이자 고대 그리스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평가받는 전쟁이다.
대략 BC 490년부터 BC 479년까지는 페르시아의 공격과 그리스 연합의 방어가 이루어졌고 BC 479년부터 BC 449년까지 그리스의 공격과 페르시아의 수비가 이루어졌는데, '침략자 페르시아와 이를 방어하는 그리스'라는 개념 덕에 후반기 그리스의 침략은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어쨌든 이전쟁 이후에도 페르시아는 건재했으나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의 왕 중 왕에 맞서 자신들의 자유와 독립을 지켜내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 특히 테베와 아르고스가 페르시아에게 붙었던건 모른 척 해야한다. 사실 나머지 도시들끼리도 스파르타 등 몇몇을 빼면 서로 먼저 나서기 싫어서 도망치거나 페르시아에 붙을 기회나 노리고 있었다.
헤로도토스가 그리스 최초의 역사서를 저술하기도 했다.
1.1 발단 : 이오니아 반란 (BC 499 ~ BC 493)과 결과.
페르시아 전쟁이 벌어지게 된 계기는 이오니아(소아시아 서부 일대의 그리스 식민지 도시국가들) 반란에 아테네가 개입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오니아 지역은 키루스 2세 치세때 페르시아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는데, 이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이오니아 도시국가들 중 철학자 탈레스의 고향인 밀레투스 등이 중심이 되어 몇가지 요인에 의해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때 이들은 그리스 본토의 국가들에게도 만약 자신들의 반란이 실패한다면 페르시아가 이번엔 그리스 본토를 공격할 것이라며 지원을 요청했는데, 다른 도시들은 페르시아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기가 질려 다 가만히 있는데 아테네와 에레트리아가 지원을 하면서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다. 아테네가 이때 개입한 것은 밀레투스 등이 자신들과 혈통적 연계가 있는 이오니아 족이었기 때문이었더 것도 있고 막 민주정으로 전환한 상태에서 쫓겨난 참주였던 히피아스를 페르시아가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쟁에서 땡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시민들의 욕심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테네의 지원은 전함 20척 정도의 작은 것이었다. 이들은 사르디스를 공격해 키벨레 사원을 불태우기도 하지만 페르시아 기병대에 패하고 곧바로 도주한다. 이후 이오니아 반란군은 키프로스와 헬레스폰토스 일대에도 손을 뻗어 보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라테 섬 해전[1]에서 이미 주요 섬 국가들을 매수한 페르시아에게 간단히 깨지며 진압된다.
이후 페르시아는 이오니아 일대의 지배권을 안정화시키며 다리우스 대왕의 사위 중 하나인 마르도니오스의 지휘하에 BC 492년에 아테네에 대한 응징군[2][3]을 보내지만 아토스 곶에서 폭풍우로 삼분의 일 이상의 함대를 상실하고 마르도니오스 자신도 마케도니아 왕국을 굴복시키는 과정에서 이민족들에게 부상을 입어 아테네로 응징군을 보내는 건 나중으로 미뤄지게 되었다.
1.2 페르시아의 1차 그리스 원정 (BC 490)
BC 491년 페르시아는 그리스 본토의 도시국가들에게 사절을 보내 복종에 대한 상징적 의미로 흙과 물을 보내라고 요구하는데, 여기에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사신들을 처형해 버리는 것으로 응수한다.[4] 이에 다리우스 대왕은 이전에 이오니아 반란때 반란군에 지원군을 보내기도 했던 에레트리아와 아테네를 1차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원정군을 보낸다.
지상군 2만 5천과 600척의 함대로 구성된 이 원정군은 에레트리아를 공격, 제압하고 아테네 공략을 위해 마라톤 평원에 상륙한다. 이에 아테네는 스파르타를 포함한 여러 도시국가들에 지원군을 요청함과 동시에 9천의 중장보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밀티아데스에게 위임해 마라톤으로 파견, 페르시아군과 대치했으며 이후 펼처진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파하고, 기병을 포함한 주력을 함대에 탑승시켜 아테네 시 근방으로 접근하려던 페르시아 함대가 도착하기 이전에 신속히 아테네로 돌아와 상륙을 저지한다. 결국 아테네 공략에 실패한 페르시아군은 철수했다.
