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屬州
屬州
Provincia
1.1 개요
속주(屬州)란 일반적으로 어느 나라에 속해있는 주를 말한다. 하지만 이 표현은 주로 고대 로마를 대상으로 쓰인다.[1]
고대 로마에서 속주(라틴어: Provincia)는 296년 사두 정치 체제 이전까지 본국 이탈리아 바깥의 가장 큰 행정 단위를 말한다. provincia란 원래 영토적 의미와 무관하게 정무관의 임무 혹은 활동 범위를 뜻했으며, 로마가 최초로 점령한 해외 영토인 시칠리아 서부는 그런 의미에서 행정관의 처리 대상이었다. 그러나 후에 이는 이탈리아 밖의 로마 지배 지역이라는 지리적 의미를 갖게 된다
지금도 provincia는 라틴계 국가인 이탈리아, 스페인과 라틴아메리카 등지의 기초행정구역의 명칭이며 캐나다의 행정구역인 province는 provincia의 프랑스어/영어식 변형이다(각각 프로방스/프로빈스 로 발음한다). 또 한국의 행정구역인 도나 중국의 성을 영어로 번역할때도 province라고 한다
1.2 고대 로마 공화국 시대 속주
- 시켈리아(시칠리아) 속주
-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 울테리오르 속주
- 일리리쿰 속주
- 아프리카 프로콘술라리스 속주
- 아시아 속주
-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
- 비티니아 속주
- 시리아 속주
- 갈리아 코마타 속주(임시)
- 모이시아 속주
1.3 고대 로마 제정 시대 속주(디오클레티아누스 이전)
♠표시가 있는 속주는 원로원 속주[2]이고, 없으면 황제 속주(아이깁투스의 경우 황제 직할령)이다. 위 지도에서 분홍색 지역이 원로원 속주, 연두색 지역이 황제 속주(아이깁투스의 경우 황제 직할령)이다.
순서는 12시 방향부터 시계방향이다.
1.3.1 브리타니아 지역
오늘날의 영국. 정확히 말하면 잉글랜드와 웨일스. 현재까지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가르는 국경선인 하드리아누스 방벽이 세워져있다. 하지만 브리튼 섬 전역과 아일랜드를 점령하려는 시도가 없었던건 아니다. 모두 다 실패하거나 운이없어 중단되거나 흐지부지 되거나.
- 브리타니아 수페리오르 속주[3] :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원정 도중 처음으로 브리튼 섬에 상륙한 지역이다. 윈스턴 처칠은 대영제국이 카이사르가 영국에 발 놓을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을
워낙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이니 만큼 묻어가고 싶어남겼지만, 실제 속주화 된 건 약 1세기 뒤 클라우디우스 황제에 의해서다. 주도는 론디니움(현 영국 런던). 한편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에는 잉글랜드 북부와 스코틀랜드 남부까지 로마제국의 영토로 만드는데 성공했으며, 이 추가된 영토는 훗날 서기 197년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때 브리타니아 인페리오르로 분화되었다.
- 브리타니아 인페리오르 속주[4] : 브리튼 섬 중 위에서 언급한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정복된 영토. 웨일스, 잉글랜드 북부, 스코틀랜드 남부를 포함하며 세베루스 황제에 의해 브리타니아 속주에서 분화하였다. 주도는 에부라쿰(현 영국 요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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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도니아 속주: 현 스코틀랜드 일대. 남부를 넘어 스코틀랜드 전역을 정복하기 위해 도미티아누스 황제부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까지 여러 황제가 나섰으나, 실패하거나 정복 완료 전 죽어서 흐지부지 되었다.[5]
1.3.2 갈리아 지역
서부 게르마니아와 함께 로마의 우주방어 지역 1[6]. 나르보넨시스를 제외하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정복되었다. 또한 프랑스 애니메이션 아스테릭스의 주 배경이기도 하다. 더이상 설명이 필요한지?
-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속주[8] : 현 프랑스 중북부 대부분 지방이며 갈리아의 속주 중 가장 넓다.
아직 듣보잡 부족마을이나 다름없던파리도 포함되어 있으며 주도는 루그두눔(현 프랑스 리옹).
-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9][10] ♠ : 현 프랑스 남부. 로마 정복 이전부터 그리스의 식민도시국가가 있었으며 그들 중 현대 도시로 남아 있는 곳으로 마르세유가 있다. 갈리아 지역의 속주 중 가장 역사가 깊으며 이 지역을 현재 프로방스라 하는데 이는 로마 속주를 뜻하는 말 프로빙키아에서 왔다. 주도는
이름답게나르보 마르티우스(현 프랑스 나르본).[11] 오현제 중 네 번째인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배출한 속주이다.
