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면전쟁

upload.JPG
양면전쟁의 정석인 제1차 세계대전의 유럽 전선.

1 개념

양면전쟁은 전쟁의 한 당사국이 각기 다른 2개 이상의 전선을 형성하여 전쟁에 돌입하거나 대치하는 상황을 일컫는 말로, 엄밀하게 말해 학술적인 용어는 아니다. 전선이 2개 이상으로 갈라지기 때문에 전력을 선택과 집중하기 어려우며, 상대방 하나를 쓰러트린다 해도 곧바로 다른 상대를 치기가 어려운 상황이 자주 벌어지기 때문에 총력전 양상에서 불리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많은 양면전쟁이 있었지만, 유명한 예라면 위의 지도에 나와있듯이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 및 동맹국, 추축국 진영이나, 1500년대 카를 5세 치하의 신성로마제국스페인에 둘러싸인 프랑스, 발칸 반도아바르족, 슬라브족, 불가리아와 동방 지역에서 사산조 페르시아, 이슬람 제국, 셀주크 투르크 등의 세력들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던 동로마 제국, 토번한반도에서 동시다발적인 군사 작전을 펼쳤던 당나라, 요나라서하와 맞서던 북송 등이 있다.

사실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대표적인(?) 사례는 독일보다는 2차 세계대전 때 태평양과 유럽에서 동시에 두 개의 대전쟁을 수행했던 미국이라고 할 수 있는데, 두 전선이 모두 본토 밖의 동맹국 및 식민지에 펼쳐진데다가 미국의 국력이 워낙 초월적이어서 이러한 양면전쟁을 수행하는데 있어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잘 의식하지 못하게 된다.

2:2 팀플전 때 헌터에서 양쪽 스타팅에 상대가 걸리고 동맹이 동떨어진 스타팅에 걸린 걸 연상하면 이해하기 쉽다 게다가 그게 구석이라면?살려줘

2 예시

2.1 독일

이것 때문에 두 번이나 망했다.

근현대 양면전쟁계의 끝판왕. 지정학적으로도 중유럽에 위치하고 있어 서쪽의 프랑스와 동쪽의 러시아가 협력하는 경우 항시 양면전쟁을 겪어왔다. 거기에 독일 통일 이전에는 합스부르크 왕조 치하의 오스트리아와도 사이가 썩 좋지 않았기 때문에 프로이센 왕국~제2제국 기간동안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에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러시아 연합에 포위되어 3면전쟁을 치러야 했고, 너무나도 유명한 1차 세계대전의 경우 비스마르크가 정립했던 삼국동맹[1]빌헬름 2세에 의해 깨진 이후 삼국협상에 의해 러시아와 프랑스가 독일을 동서로 포위하는 형세가 전개되자 전쟁 시 이를 타개하기 위해 슐리펜 계획까지 수립해놓았던 적도 있었다. 물론 실전에선 서부전선묶여버려서 말아먹게 되지만.

이 경험 때문에 제3제국폴란드침공하기 전에 소련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어 동쪽의 전선을 미연에 방지하고 폴란드를 양분하고 나서야 프랑스 침공을 단행하여 프랑스를 사실상 무력화시키고 영국과 대치하기에 이르렀지만... 히틀러의 판단착오로 인해 영국을 확실하게 마무리짓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을 돕겠다고 대미 선전포고에 소련을 치는 무리수를 일으키며 그토록 피하고 싶어하던 양면전쟁을 스스로가 이끌어내며 패망의 지름길을 열게 된다.

2.2 프랑스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프랑스가 양면전쟁의 상황이었다.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연합군을 격파 한 후 군대를 돌려 스페인을 점령, 하지만 정부는 뒤집어 엎고 정규군은 격파했어도 게릴라와의 비정규전에 빠져버린데다가 포르투갈에 주둔한 영국군과도 싸워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대륙봉쇄령을 어긴 러시아를 응징하기 위해 러시아 원정을 벌이다가 망했다.

2.3 영국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유럽과 아시아 전역에서 동시에 병력을 파견 하였다. 태평양 전쟁 개전 직후 싱가폴, 홍콩, 말레이시아 등이 함락되고 말레이 해전실론 해전에서 동양함대가 궤멸한 이후 본토 방위와 북아프라카 전선에 집중하고 태평양은 호주군과 뉴질랜드군에게 맡기기도 하였지만 버마 전선을 중심으로한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일본군과 싸워 승리하였고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항모 기동부대를 운용하기도 하였다. 물론 최종 승리하기는 하였지만 유럽과 태평양 양면에서 미국의 지원 없이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하였다.