이때 마라톤 전투의 소식을 먼저 전하기 위해 전령이 달려온 것이 마라톤의 기원이 되었다는 일화가 있는데, 실제로는 전령이 먼저 달려온 게 아니라 아테네군 전체가 함대가 오기 전에 아테네로 황급히 달려왔다고 한다. 더 흠좀무하다.
1.3 페르시아의 2차 그리스 원정 (BC 480)
다리우스 대왕은 아테네 정벌의 실패 소식을 듣고 복수를 맹세하며 2차 원정군을 보낼 준비를 하나 이집트에서 반란이 일어나 이를 제압하다가 병사하고, 관대한 크세르크세스 1세가 그 뒤를 잇는다. 크세르크세스는 이집트 반란을 진압하고 바빌로니아에서 일어난 반란도 진압한 다음 대규모 원정군을 직접 이끌고 그리스 원정길에 나선다.
헤로도토스는 이 원정군을 아시아 일대에서 소집한 180만, 유럽 일대에서 추가적으로 합류한 30만, 하인과 수행원 및 여타 잡역부들이 260만으로 육군만 470만이며 해군은 갤리선 1207척과 수송선 및 보급선 3000여 척에 해군 인력은 25만이여서 총 규모 500만이라는 초월적인 수치를 제시하고 있지만, 현대의 연구에서는 대략 10~30만 사이로 추정된다. 헤로도토스는 이외에 헬레스폰토스 일대에 부교를 건설해 육군을 옮겼다고 하며, 아칸토스 일대에 운하를 파서 함대를 안전하게 옮기기도 했다는 일화를 들기도 한다.
이에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헬라스 동맹' 을 결성해 대향하기로 정하고 동맹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국가들에게도 지원을 요청하지만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나 아드리아해의 코르키라(오늘날의 코르푸)와 같은 힘있는 다른 도시국가들은 눈치만 보면서 합류하지 않는다.[5]
그리스 연합은 1차 방어선을 테르모필레와 아르테미시움 일대에 구축하고 테르모필레에는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이 이끄는 중장보병 6천여 명(스파르타는 이때 또다른 종교축전 중이여서 근위대 300명만을 보냈고, 펠로폰네소스의 다른 도시국가들과 보이오티아의 테베, 포카스등이 추가적인 병력을 보탰다.)과 여기에 딸린 시종 및 노예들을 포함해 1만여 명 정도 되는 병력을 이끌고 방어선을 첬고, 아르테미시움에는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겔리선 271척과 기타함선 50여척(나중에 겔리선 53척 추가)을 이끌고 방어선을 친다.[6]
여기에 페르시아군이 접근해 3일동안 테르모필레 전투와 아르테미시움 해전이 펼처지는데, 3일만에 테르모필레가 뚫리면서 아르테미시움의 그리스 해군도 방어를 포기하고 철수한다.
이후 페르시아군은 아테네를 점령하고 펠로폰네소스 일대까지 공격하려 하나 테미스토클레스에게 속아 넘어가 지형적으로 대단히 불리한 살라미스 해협으로 들어가(함대가 너무 대규모다 보니 좁은 해협에서는 그리스 함대보다 불리하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대패하고 테실리아로 돌아가서, 겨울이 다가오자 마르도니오스에게 상당수 병력을 떼어주고 크세르크세스 자신은 철수한다.
1.4 페르시아의 3차 그리스 원정 (BC 479)
크세르크세스에게서 그리스 원정에 대한 권한을 이어받은 마르도니오스는 겨울이 지난 다음에 재차 그리스 원정을 기도한다. 1차로 아테네를 헬리온 동맹에서 떼어내고자 시도하지만 실패하자, 재차 남하해 아테네를 또 불태운다. 이에 살라미스로 피신한 아테네는 스파르타에게 계속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의 힘을 합처 중장보병만 3만여에 달하는 원정군을 파견한다. 여기에 아테네 중장보병 8000과 합류한 뒤 플라타이아이로 진격해 페르시아군과 플라타이아 전투를 벌여 페르시아군을 격파[7], 동시에 그리스 해군은 이오니아 지역의 미칼레 전투에서 요새를 쌓고 버티는 페르시아 해군을 격파해 페르시아군을 그리스 본토에서 밀어내게 된다.