1.3.3 서부 게르마니아
갈리아 지역과 함께 라인강을 주축으로 한 우주방어 지역 2. 다만 게르마니아 서부는 티베리우스 황제 이후에야 국경선화 된다. 이유는 아우구스투스는 라인강이 아닌 엘베강을 로마의 국경선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존의 라인강은 도나우강에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다고 보았다. 라인강과 도나우강 방벽은 길이도 길지만 두 강의 사이에 위치한 알프스로 인해 하나의 통합된 국경선으로서의 관리가 불가능하였다. 만일 엘베강과 도나우강으로 국경을 확정짓는다면 국경선의 길이는 수백킬로미터 가까이 좁혀질 것이며, 두 강 사이에는 알프스와 같은 지형적 장애물이 없으므로 편리한 교통을 통한 보급로의 확보로 인해 한명의 총사령관이 하나의 국경처럼 통합 관리할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이때문에 엘베강과 라인강 사이의 영토를 정복하기 위해 그의 일족들인 두르수스와 티베리우스를 파견하였는데, 이는 그 지역을 정복하는 것이 매우 중대하다고 판단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두르수스는 로마선단을 이끌고 북해를 타고 북상 지금의 덴마크 일대인 엘베강 근처에 내려 공격할 정도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낙마사고로 죽게 된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상당한 영토를 정복하는데 성공하였고, 이미 노년이 된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의 후계구도를 구축하기 위해 그를 로마로 소환한다. 그 뒤 티베리우스가 로도스 섬으로 잠적해버리는 등의 소동을 겪게 되고 아우구스투스는 그 와중 우선은 점령한 지역의 안정화갈리아가 그랬듯이를 시도해보려 하였다. 지역 안정화에 적합한 인재로는 유능한 행정가가 적임으로 보였고,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이에 재능을 보인 바루스를 총독으로 부임시켰는데 이는 인사상의 큰 실책이었다. 바루스는 그 지역의 통치를 맡아 동방에서 하던 대로 했었으나 이러한 로마식 행정은 게르만족에게는 꽤 불편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졌기에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3개 군단과 함께 운명을 달리하였다.
그로서 아우구스투스는 라인강 동쪽의 점령지를 모두 상실하게 된다. 3개 군단은 대군이라 보기는 어려운 병력으로 해당 군단이 소멸했다고 점령지를 모두 상실하게 된 것은 이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첫째로 그 군대에는 바루스를 비롯 그 지역을 통치하는 관료들을 대거 동원했었는데 군대가 소멸하면서 점령지의 통치집단이 증발해 버렸다. 둘째로 해당 전과에 고무된 게르만 족이 대규모로 봉기하여 군단기지를 공격하였고, 3개 군단이 소멸된 직후의 공백으로 인해 그 기지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여 그곳이 모두 점령당한다.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효율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점령지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만 주둔시켜 놓은 것에 기인한다. 셋째로 아우구스투스가 벌인 지나친 팽창 정책으로 인해 병력들이 지리적으로 멀리 배치된 데에 최소한으로 감축한 군단수, 또한 임페리움을 황제가 독점하는 새로운 관료 시스템으로 인해 삼개 군단의 소멸을 메울수 있는 병력이 즉시 동원되어질 수가 없었다. 또한 바루스의 실패는 아우구스투스의 고지식한 점령 방식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와는 달리 공화정 당시 로마는 점령지를 동맹시로 두고 부족들이 통치하면 뒤에서 파트리아 역할만 하는 간접통치를 선호하였으며, 공화정 인물이었던 카이사르 또한 점령지의 부족들에게 통치를 맡기되 이들에게 씨족 부여, 원로원 의석 부여, 그리고 전쟁에서 차출시켜 같이 싸우게 하여 공동체 의식을 고취시키면서 자발적으로 로마의 패권을 인정하는 전통적인 로마의 점령 방식을 사용하였으며, 이것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증거로서 카이사르가 내전을 치르면서 갈리아에 있는 모든 주둔군을 철수시켰으나 갈리아 부족들은 갈리아에 로마군이 한명도 없음에도 불구, 그대로 로마에 복속하였으며 카이사르에게 군대까지 제공해주었다.