2.4 동로마 제국

근현대의 양면전쟁은 독일이 거의 다 겪었다고 한다면, 중세의 양면전쟁은 동로마 제국의 전공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동서 분열 이전에도 로마 제국은 북쪽의 게르만족과 동방의 파르티아, 사산조 페르시아와 양쪽에서 전쟁 상태에 있었는데 동·서 분리 이후에는 동로마가 동방 전선을 전부 떠맡게 되어버려서 서로마가 게르만족과 투쟁하는 사이 동로마는 다뉴브 강 너머의 훈족, 고트족과 전통의 라이벌인 사산 왕조와의 양면전쟁을 계속하게 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서로마보다는 그래도 동로마가 견실한 편이어서 2개의 전선을 가지고도 오히려 버텨내고 일시적이나마 지중해를 다시금 로마의 호수로 만들기까지 했다는 것.

330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한 이래, 동로마의 군사 구도는 다뉴브 강을 경계로 하는 유럽 전선과 폰투스, 오리엔트를 중심으로 사산조 페르시아와 맞서고 있던 동방 전선의 두 전선이 기본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형태였다. 제국의 초창기인 4세기에는 유럽 전선에서는 주로 고트족과 훈족을 상대하고 동방 전선은 페르시아와 대치하는 구도가 이어졌는데, 337년에는 페르시아의 샤푸르 2세아르메니아메소포타미아의 실지 회복을 위해 침입하여 30여년 간 전쟁을 벌였고, 율리아누스가 일시적으로나마 크테시폰으로 쳐들어가는 등 승세를 잡았다가 율리아누스의 급사로 인해 결국 페르시아로부터 탈취한 영토를 다시 토해내고 아르메니아를 페르시아의 세력권으로 넘겨주는 협약을 맺어야만 했다. 동방 전선은 이렇게 일단락되었으나, 376년 훈족을 피해 제국 영역으로 정착 허가를 받아 다뉴브 강을 넘어온 고트족과 전쟁에 돌입하게 되어 하드리아노폴리스에서 완패당하고 만다. 이때도 제국의 주력군은 페르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동방 전선에 묶여있어야만 했고 발렌스 황제도 서로마 측에 지원을 요청해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졌었다. 결국 고트족의 정착을 인정하고 그들을 동맹 상대로 대우해줘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5세기는 유럽 전선의 상대방이 바뀌었는데, 바로 아틸라의 치세에 접어든 훈족이 판노니아에 둥지를 튼 시점이었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아틸라가 제안한 콘스탄티아 평화 조약을 무조건 수용하여 훈족 출신의 도망자들을 송환하고 훈족에 대한 공납을 늘리는 등의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했지만 이를 지키지 않게 되자 훈족은 441년과 447년 두 차례의 발칸 침공을 단행하여 나이수스, 사르디카 등 주요 도시들이 함락당하고 콘스탄티노플 인근 테살리아까지 진격해 내려온다. 다행스럽게도 훈족이 서로마로 타깃을 바꾸는 덕에 아직 요새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콘스탄티노플이 공격당하지는 않았다. 이 당시 동방 전선은 페르시아의 내분 및 에프탈과의 대결로 인해 큰 전쟁이 벌어지진 않았다.