1.5 이후의 전쟁과 페르시아의 반응 (BC 478 ~ BC 449)
페르시아의 침공이 끝난 뒤에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를 몰아낸 여세를 타고 세력 확장을 꾀했으며, 이오니아 일대를 포함한 에게해 전체를 넘어서 헬레스폰토스와 흑해, 키프로스와 이집트까지 세력확대를 꾀했다.
또한 이러한 활동에 스파르타가 소극적으로 움직인 반면 아테네는 적극적으로 세력 확대를 꾀해 BC 478~BC 477년 사이에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고 페르시아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을 주도하게 되었다. 에게 해 북부의 마지막 페르시아 기지였던 에이온을 BC 476년에 함락시켰고, BC 466년에는 대규모 델로스 동맹군을 소아시아지역으로 파견해 이오니아 지역을 모두 점령한다. 이집트는 BC 459년과 BC 454년에 아테네의 지원으로 반란을 일으키나 페르시아에 진압당했고, 키프로스 역시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치열한 쟁탈전이 펼처졌다. 결국 지친 양국은 BC 449년에 칼리아스 화약을 맺어 전쟁을 끝낸다.
단순히 이렇게만 보면 꽤나 열심히 치고받은 느낌이 들지도 모르지만, 페르시아는 고질적인 왕위다툼에 신경쓰느라 방어 위주의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고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아테네 제국으로 바꾸느라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지속한 감이 있다. 실제로 아테네는 이 전쟁을 통해 깡패로 성장했다.
일단은 페르시아라는 거대한 성의 왼쪽에 조금 큰 균열을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스인들은 이 전쟁의 패배로 페르시아가 사분오열 됐으면 좋겠다고 상상했다. 아테네의 비극 작가 아이스킬로스가 쓴 《페르시아인들》에서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사실 이 전쟁으로 페르시아 일대에 미친 영향을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 에게해-이오니아 일대만 영향을 끼쳤다면 모를까, 상당히 중요한 속주인 이집트 및 시리아 근방까지도 영향이 갔고, 덕분에 이집트는 페르시아 속주 중 가장 반항적인 속주로 존재하게 된다. 트라키아 일대의 속주는 유지가 어려운 시점까지 가기도 했고 이오니아에서 세금 거두라면서 지속적으로 갈굼받은 지역 총독들 입장에선 상당히 큰 문제기도 했다. 그리스인들이 용병으로 페르시아 왕위다툼에 개입하기도 했고. [8]
1.6 아테네와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몰락 (BC 431 ~ 338)
자만이 뻗친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구성해 스파르타에 오만을 부렸고, 결국 이를 보다못한 전투종족 스파르타는 성질이 뻗쳐서 남그리스 도시국가를 중심으로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결성,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BC 404)이 발발했다.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지도하에 육지에서의 싸움을 피하고 해군으로 응수하는 전략으로 성과를 거두었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전쟁의 장기화를 피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도시민의 1/3이 죽었다는 무시무시한 전염병 크리가 터지고 페리클레스도 이것에 걸려 죽자 아테네는 국력이 눈에띄게 약해진다. 그리고 페리클레스의 퇴장으로 정치의 공백이 생겼고 이 틈을 탄 알키비아데스[9]와 같은 신흥 정치가가 등장하여 그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시라쿠사 전쟁을 제안한다. 시민들은 이것을 지지했지만 알키비아데스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다른 정치세력의 공작으로 알키비아데스는 성상파괴의 누명을 뒤집어 쓴채 망명하고 그 결과 그 없이 시라쿠사 전쟁을 수행하게 된다. 전염병 크리로 인해 국력이 크게 쇠약해진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놔두고 시칠리아 섬까지 가서 그 섬의 가장 크고 강력한 도시인 시라쿠사를 포위 공격하고자 한 것이라 뜬금없어 보이나 당시 아테네 인들의 생각은 이 도시를 점령해 그 자원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하는데 보태자 이런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을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한 알키비아데스가 추방당한 뒤 이것을 앞장서서 반대한 니키아스 [10] 가 이 전쟁을 맡게 되자 지휘는 엉망으로 되었다. 게다가 스파르타와 코린토스의 지원 병력이 상륙에 성공하여 지원병을 모집하고 아테네군의 포위를 저지하기 시작했다. [11] [12] 또한 시라쿠사 역시 매우 강력한 대도시였으므로 공략은 쉽지 않았다. 아테네는 그야말로 물량을 모두 투입하여 어떻게든 승리코자했으나 마침내 대패하여 이 병력과 물량이 시칠리아 섬에서 소멸됨으로써 아테네는 100여척의 함대를 제외하고 모든 전쟁 물자를 손실한 끔직한 타격을 입는다.