반면 아우구스투스는 점령지를 로마가 직접 통치하는 제국주의적 방법을 사용하였고 이러한 변화된 통치방식은 점령지의 기존 통치집단의 반발을 낳기에 기존 공화정 로마와 같은 빠른 정복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후 황제들이 시도한 제국주의적 정복에서도 이러한 문제가 반복되어 나오는데 가령 브리타니아 정복같은 것은 반세기에 가까운 점령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다키아 정복은 성공하였으나 이는 트라야누스가 통치집단과 지배 민족을 소멸함으로서 가능한 것이었으며 파르티아 정복은 군사적으로는 쳐부수는데 성공하였으나 대규모 반발에 직면하여 점령을 포기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그 지역은 상실하게 되었고, 이에 대해 아우구스투스는 심하게 자책하긴 하였으나 엘베-도나우 리메스의 구축은 반드시 해야한다고 보았는지 복귀한 티베리우스를 다시 그 지역에 파견하여 재정복을 꾀한다.
그러나 고령이었던 아우구스투스는 곧 노환으로 인해 죽게 되고 뒤이어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는 그의 후임인 총사령관 게르마니쿠스에게 그 지역의 정복을 맡긴다. 게르마니쿠스는 군사적 재능을 보여 연승을 거두나 티베리우스는 그를 로마로 소환하고 병력을 모두 철수시킴으로서 엘베강을 국경선으로 삼고자 한 아우구스투스의 계획을 백지화시킨다. 결국 엘베강과 도나우강에 이르는 리메스의 구축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아우구스투스는 역대 황제 중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황제였으며, 그가 확립한 시리아와 도나우 강의 국경선은 수백년에 걸쳐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속주[12] : 라인강 이서(以西)지역 및 슈바르츠발트 숲[13]을 포함한다. 수페리오르는 라인강 상류, 고지대(Upper)의 게르마니아란 뜻이다. 고지 독일어란 말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듯. 로마 멸망 이후에도 저지 게르마니아 지역과 함께 유럽 역사의 중심이 되어왔다. 현재 프랑스 알자스, 로렌과 스위스 북부 및 독일 라인란트-팔츠,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이며 스트라스부르, 프랑크푸르트, 슈투트가르트 등 유럽 배낭여행족들에게 인기 많은 도시가 포진해있다는 점도 윗동네 고지 게르마니아와 닮았다. 주도는 모곤티아쿰(현 독일 마인츠).
-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속주 :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속주처럼 라인강 이서(以西) 지역. 여기서 인페리오르는 저지
이 저지#s-4가 아니고란 뜻인데 저지 독일어 처럼 저지대, 강 하류를 뜻한다. 즉 라인강 하류 저지대 지방의 속주를 말하며 현재 네덜란드 북부, 독일 북서부(니더작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헤센 주)에 있다. 주도는쓸데 없이 이름만 더럽게 긴콜로니아 클라우디아 아라 아그리피넨시움(현 독일 쾰른). 사실 쾰른의 어원 또한 식민지를 뜻하는 라틴어 콜로니아에서 왔으며 식민지를 뜻하는 영어단어김성큰콜로니와 어원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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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지아 속주: 북해 연안의 네덜란드, 독일 북부, 덴마크 유틀란트 반도 남부에 걸친 속주이고 주도는 브레멘이며 최대도시는 함부르크... 는 아니고 아우구스투스의 게르마니아 정벌시 가장 먼저 차지한 지역.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파견된 드루수스는 라인강 유역을 서서히 국경선화 시켰듯이 엠스 강, 베저 강, 엘베 강 순으로 국경선화 시킬 계획이었다고. 그리고 프리지아 지역은 이들이 모두 모인 지역이다. 동프리슬란트라고도 한다. 개정전 로마인이야기에서는 이 지역이 포함된 로마의 지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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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러시아 속주: 엘베강과 라인강 유역 사이의 중류 지역. 주도는 베를린. 드루수스가 정벌도중 낙마해 사망한 곳이며, 오늘날의 독일 대부분의 지방이 해당된다. 만약 토이토부르크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베를린의 역사는 로마제국의 군단기지부터 출발했을 것이다. 만약에라는 대체역사 에세이에 의하면, 토이토부르크 전투가 일어나지 않고 트라야누스 시대에 이르면 로마는 엘베강을 건너 오데르강은 물론 비스와강까지 닿는다고. 뱀발로 "만약에"의 다른 챕터에서는 반대로 로마가 아메리카를 정복하는 이야기도 있다. [14]
1.3.4 알프스 산맥 지역
이탈리아 북서부와 프랑스 남동부가 맞닿은 알프스 산맥 지역이며, 면적도 가장 작고 주변에 비해 크게 유명한 지역은 많이 없는 편.
- 알페스 포이니나이 속주 : 알프스 속주 삼형제 중 가장 북쪽. 주도는 다란타시아(현 프랑스 무티에르)/옥토두룸(현 스위스 마르티니).
- 알페스 코티아이 속주 : 알프스 속주 삼형제 중 가운데. 주도는 세구시오(현 이탈리아 수사).