6세기 초에는 내분에서 어느 정도 회복한 사산조 페르시아의 카바드 1세가 침공해옴에 따라 다시금 지루한 공방전을 벌였다. 영토를 빼앗기지는 않았지만 페르시아에 바치는 공납금을 올려주는 대가로 532년 휴전 협정을 맺는다. 동방 전선에서 한숨 돌린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영도 하에 제국의 고토 수복을 위해 우선 북아프리카의 반달족을 정벌하기로 하여, 534년 벨리사리우스를 파견해 반달 왕국을 멸망시키는데 성공한다. 북아프리카 수복 직후 벨리사리우스는 이탈리아로 파견되어 시칠리아교두보로 삼아 536년 로마 시를 탈환하고 고트족의 역공을 막아낸 뒤, 540년 동고트 왕국의 수도였던 라벤나에 입성하는 전과를 올린다. 그러나 이 때 동방 전선에서 내정을 안정시킨 페르시아의 호스로 1세가 휴전을 깨고 로마를 침공하면서 니비시스, 안티오크 등이 공격당하자, 유스티니아누스는 고트 전쟁을 어느 정도 정리한 벨리사리우스를 동방 전선을 전임시켜 페르시아를 상대하게 했다. 이번에도 동방 전선은 어느 한 쪽이 우세를 점하지 못하는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545년 다시 동로마 측이 공납금을 올려서 바치기로 하고 다시 휴전에 돌입한다. 제국이 동방을 신경쓰는 동안 이탈리아에선 토틸라의 지휘 하에 다시 고트족들이 재기하는데 성공하여, 541년 벨리사리우스가 고트 전선에 재투입되었을 땐 남이탈리아를 제외한 이탈리아 반도가 다시 동고트 왕국의 세력으로 복귀한 상태였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의심을 받아 제대로 된 지원조차 받지 못한 벨리사리우스는 자진하여 이탈리아 전선에서 물러나고, 대신 환관 나르세스가 후임으로 고트 전쟁을 맡아 552년 타기나이 전투에서 토틸라를 패사시키고 이듬해 몬스 락타리우스 전투에서 동고트 왕국을 멸망시키는데 성공한다. 한편 동방 전선에서 다시 충돌이 벌어져, 라지카를 두고 549년 동로마와 페르시아 간 전쟁이 재개되어 또다시 10여년 간 싸우다 다시 10년 정도 휴전기를 거쳐 571년 아르메니아에서의 반란으로 다시 전쟁을 시작한 후에도 승부를 내지 못하다가, 페르시아 내부의 분란으로 동로마로 피신한 호스로 2세마우리키우스가 후원하여 제위에 앉힘으로서 591년에 가서야 전황이 마무리되었다.

2.5 당나라

건국때부터 계속 양면전쟁에 시달렸다. 건국 초기에는 당태종이 어떻게든 해결해줘서 분할될뻔한 중국을 다시 합치고, 이후 북쪽의 돌궐, 동쪽의 고구려와 전쟁을 하게 되는데, 어떻게든 돌궐을 패퇴시키고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킨후 한반도를 먹으려다 신라와 맞붙게 된다. 당이 신라에 보낸 편지도 그렇고 원래 국력으로 따지면 당이 신라를 압살하는게 당연하지만 타이밍 좋게 토번이 서쪽에서 내려오고, 매소성, 기벌포에서 연달아 신라에 깨지면서 당은 한반도에서 철수하게 된다. 이어 토번을 신경쓰는 와중에 돌궐이 다시 강성해지고, 토번, 돌궐에 신경쓰다가 옛 고구려 지역에 발해가 건국되서 등주를 점령당하는 등 이래저래 시달리고, 초기에는 안정적인 정치와 강력한 군사력 및 적절한 외교수완을 발휘해 다른 국가들을 압도했지만 당현종 말기에 안록산의 난을 시작으로 곳곳에 반란이 일어나면서 내정도 급격히 악화된다. 곽자의가 나서서 위기 상황을 해결해주는 등 어떻게든 버티지만 내부에서 계속 일어나는 반란, 이민족들의 계속된 침공에 시달리다가 결국 멸망하고 5대10국시대가 열리게 된다.

2.6 북송

동북쪽에는 요나라가, 서북쪽에는 서하가 각각 송을 괴롭히는 형세였다. 그렇다고 요와 서하가 협공을 하던 건 아니고, 이들 셋이 상호견제하는 구도에서 주로 만만한 군사력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약탈할 수 있는 재화가 풍족한 북송을 털어댄 것. 애초에 구도 자체가 북송에게 불리했었는데, 후진석경당이 요의 도움을 받아 왕위를 찬탈하고 나서 그 대가로 동북방에서 제대로 방어할 수 있는 요혜지 연운 16주를 요에게 넘긴 터라 방어에 애로사항이 있어 요와의 싸움에서 항시 불리함을 안고 싸워야 했고,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서북쪽 방비에도 도미노처럼 영향을 끼치며 서하가 흥기할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거기에 송군 자체도 전투력이 별로여서, 요에게는 하북의 전주에서 전연의 맹을 맺어 요를 사실상[2] 형의 나라로 받들고 비단과 은을 매년 일정량 이상 상납해야 했고, 서하와는 삼천구 전투, 호수천 전투에서 제대로 쳐발리고 난 다음 요의 공격을 우려하여 서하에게도 비단과 은, 차를 상납하는 신세가 된다.[3]