그 뒤 알키비아데스를 불러들여 100여척의 함대로 계속 버티다 알키비아데스가 일등항해사에게 맡기고 자리를 뜬 상태에서 일등항해사가 멋대로 스파르타 해군에게 덤벼 가벼운 패배를 당하자 격분한 시민들에 의해 그는 사령관 지위에서 쫒겨난다. 그 뒤로 아테네는 남은 국고와 인력을 쥐어짜내어 새로이 편성한 함대로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스파르타 해군을 격파하지만 전투 직후 풍랑을 만나 생존자 구출과 시신 수습을 포기하고 철수하였고 시민들은 대단히 분노하여 [13] 지휘관들을 모두 처형하는 병크를 터뜨린다. 그 뒤 경험있는 지휘관이 부족한 아테네 해군은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스파르타 해군에게 가볍게 격퇴되고 [14] 결국 스파르타의 승리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마무리 된다.
그 뒤 아테네를 점령한 스파르타는 스파르타대로 국력을 이 전쟁에 너무 소모해서 전후 아테네의 위임통치조차 힘에 부칠 지경이 되었고 전후처리에 불만을 품은 코린토스와 테베가 반기를 들어 재차 코린토스 전쟁, 스파르타-테베 전쟁을 치르며 그리스의 패권을 차지했다(그 사이에 아테네는 2차 델로스 동맹을 건설해 어느정도 국력을 회복했다). 스파르타는 이때 테베에게 당한 패배로 인해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우선 총 전투 인원이 2만여가 조금 안되는 스파르타 군이 이 한싸움의 패배로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며 스파르타의 피 정복민인 헬롯인들이 승자인 테베에 의해 해방되었기 때문이였다. [15]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주권국이 된 테베는 페르시아 전쟁의 피날레를 장식한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동족 그리스인들을 배신하고 페르시아 편에서 싸우다 아테네군에게 개박살났었다.
그러나 테베의 영광도 잠시, 장창병으로 무장한 마케도니아가 북쪽에서 밀고 내려오면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차례로 마케도니아에 접수당했다. 이를 보다못한 두 원수지간인 아테네와 테베는 동맹을 맺고 마케도니아와 대결한다. 테베와 아테네는 당시 그리스에서 가장 부유하고 인구가 많은 도시 국가들이였으므로 이들의 연합은 그만큼 마케도니아의 침략이 위협적이였다는 말이였다. 이때 마케도니아의 왕인 필립포스와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훗날의 알렉산드로스 대왕)는 이 연합군을 카이로네아 전투에서 격파하여 (이때 알렉산드로스는 기병을 지휘하였다) 이 두 강력한 도시들의 그리스에서의 패권다툼을 종식시키고 마케도니아는 새로운 패자가 되고 만다.
그 이후 한때 종주국이었던 테베는 필립포스가 죽고 알렉산드로스가 즉위한 직후에 반란을 일으켰다 진압당하여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고 시민 전원이 노예로 팔림으로써 소멸당해버린다. 역사의 향배란 정말 어찌될 지 모르는 일이다.
1.7 후대의 해석
- 페르시아 전쟁/해석 참조
2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페르시아 정복
요즘엔 이 뜻으로 안써주지만 고대 사료에는 이 뜻으로 써진게 있다. 괜히 헷갈리면 곤란하다.
3 로마 - 페르시아 전쟁
3.1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공격 이전의 제국상황
포카스의 치세 8년 동안 제국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국고는 바닥났고 민심 역시 바닥을 기었다. 돈이 없으니 당연히 군대 또한 제대로 유지할 수 없었다. 그리고 더 이전 마우리키아누스 시절 발칸 전쟁의 실패로 발칸 반도의 넓은 영토는 공중분해 되었으며 북쪽 슬라브, 불가리아 등이 제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그러한 상황에서 페르시아는 제국을 도발하며 힘을 키워갔다.