- 알페스 마리티마이 속주 : 알프스 속주 삼형제 중 가장 남쪽. 지중해에 면해 있으며 주도는 세메넬룸(현 프랑스 시미에즈) → 에브로두눔(현 프랑스 엥브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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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아 키살피나 속주: 현 루비콘강 이북 이탈리아 북부. 율리우스 카이사르시절에 본국 이탈리아에 합병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외친 루비콘 강은 사실 프랑스가 아니라 이 곳에 있다. 공화정 시대의 기준에 따르면 밀라노, 토리노, 베로나, 아퀼레이아[15] 등 이탈리아 북부의 많은 도시들은 이탈리아에 위치한 것이 아니다!
1.3.5 도나우 강 유역 및 중유럽 지역
로마의 기병 셔틀 1이자 우주방어 지역 3. 이 지역은 발칸반도 북부와 함께 갈리아 처럼 단시간 내 점령한게 아니라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조금씩 북상하여 도나우 강으로 경계를 고정화 한 것이다.
- 라이티아 속주 : 도나우 강 최상류 지역이며, 현 스위스, 오스트리아 서부 및 바이에른을 비롯한 독일 남부. 주도는 아우구스타 빈델리코룸(현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그러나 정작 여기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지역은
당시 있지도 않았지만 어느새 독일 제 3의 도시가 된뮌헨이다. 사실 당시 주요도시였던 레겐스부르크도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 없다고..
- 노리쿰 속주 : 서부를 제외한 오스트리아 거의 전지역을 아우르며 주도는 비루눔(현 오스트리아 촐펠트). 잘츠부르크를 비롯한 이 속주에 속한 많은 오스트리아의 도시들은 다뉴브 강을 경비하는 로마 군단의 군사주둔지 또는 군단기지로부터 출발하였다.
정작 수도 빈은 판노니아에 있다.
- 판노니아 수페리오르 속주[16] : 사실 판노니아는 오스트리아 동부, 헝가리 서부, 세르비아 북부, 크로아티아 북부, 슬로베니아 등 많은 나라를 포함하고 있었으나 이들 중 오스트리아 동부, 헝가리 서부 및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지방은 오현제 시대 이후 판노니아 수페리오르로 분화 되었으며 나머지 지방은 인페리오르 속주가 되었다. 주도는 카르눈툼(현 오스트리아 페트로넬)이며 빈, 류블랴나, 마리보르, 자그레브 등이 주요 도시이다.
- 판노니아 인페리오르 속주 : 판노니아에서 판노니아 수페리오르로 분화되고 난 뒤의 나머지 지방이며 헝가리, 크로아티아 동부, 세르비아 북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동부가 이에 속한다. 게르만족의 일파인 야지게스족과 콰디족이 이 속주 근처에서 살았다고 하며 로마인과 깊은 관계를 가졌다 한다. 주도는 아퀸쿰(현 헝가리 부다페스트)/시르미움(현 세르지아 스렘스카 미트로비차)[17]. 디오클레티아누스 및 콘스탄티누스 등 4세기 초 주요황제들의 출신지인 시르미움은 이 속주와 모이시아 속주의 경계에 있다.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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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아 속주: 현재 체코 및 슬로바키아[19] 일부 지역.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 다키아 정복과 같은 이유로 정복하려 했으나 마르쿠스 사후 콤모두스가 돌연 취소하였다. 만약 콤모두스가 취소하지 않았더라면 프라하를 로마 제국 지도에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1.3.6 발칸 반도
로마의 기병 셔틀 2이자[20] 우주방어 지역 4.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컨커러의 아틸라 캠페인 2번째 장대한 여정에 나오는 로마인 도시는 거의 다 이 곳에 있다.(나이서스-모이시아 수페리오르, 두러스-에피루스, 소피아-모이시아 인페리오르, 테살로니카-마케도니아, 아드리아노플-트라키아)
- 다키아 속주[21] : 현 루마니아[22] 서부. 주도는 울피아 트라이아나 사르미제게투사(현 루마니아 사르미체게투사). 다키아는 1세기 까지 다키아 왕국이 존재하였고 로마사에 제대로 언급된 왕 중 하나는 데케발루스가 있다. 데케발루스는 지정학적 전략적 이점을 이용해서 도미티아누스 황제와 로마군을 괴롭혔다고. 하지만 트라야누스가 본격 추진한 다키아 정벌로 인해서 GG를 친다. 3세기의 위기 때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이 속주의 전략적인 가치가 소진되었음을 깨닫고 265년경에 다키아를 포기하였다. 하지만 이미 다키아에 거주하였던 로마 시민들에게는 강제이주 대신에 거취선택의 자유를 주었다고. 이 때문에 도나우 강 이남으로 떠난 로마인도 많았지만 이에 못지않게 다키아에 남은 로마인도 많았다고 한다. 현재의 루마니아는 이들의 후손이 주축이 되었다고 하며 루마니아라는 국명 또한 로마인이라는 뜻에서 왔다고 한다. 게다가 루마니아어가 현대 이탈리아어, 프랑스어와 매우 유사하다는 점은 루마니아인이 다키아 로마인의 후손이란 것을 증명하기도 한다.