2.7 금나라

양면전쟁의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최악의 선택을 한 대표적인 국가.
건국 초기에는 요를 단숨에 밀고 송도 남쪽으로 밀어내면서 잘나갔는데, 몽골이 떠오르면서 상황이 이상해졌다. 남쪽에 남송이 건재한 상황에서 북쪽에 몽골에게 밀리기 시작했는데... 금의 황제 금선종이 한 선택은 "송을 공격한다." (...) 송을 정벌해 힘을 키워 그 힘으로 몽골을 막자는 계획이었지만, 이전에 상황이 좋았을 때도 밀지 못했던 남송이 몽골에게 밀리는 안좋은 상황이었던 당시 금에게 밀릴 리가 없었고 몽골에게 밀리는 상황만 계속됐다. 그 다음 황제인 애종이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남송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고 "우리 망하면 니들도 망해!"라며 대 몽골 동맹을 제의했지만, 그동안 한 짓이 있으니 남송이 금을 믿을리가... 결국 남송과 몽골의 양면공격으로 금은 멸망하고 만다.

2.8 러시아

[1]
서부군관구 관할 지역: 스웨덴전선, 폴란드전선, 우크라전선, 북해전선, 발트전선.
남부군관구 관할 지역: 터키전선
중부군관구 관할 지역: 북부전선. 중앙아시아 지역 및 차고스 제도에 기지를 둔 미국 공군 폭격기대와 북극해로 침투하는 폭격기 및 잠수함대의 방어.
동부군관구 관할 지역: 태평양전선(일본 자위대, 미군, 한국군), 미국 알래스카 전선
전선이 몇개야 어우야 러시아가 핵에 집중하는 이유를 잘 알 수 있다.

2.9 미국

이쪽은 좀 특이한 케이스인데, 양면전쟁을 하고도 이긴 적 있다. 일단 미서전쟁에서 쿠바를 공격하는 도중에 필리핀도 같이 털어버렸고, 2차 세계대전은 하도 구도가 혼돈스러워서 너도나도 양면전쟁이나 다름없던 상황이었으나 영국은 초반에 일본에게 말레이지아와 인도양에서 지고선 버마까지 내주고 방어전으로 일관하다가 유럽에서 승기를 잡은 이후 전쟁 말미에 동남아시아 전선을 중심으로 반격 하였고 소련 역시 일본과 전쟁 극후반까지 맞붙지 않았기에 연합군에서 가장 제대로 양면전쟁을 펼친 것은 미국이다.

당시 미국은 동쪽에는 북아프리카 전선, 서쪽에는 태평양 전선이 펼쳐져 있었는데 두 전선이 각각 필요한게 정 반대라는[4] 점이 있었으나 양측 전선에서 필요한 물자들을 감당해내고 다른 나라에 랜드리스까지 해주면서 전쟁은 돈으로 하는거다는 말을 그대로 실현시켰다.[5]

그러나 테러와의 전쟁에서는 네오콘이 장악한 행정부 수뇌부들이 전쟁 계획을 잘못 짠 결과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라크 전쟁이라는 양면전선에서 희생은 늘어나고 돈은 쏟아붓는데 전쟁이 끝나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고 결국 이라크는 미군 철수 후 ISIL에 의해 헬게이트가 열리고 있고 아프가니스탄 전쟁도 사실상 미국의 패배로 종결될 가능성이 크다. 대규모 전쟁에서는 이기는데 왜... 전쟁의 목적과 수행방식이 중요한 이유다.