3.2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공격
603년 포카스 시절 시작된 페르시아의 공격은 시도때도 없이 계속되었다. 페르시아의 황제 호스로의 목적은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부활이었고 로마제국의 정복이었다. 그것은 곧 로마제국의 멸망을 의미했고 로마제국은 좋으나 싫으나 이러한 악연을 끊기 위해서는 전쟁에 나서는 수 밖에 없었다.
3.3 악화되는 동방의 상황
이러한 상황에서 카르타고의 총독인 헤라클리우스는 608년 카르타고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610년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해 즉위했다(자세한 사항은 헤라클리우스 항목 참조). 하지만 헤라클리우스라도 당장에 암울한 상황을 타개할 수는 없었다. 그는 처음에 아나톨리아를 프리스쿠스 장군, 시리아와 이집트를 자신의 사촌인 니케타스에게 맡겨 방어하게 하였으나 실패했고, 이 지역들은 페르시아에 점령되었다.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는데 즉위한 해인 610년 시리아의 주도이자 5대 교구중 하나인 유서깊은 도시 안티오크가 넘어갔으며 곧 카파도키아 주도인 카이사레아 역시 함락되었다. 611년 황제가 몸소 이끄는 군대가 카이사레아에서 페르시아군과 격돌해 격퇴시키긴 했으나 이미 많은 영토를 잃은 후였다. 얼마 후 황제의 황후가 사망하고 헤라클리우스는 사촌과 재혼했는데, 613년 헤라클리우스는 다시 결정적 패배를 경험해야 했다. 안티오크에서 그는 페르시아에게 크게 패배하였고 시리아가 페르시아에게 완전히 넘어갔다. 비슷한 시기 아르메니아에서 페르시아군은 로마세력을 축출하고 친 페르시아계 관리를 두어 아르메니아를 로마로부터 완전 차단하고 북부 아나톨리아의 관문인 타르소스를 함락해 아나톨리아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호스로는 시리아 공략 2년만에 팔레스타인 지역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기독교 최대 성지인 예루살렘이 존재하는 곳이었고 이 지역이 돌파당하면 바로 제국의 주요 곡창지대인 이집트가 위험해졌다. 하지만 결국 예루살렘은 포위 공격 3주만에 함락당하고 9만명이 학살당하고 기독교 최대의 성물인 예수가 못 박혔다고 전해지는 참십자가마저 페르시아에 약탈당하기에 이른다.
3.4 서방도 마찬가지(..)
이러한 악화는 서방도 마찬가지였다. 발칸 전쟁 실패의 여파로 밀려내려온 슬라브족의 행렬은 아바르족 등 까지 달고 내려와 제국 발칸 북부의 주요도시 시르미움이 함락당했고 싱기두눔과 나이수스와 같은 유서깊은 도시들도 파괴되었다. 슬라브족은 이카이아 반도까지 밀고 내려와 크레타 섬까지 진출했다.614년에는 페르시아의 팔레스타인 공격과 함께 달마티아-일리리아의 주요 도시인 살로나가 함락되어 일리리쿰에 로마세력이 완전히 말소되었으며 617년 상황을 타개하고자 직접 회담에 나선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아바르족의 배신에 의해 목숨을 빼앗길 뻔 했다. 그리고 멀리서는 스페인에서 서고트족이 영토를 회복하고자 밀고 내려와 유스티니아누스가 정복한 영토를 잠식했다. 이탈리아도 여타 이민족 문제로 시끄럽기는 매한가지. 그나마 북아프리카는 안전하단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3.5 이집트, 함락되다
결국 이러한 상황 악화는 최악의 상황을 일으켰다. 황제의 사촌인 니케타스가 이끄는 군대는 후퇴에 후퇴를 거듭해, 619년 이집트의 관문요새인 펠루시움이 페르시아 기병대에 함락당하였고, 전쟁내내 전장이 되본 적 없는 곡창지대 이집트마저 페르시아의 칼날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결국 610년 역시 5대교구이자 주요도시인 알렉산드리아는 총대주교와 니케타스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협정에 의해 페르시아에 점령당했으며 페르시아군은 서쪽으로 밀고들어가 키레나이카까지 함락당하고 말았다.