- 신(新) 다키아 속주 : 3세기 말 아우렐리아누스황제가 도나우 강 이북의 다키아를 포기하고 나서 도나우 강 이남의 여러 속주(모이시아, 트라키아, 일리리아 등)들의 자투리 땅을 모아 만든 속주. 주도는 세르디카(현 불가리아 소피아). 이후 4황제 시대에 관구 제도로 재편될 때 까지 기간도 길지 않은데다 이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도 거의 없어서 조용히 묻혔다.
- 달마티아 속주[23] : 현 크로아티아 남부 아드리아 해에 면한 지역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서부이다. 주도는 살로나이[24](현 크로아티아 솔린)이다. 이 지방의 주요 도시로는 스플리트. 보통은 두브로브니크를 생각하지만 두브로브니크는 11세기에 건설되었다.
- 모이시아 수페리오르 속주 [25] : 현 세르비아 대부분과 불가리아 서부. 주요도시로는 신기두눔(현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및 나이수스(현 세르비아 니쉬)가 있고 주도는 비미나키움(현 세르비아 코스틀라치)이다.
- 모이시아 인페리오르 속주 : 현 불가리아 대부분 지방. 라이티아-노리쿰-판노니아 수페리오르-인페리오르-모이시아 인페리오르-수페리오르로 이어지는 도나우 방위선의 최종착지이며 이 때문에 도나우강을 중심으로 오이스쿠스, 실리스트라, 이글리차 등 군사기지가 집중되어있어 로마의 우주방어를 실감케 한다. 주도는 노바이(현 불가리아 스비슈토프). 주요 도시로는 세르디카(현 불가리아 소피아)가 있다.
- 트라키아 속주 : 그리스 동부 및 터키의 유럽 지역, 그리고 불가리아 남부 지방이다. 주도는
콘스탄티노플[26]헬라클리아 페린투스(현 터키 마르마라 에레을리시), 필리포폴리스(현 불가리아 플로프디브)이다. 미드를 통해 우리들이 너무나도 잘 아는 스파르타쿠스의 고향이기도 하며 스파르타쿠스 전쟁의 최종 목적지[27]이기도 하였다. 다만 스파르타쿠스가 트라키아 왕국의 왕자였다는 설은 과장된 것인데, 로마이전의 트라키아는 제대로 된 중앙집권 국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트라키아 부족장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긴 하다.
1.3.7 고대 그리스
소아시아와 함께 로마의 부유한 지역 TOP를 달리는 곳이자 로마의 돈셔틀 1. 원래 이곳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마케도니아 왕국이 있었으나 피드나 전투 이후 로마가 이 지역을 꿀꺽해버렸다.
- 아카이아 속주 ♠ : 현재 그리스 중남부 및 펠로폰네소스 반도 일대. 쉽게 말해
노땅들 지식으로 먹고 사는 학원도시아테네와상남자들의 랜드마크이자 테마파크인[28] 스파르타를 생각하면 된다. 주도는 코린트(현 그리스 코린토스). 언급 된 두 도시는 다른 도시와는 달리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아광역시자치도시로서 높은 지위를 누릴 수 있었고[29], 다른 그리스계 도시들도 로마의 관용정책의 혜택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하지만 주도 코린트가 로마의 역린을 건드려 약탈당한 경험이 있는건 함정.뭔가 미국 뉴욕 주스럽다.[30]
- 에피루스 속주 ♠ : 현재 그리스 북서부 및 알바니아 일대. 주도는 아폴로니아(현 알바니아 포야니 근교).
- 마케도니아 속주 ♠ : 현재 그리스 북부 및 마케도니아 공화국 일대. 주도는 테살로니카(현 그리스 테살로니키). 주요 도시로는 디라키움(현 알바니아 두러스) 등. 알렉산드로스 사후 안티고노스 왕국이 들어섰지만 피드나 전투 이후 그리스 지역에서 가장 먼저 로마에 합병당했다.