2.10 일본 제국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의 전선을 크게 나누면 중일전쟁으로 인한 중국 전선과 진주만 공습 이후의 태평양 전선으로 나뉘었다. 태평양 전선도 세부적으로 보면 미드웨이-마리아나 제도-오키나와로 이어지는 중부 태평양의 해상 루트, 솔로몬 제도-뉴기니-인도네시아-필리핀으로 이어지는 서남 태평양의 루트, 버마-인도차이나 전선 등을 구축해서 말 그대로 사방팔방에 전선을 확대한 꼴이었다. 그나마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으로 인해 소련-만주 전선 만은 직접적인 교전이 벌어지지 않았지만 1945년 8월 소련의 만주 작전으로 인해 이곳 또한 공격이 가해졌다. 이정도면 양면전쟁이 아니라 십면전쟁 수준이다. 당시 일본이란 국가가 아무래도 인구가 많은데다 군국주의 체제로 인해 정말 군대의 규모가 거대하긴 했다. 물론 더 거대한 건 그보다 더 많은 인구를 가진 중국이었고,,

2.11 고구려

6세기 중반에 이르러 고구려는 큰 위기에 봉착하는데, 고구려 국경 서북쪽, 초원지역에서 돌궐이 일어나 고구려의 서북쪽 국경을 압박하였고, 이에 고구려가 돌궐에 신경 쓴 사이 국경 남쪽에선 성왕백제진흥왕의 신라가 합세하여 공격을 하는 등 양면전쟁의 수렁에 빠졌다가 이후 신라와 협상하여 신라의 영토를 인정해주고 남쪽 전선의 안정을 꾀하면서 북쪽 국경의 안정화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2.12 후백제

후백제의 경우는 특이하게도 3개의 전선 중 두 전선이 태봉과 맞닿아 있었다. 실질적으로 신라가 후백제와 상대할 전력이 되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후백제는 태봉~고려와의 양면전쟁 상황에서도 오히려 신라를 침공해 헤집어놓고 고려군의 주력을 팔공산 전투에서 박살을 내거나 홍주·운주 지역을 공략하는 등 불리한 상황에서도 꽤나 선전한 편. 더구나 왕건이 점령했던 나주 일대는 영산강 유역의 농산물과 해산물, 소금 등 자원이 풍족한 지대인데다가 영산강 수로를 활용한 교역·대 중국 외교 및 호남 지역을 수군으로 공략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는 점에서 후백제의 선전이 더욱 빛난다. 전쟁과 역사, 한국고대전쟁사의 저자인 임용한 박사는 이를 두고 "후백제는 불구의 몸으로 온전한 고려와 경쟁했다"고 평했다.

3 예방전쟁

양면전쟁 상황을 만들어놓지 않기 위해 예방전쟁을 통해 교통정리를 시작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3.1 예시

역시 이 경우에도 빠질 수 없는 것이 독일(프로이센)인데, 독일 통일의 궁극적인 방해자인 프랑스를 치기 전 통일의 주도권을 놓고 겨루던 오스트리아를 선제공격하여[6]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꺾어놓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통해 궁극적인 적, 프랑스를 굴복시키고 수도 파리까지 점령하는 쾌거를 이루며 베르사유 궁전에서 빌헬름 1세의 독일제국 황제 대관식까지 가지게 된다.

한국의 경우 양면전쟁을 당하기보다 이를 막기 위한 북방민족의 예방전쟁의 주요 희생 대상이 된 적이 많다. 발해의 멸망은 요나라가 중원 진출 전 후방의 공격을 방지하기 위해 공격을 감행하여 그것이 먹혀든 결과였으며 여요전쟁의 경우도 고려와 북송 양쪽에서 협공당하는 것을 꺼리던 요나라가 예방 차원에서 고려를 침공했었고, 후대인 여몽전쟁 또한 일정 측면에서 예방전쟁적인 면이 있다. 조선 때에도 명나라와 조선의 연계를 끊기 위해 후금정묘호란, 병자호란을 통해 조선을 길들여놓고 중원을 침공하기 전 물자를 보급받는 속국화 작업을 진행한 바 있다.
  1.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간 동맹. 당시 황제가 집정하던 국가들이라 3명의 황제들 간 동맹이란 의미로 삼제동맹이란 표현이 붙기도 한다.
  2. 송이 형의나라이긴 했지만 동생인 요에게 공물을 바쳤다.
  3. 대신 요와는 다르게 명목상 서하가 신하국이 되었다.
  4. 태평양 쪽에는 주로 해군의 주력이 작전을 수행했고 육군의 주력은 주로 유럽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5. 애초에 양측의 상대였던 나치와 일제부터 양면전쟁 중이었으니 미국의 양면전쟁은 별다른 패널티가 아닐 수 있다.
  6. 다만 선전포고 자체는 오스트리아가 먼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