3.6 콘스탄티노플 앞
한편 페르시아의 분견대는 아나톨리아에서 로마군을 격파하고 카파도키아 지역을 점령하였으며 서쪽으로 밀고들어가 보스포루스 해협까지 당도했다. 그들은 콘스탄티노플과 바로 맡보고 있는 칼케돈을 점령하였으며, 이것은 곧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이 멀지 않았음을 알리는 나팔이었다. 이 때 황제는 콘스탄티노플과 제국의 존망을 걱정해 호스로에게 휴전제의를 하였으나 호스로는 그것을 거부하였다. 하지만 곧 태도를 바꿔 엄청난 공물을 요구했고 헤라클리우스는 수락했다. 헤라클리우스는 이 기간동안 공물을 준비한다는 핑계로 군대를 재편성해 반격의 칼날을 갈았으며 호스로는 그의 페르세폴리스인 다스타게르드로 돌아갔다.
3.7 반격의 칼날
처음 헤라클리우스는 자신의 본거지인 북아프리카로 돌아가 힘을 키울 생각을 하였으나 총대주교인 세르기우스의 격렬한 반대로 생각을 바꿨다. 일단 그는 전쟁과 포카스로 인해 망가진 재정을 복구시키기로 했다. 막무가내로 관리들의 월급을 절반으로 줄였고 이집트가 함락된 시점에서 힘들어진 곡물 수입으로 인해 수도에서 행하는 곡물 배급도 중단했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조치에도 망가진 제정을 회복시키기는 매우 어려웠다. 결국 그는 총대주교 세르기우스의 허락하에 교회의 재산에 손을 대어 제정을 복구하기로 하였다. 다음으로 그가 개편한건 행정제도였다. 고대부터 내려온 속주 제대가 속주의 대규모 이탈로 인해 더 이상 유지되기 힘들어지게 되자 헤라클리우스는 테마제란 행정제를 실시하였다. 테마 제도는 각 지역을 테마라는 일정한 단위로 묶고 그 지역에 농민들에게 땅을 분배해 거주하게 하고 대신 주민들에게 군역의 의무를 주어 각자 자신들의 땅을 보호케하는 일종의 둔전병 제도 였다. 이로인해 제국은 그간 사용했던 기동 용병타격대가 아닌 자국 상비군을 부릴 수 있게 되어 군사적인 면에서 비용절감 효과를 크게 보았다. 하지만 헤라클리우스가 반격에 사용한 것은 대부분 용병이었다고 한다. 하여튼 헤라클리우스는 크고 작은 개혁으로 제국의 국고를 채워가기 시작했고, 채워진 국고는 곧 군사개혁에 투자되었다. 헤라클리우스는 그간 패배에도 불구하고 땅을 내주더라도 병력을 아낀다는 생각으로 군대를 아껴왔고 이전 제국의 3/4 이상의 군인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고 이러한 전략은 제국이 영토를 탈환하는데 매우 큰 기여를 했다. 619년 헤라클리우스는 드디어 트라키아에 군대를 소집했다. 그는 아바르족에 20만의 금화를 보내 평화를 얻어내어 서방을 안정시켰고 장엄한 미사를 치룬 후 5만 결사대와 함께 619년 봄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떠나 원정길에 올랐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 이후 처음으로 약 300여년 만에 황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병한 것이었다.