1.3.8 크리미아 및 카프카스 (흑해 연안)
이 곳은 로마가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지역은 아니지만, 이 지역의 동맹 왕국들은 로마와 매우 밀접한 외교적 관계를 가졌다. 이곳에서도 로마 시민권을 받을 수 있는 등, 로마의 시스템은 유지되었다고 보는게 옳다. 게다가 일부 지도는 로마의 영역에 이 지역을 포함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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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포루스 속주: 흑해 북안의 동쪽 지역이며. 페르시아계 왕조인 보스포루스 왕조가 있었다. 왕조의 영역은 크림 반도와 케르치 해협을 포함한다.주도수도는 판티카파윰[31](현 명목상 우크라이나 영토이고 실질적 러시아 영토인 크림 공화국 케르치[32])이며 현재 이 왕국은 가끔 로마 지도에 포함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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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마티아 속주: 흑해 북안 보스포루스 속주 이북 지역이자 서쪽 지역. 주도는 르비아 포르티킨(현 우크라이나 올비야)이며 지금의 우크라이나 일대에 거주하던 이란계 민족인 사르마티아족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속주....는 아니고 사르마티아족이 거주하였던 지역을 말한다. 해안가에는 그리스계 이주민이 세운 도시국가가 있으며 이들은 로마제국과 밀접한 연관을 맺기도 하였고 로마의 산하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이들 도시국가 중 현대까지 존재한 곳으로 우크라이나 오데사, 크림 반도의 케르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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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키스 속주: 그리스 신화에서 아르고스 호가 황금양털을 찾던 신화로 유명하며 지금의 조지아 및 카프카스 일대이다. 주도는 아이아, 일다무사, 파시스(현 조지아 포티)...는 아니고, 로마가 속주화 하진 않았지만 로마 영토에 포함되어 있었다. 즉, 카파도키아 속주에 합쳐진 상태로 있었다. 또한 로마 제국에 포함되었을 때 이 지역을 라치카(Lazica)라고 불렀다. 이는 훗날 이란인들이 이 지역을 라지스탄[33]이라고 불리우는 계기가 되었다. 루쿨루스는 최초로 이곳에 당도한 로마인이었으며, 폼페이우스에 의해 로마 영토가 되었다. 자세한 건 조지아 참조.
- 아르메니아 속주[34] : 트라야누스 황제 최후의 정복이라 할 수 있는 중근동 정복 때 얻어진 영토. 고대 로마사 및 카프카스 역사에 뻔질나게 나오는 아르메니아 왕국이 있었던 곳이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 즉위 후 이곳과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스스로 포기하였고, 로마는 정복사업 보다는 내치 수성에 힘쓰게 된다. 주도는 아르메니아 아르타하타(현 아르메니아 공화국 아르타슈트). 현대의 아르메니아 공화국은 고대 아르메니아의 영역에 비하면 매우 초라한 수준이다. 어느정도냐 하면 아르메니아 왕국의 리즈시절에는 레바논 북부와 터키의 지중해에 닿은 부분까지 아르메니아 왕국의 영토였다.
1.3.9 소아시아
로마의 돈셔틀 2이자 그리스와 함께 가장 부유한 지역. 또한 기병 셔틀 3.[35][36] 이들 지방은 대부분 기원전 1세기 초반 폼페이우스에 의해 정복되거나 종속 관계를 맺었다. 고대 그리스 및 중근동 지방과 함께 사도 바울, 베드로 등 1세기 사도 및 성인들의 주 무대. 초기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37]
- 폰투스 속주 ♠ : 소아시아 북부(현 터키 아나톨리아 반도 북부). 북쪽으로 흑해에 면해 있다. 주도는 폴레모니움(현 터키 파트사). 원래 이 곳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미트리다테스 가문의 폰투스 왕국이 있었으나 기원전 2세기경 로마의 보호국 신세로 떨어지게 되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폰투스 왕 미트리다테스 6세가 세번 전쟁을 일으켰으나 모두 패하고 로마의 속주신세로 굴러 떨어졌다. 자세한 건 술라, 루쿨루스, 폼페이우스 참조.
쉽게 말해 미트리다테스가 로마한테 개겼다가 술라, 루쿨루스, 폼페이우스한테 다굴당한거다.
- 아시아 속주 ♠ : 우리가 생각하는 그 아시아는 아니고 소아시아 아나톨리아 반도 최서단 지역을 말한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대륙 이름 아시아의 유래가 이 곳에서 유래되었는데 원래 아나톨리아 반도 최서단 지역를 가리키는 말에서 그 너머의 대륙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확장된 것이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페르가몬 왕국이 있었으나 마지막 왕 아탈로스 3세가 후계자 싸움을 염려해 영토를 로마제국 한테 유증해버렸다.[39] 그 바람에 왕위 계승자 에우메네스 3세는 망했어요.
안습주도는 터키 에페수스(현 터키 셀추크). 신약성경 에베소서에 나오는 그 에베소 맞다. 또한 아시아 속주는 프리기아[40], 리디아 등 고대 아나톨리아 지방을 아우르는 지역이다.
- 갈라티아 속주 : 아나톨리아 반도 중앙에 있으며 주도는 안키라(현 터키 앙카라)이다. 신약성경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이 이 지역 교회 신자들에게 쓴 편지이며 갈라티아라는 말은 갈리아에서 나왔다. 즉 켈트족이 이주한 지역이라는 뜻인데 보통 켈트족 하면 프랑스나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떠올리지만 실상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켈트#s-2.4문서 참조. 많은 로마제국 지도에서 남쪽의 피시디아와 합병되어 있는 모습으로 나온다.
- 카파도키아 속주 : 아우구스투스 이후 다른 소아시아의 속주들 처럼 차례로 편입되었다. 현재 터키 동부 내륙지방이며 배낭관광객들에겐 기암괴석과 스타워즈 촬영현장, 그리고 열기구 타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초기 기독교 역사에 있어 중요한 곳이다. 로마제국의 박해를 피해 많은 기독교인들이 변방이나 다름없던 이곳으로 이주하였고 절벽이나 바위에 구멍의 뚫어 도시와 교회를 만들었다고 한다. 주도는 카이사레아(현 터키 카이세리).
- 콤마게네 속주[41] : 이 지역은 아나톨리아에서 가장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 산하로 가장 늦게 편입되었다. 서기 1세기 후반 까지 콤마게네 왕국이 있었고 아르메니아 왕국과 함께 파르티아와 로마 사이에 있어 아슬아슬한 줄타기 외교로 버텼다. 하지만 서기 72년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의해 점령되었다. 주도는 사모사타(현 터키 삼사트)이며 현재 이 도시는 터키의 수자원 무기화를 위한 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었기 때문에 근처에 재건되었다.
- 리키아 에트 팜필리아 속주 : 리키아는 전설상으로는 그리스 신화의 벨레로폰이 이곳의 왕을 지냈다고 하며 트로이 전쟁 때에는 트로이 편을 들었다 한다. 기나긴 페르시아의 점령 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 지역을 정복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알렉산드로스의 후계국 중 셀레우코스 왕조에 속하게 되었으며 기원전 89년에 폼페이우스에 의해 로마로 편입되었다. 또한 팜필리아는 ‘모든 백성’, ‘여러 족속’이란 뜻이 있으며 도리아의 3부족 중 하나인 팜필리(Pamphyli)에서 파생된 것으로 바다 민족이 도래하였을 때 팜필리아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리키아와 많은 역사를 공유하였으며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리키아와 통합되었다. 이 통합 속주의 주도는 아탈리아(현 터키 안탈리아)이다.
- 킬리키아 속주 : 아나톨리아 반도 남동부에 있으며 키프로스와 마주보고 있다. 로마제국 점령 전에는 이수스 전투가 발생된 지역으로 유명하였다. 이 지역을 비롯해 리키아, 팜필리아 등 아나톨리아 남부 해역은 예로부터 해적이 많기로 유명했는데 폼페이우스에 의해 진압되었다. 물론 속주 점령은 덤으로 따라왔다. 주도는 타르수스(현 터키 아다나)이다.
1.3.10 중근동 및 레반트
로마의 밀셔틀 1. 이역시 대부분의 땅이 폼페이우스에 의해 정복되었다. 파르티아 및 페르시아와 접해있기 때문에 이곳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매우 크다. 웬만해서는 외교적 밀당으로 평화를 유지한 지방. 사실 로마는 이 지방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재미를 본게 많이 없긴 하다.[42]
- 메소포타미아 속주 : 트라야누스때 설립 후 118년 하드리아누스가 폐지한 속주 삼총사 중 하나이나, 메소포타미아 북부 속주 형태로 197년에 재설립 되었다. 후기 로마제국의 지정학적 상황에 있어 북부 메소포타미아는 페르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귀중한 발판이 될 수 있었다. 주도는 아미다(현 터키 디야르바크르), 니시비스(현 터키 누사이빈)이다.
- 시리아 코일레 속주 : 서쪽은 지중해에 북쪽은 킬리키아 속주에 있으며 이집트, 아나톨리아와 함께 로마제국 최대의 곡창지대 중 하나. 현 터키 동남부 및 레바논 지역이다. 주도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도인 안티오키아(현 터키 안타키야)이다. 이름의 유래는 시리아를 다스렸던 헬레니즘계 왕조인 셀레우코스 왕조. 최근에 IS의 반달 행위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지역 중 하나이며 이미 이곳 에는 위험에 빠진 로마 유적들도 굉장히 많다. 이곳의 유명한 총독으로는 무키아누스가 있는데 유대인 이집트 장관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와 협력하여 이곳의 군단장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만들었다. 다만 타키투스는 무키아누스에 대해 교만하고 베스파시아누스와 적대하였다고 기록하였으나, 실상은 단순한 경쟁상대였으며 무엇보다도 무키아누스가 교만하거나 적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베스파시아누스의 황제 즉위에 조력하였다. 덕문에 무키아누스 자신보다 인지도가 한참 낮은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될 수 있었다.[44]
시오노 여사의 말이 맞게 떨어진 몇 안되는 부분.