3.8 헤라클리우스의 이수스 전투
그는 수도 바로 맞은편의 칼케돈에 포진해있는 페르시아군을 즉각 공격하지 않고, 아나톨리아와 시리아 접견지대에 있는 이소스에 함대와 함께 상륙했다. 이소스 주변 크고 작은 요새에 주둔해있던 로마반격군이 주요군과 합류했고, 이 소식을 들은 페르시아 사령관 샤르바라즈는 곧장 이소스로 진격했다. 그 동안 여름 헤라클리우스는 이곳에서 병사들을 훈련시켰으며 그간 크게 중시되지 않았던 궁기병대를 중심적으로 육성했고, 이는 전쟁 내내 그를 큰 승리로 이끈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페르시아군이 곧 당도했고 그들의 포위로 인해 전투는 시작됐다. 헤라클리우스는 기동대에게 페르시아 측면을 포위하라 명했고 훈련된 로마군은 오랜 원정으로 지친 페르시아군을 포위해 비교적 손쉽게 승리할 수 있었다. 드디어 로마가 페르시아에게 승리한 것이었다. 이후 헤라클리우스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곧장 아나톨리아를 넘어 아르메니아로 진격했다. 이수스에서 패한 페르시아군은 군대를 재집결시켜 그들을 추격했으며 아나톨리아 요새에 주둔해있던 페르시아 군도 합류해 로마군을 추격했다. 결국 아르메니아에서 두 제국군은 접전을 펼쳤고 다시 로마군이 승리하였다. 이로 인해 로마군은 아나톨리아에 어느정도 영향력을 회복하고 아르메니아에서 페르시아 세력을 축출할 수 있었다. 이듬해 겨울 헤라클리우스는 할리스 강으로 퇴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뇌물을 주어 잠재워둔 아바르 족이 트라키아를 침공했단 소식이 들려왔고 그는 급히 카파도키아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수도로 향해 그들과 협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더 많은 뇌물을 먹은 후에야 그는 다시 전쟁을 시작할 수 있었다. 623년 3월 봄 그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출병했고 호스로 2세는 역시 휴전을 거부하고 전쟁을 속행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5천의 군사를 새로 모집한 헤라클리우스는 트레비존드를 거쳐 아르메니아로 진격했고 페르시아의 성지인 간자크를 향해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드빈을 함락한 로마군앞에 페르시아군이 나타났지만 4만의 병력밖에 없었던 호스로는 싸워보지도 않고 후퇴명령을 내렸으며 페르시아의 성지는 그대로 파괴되고 철저히 약탈당하였다. 하지만 페르시아의 방해로 그는 수도인 크테시폰까지 향하지 못하고 이듬해 겨울 아르메니아로 퇴각해 군세를 보충할 수 밖에 없었다. 624년 봄 헤라클리우스는 재출병했지만 병력을 보충한 페르시아의 방해로 진격은 더욱 힘들어졌다. 메소포타미아와 메디나에서 3회에 걸친 대규모 회전이 일어났고 모두 로마측의 승리로 끝났지만 페르시아의 끈질긴 추격으로 결국 황제는 철군해 반 호수에서 겨울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한편 헤라클리우스는 겨울을 이용해 재점령한 아나톨리아와 아르메니아를 군사테마화 하는데 주력했다. 하지만 암울한 소식도 전해졌는데 고트족이 로마 스페인 지역 최후의 요새인 카르타고노바를 점령했다는 소식이었다. 625년 봄 황제는 재차 출병했고 저항없이 티그리스 강을 도하해 페르시아의 주요도시 아미다를 함락한 후 콘스탄티노플의 자신의 안위를 전하였다. 페르시아군은 로마의 진격을 우려해 유프라테스의 다리를 파괴했지만 여울목을 건넌 로마군이 추격해오자 사루스 강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페르시아군은 침착하게 대처해 샤브바라즈의 지휘아래 로마군을 기습했고 로마군은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헤라클리우스는 직접 전장에 뛰어들어 군을 독려했고, 저녁때까지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지만 결국 로마군에게 승리가 돌아갔다. 이후 로마군은 세바스테이아로 진격했고 페르시아군은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아나톨리아에서 본국을 철수했다.- ↑ 페르시아가 600척을 반란군이 350척의 함대를 거느렸다.
- ↑ 사실 490년이 아니라 이것을 1차 원정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때 동원된 병력은 호왈 20만이라고 하는데... 글쎄...
- ↑ 참주 히피아스의 망명건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전쟁 직전 아테네는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이과정에서 당시 그리스의 자타공인 최강이던 스빠르타-! 와 마찰을 빚었다. 이에 불안을 느낀 시민들은 페르시아와 우호관계를 수립하려고 사절단을 보내지만 이들은 페르시아의 요구에 따라 단순한 동맹이 아닌 전면복종을 해버리고, 이를 내심 기분나빠한 본국 시민들은 이 일을 흑역사 취급하고 없는일처럼 넘어가버리기로 한다. 따라서 자신들이 페르시아를 공격해도 도의적 책임이 없단 아테네와 복종을 맹세한 아테네가 배신을 했다고 여기는 페르시아 사이에 이견차이가 생겨 이후의 전쟁을 발발시켰다.
- ↑ 아테네는 사신들을 재판에 세워 사형을 때렸고, 스파르타는 재판이고 뭐고 없이 사신들을 우물에 빠뜨려 죽였다. 흙과 물을 가져가고 싶으면 직접 우물에 들어가서 가져가라는 말을 곁들이면서.
얼핏 보기엔 친절해 보이긴 하는데, 그게 스파르타 퀄리티인 게 문제.이 사건은 영화 300에서 레오니다스가 페르시아 사신을 걷어차 구덩이에 빠뜨리는 장면의 원형이기도 하다. - ↑ 마그나 그라이키아의 최대 도시(?) 시라쿠사의 경우 카르타고와 전쟁중이어서 참여할 수가 없었다.
- ↑ 이것이 유명한 영화 300의 배경이 된다
- ↑ 전투초반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군의 견제에 상당히 말려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으며 사기가 저하됐고 결국 임전무퇴 스빠르타, 제일 원한을 많이 사서 도망갈 수가 없는 아테네, 아테네가 없으면 테베한테 맨날 맞고사는 플라타이아이인 이렇게 셋만 남았다. 날이 밝고 이 사실을 안 스파르타 사령관 파우사니아스는 어이가 없어서 아테네에 사자를 보내 우리끼리라도 싸우다 죽자고 하고, 그렇게 싸운 결과 페르시아 사령관 마르도니우스가 왠지 앞에서 싸우다 죽어버리면서;; 전쟁에 이겼다.
- ↑ 이 페르시아 내전에서 그리스 용병으로 참여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의 제자로도 유명한 크세노폰이다. 그가 남긴 전쟁 회고록이 바로 아나바시스.
- ↑ 무려 소크라테스가 가장 아끼던 제자중 하나였다!!!!
- ↑ 니키아스는 당시 아테네에서 가장 부유한 재산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문학에도 많은 후원을 하여 시민들에게 유력한 정치가로 여겨졌다. 여러 승리를 기록하면서 (어렵고 긴 임무를 기피한 경향에 힘입어) 패배한 일도 없었고 겸손한 태도가 시민들의 호감을 샀다.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니키아스 스스로가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정군 지휘관의 한 명으로 억지로 앉혀지게 되었다. 시칠리아에 파견된 장군 세 명 중 알키비아데스는 도주하고 라마코스는 전사하였는데 유일하게 남은 장군인 니키아스는 애초에 반대하던 원정이라 열의도 없었고 마침 그의 건강마저 좋지않았다. 특유의 지나친 신중함까지 더해 원정군은 소극적으로 움직였고 이는 재앙이 되었다.
- ↑ 게다가 시라쿠사 인들은 스파르타 출신의 도리아인들이었으므로 스파르타의 지원을 매우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 ↑ 스파르타의 초기 지원이 적극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스파르타와 코린토스 각 2척으로 구성된 함대에 스파르타 완전시민 병사는 한 명도 없었고 지휘관 귈립포스조차 모타케스(열등자) 신분이었다.
- ↑ 전사자 시신 수습하는 것을 중히 여기는 풍조에다 때마침 있었던 제전 기간이 전사자들을 상기시켜 시민들을 격분시켰다.
- ↑ 마지막 전투에서 알키비아데스가 잠시 등장해 해군의 위치가 안좋다고 조언하며 자신을 전시 작전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으나 사령관들은 거부하였다
- ↑ 스파르타의 인구 구성원은 1만에서 2만 사이의 전사 계급인 스파르타 시민과 그들을 먹여 살리는 수십만의 노예신분인 헬롯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테베의 패배로 인해 이 시민의 절반 이상이 죽고 수십만의 헬롯이 해방되어 독립되었기 때문에 스파르타의 이 사회 구조가 근본적으로 파괴된 것이다. 이 이후로 스파르타는 다시는 그리스 내에서의 패권을 경쟁하지 못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