- 시리아 포이니키아 속주[45] : 시리아의 남쪽지방, 페니키아 지방을 일컫으며 현재의 시리아 및 레바논, 요르단 지역이다. 주도는 다마스쿠스(현 시리아 디마시크)이며 시돈과 베리투스(현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또한 유명한 도시이다. 사실 이 지역 또한 IS의 마수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팔미라 유적이 이곳에 있는데 어떻게 되었는지는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유다이아[46] 속주 : 현재의 이스라엘 지역이며, 서기 70년 경에 베스파시아누스와 아들 티투스의 주도로 점령되었다. 로마 의 자치를 보장하고 타 민족과 동화를 유도하는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이후에도 두 번 더 유대인 반란이 일어났으며 마지막 반란은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일어났는데,
야마돌은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명령으로 유대인은 강제로 예루살렘에서 내쫓기게 되었다. 물론 이 이후에도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를 위시로 한 온건파 유대인이라 쓰고 다른 유대인 입장에서 로마에게 나라 팔은 배신자, 매국노들은 별 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자세한 건 디아스포라 참조. 주도는 의외로 예루살렘이 아니라 텔아비브 근처 해안가의 도시인 카이사레아 마리티마(현 이스라엘 케사리야)인데 이는 유대인을 자극하지 않게 하려는 조치이기도 하였다.
- 오스로이네 속주 : 시리아 코일레에서 좀더 내륙으로 들어가 있으며 주도는 에데사(현 터키 샨르우르파)/레사이나(현 시리아 라스 알 아인). 지정학적으로 여러 세력의 길목인지라, 헬레니즘 시대 부터 여러 세력의 각축장이었다. 대표적으로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있다.
- 아라비아 페트라이아 속주 : 로마의 제국 이전에는 이 곳에 페트라 왕국이 있었다. 이 곳은 트라야누스 황제 때 가장 늦게 편입 되었으며, 이는 오랫동안 페트라 왕국과 로마 제국 사이에 우호적인 교류
라고 쓰고 실제로는 일방적인 조공관계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주도는 페트라 왕국의 수도인 페트라(현 요르단의 페트라 유적)와 로마가 세운 도시인 보스트라(현 시리아 보스라) 공동.
1.3.11 북아프리카
로마의 밀셔틀 2이자 부유하기로는 콩라인 지역. 이집트를 제외하고는 포에니 전쟁을 통해 카르타고로부터 빼앗은 지역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막화와 반 독재 시위로 망했어요..
- 아이깁투스 황제 직할령 : 아이깁투스는 현재의 이집트 일대를 그리스인들이 부르는 명칭이었으며 원래 이집트의 어원이 아이깁투스란 단어에서 나온 것이다. 이집트는 다른 헬레니즘계 알렉산드로스 후계국보다 오래 독립국으로서 버티는데 성공한다. 이는 이집트 특유의 폐쇄적 위치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유지해 온 줄타기 외교 정책을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자기 동생과 권력을 나눠갖기 싫어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안토니우스를 차례로 끌어들이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악마의 한 수가 되었고 균형외교의 파탄을 일으켜버렸다.[47][48] 2차 삼두정치결렬 이후, 이집트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악티움 해전이후 가세가 옥타비아누스(나중의 아우구스투스)로 기울어지게 되고 이는 안토니우스 패배 후 이집트가 속주가 아닌 황제 직할령이 된 원인이 된다. 이후 이집트는 로마 최대의 밀셔틀이 되었으며 동로마 제국을 거쳐 7세기 이슬람의 침공이 있을 때 까지 약 700년 간 어느 야만족의 침공을 받지 않고 열심히(?) 로마의 밀셔틀이 된다. 이집트는 다른 로마의 황제 속주와는 달리 황제 직할령인데 황제가 직접 이집트 장관을 임명하여 다스린다. 이 황제 직할령의 이점 중 하나는 이집트를 통해 수도에 공급되는 밀 공급량을 황제가 직접 컨트롤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첨언하자면 김연아가 피겨스케이팅 공연한 곡 중 마스네가 작곡한 타이스의 명상곡이라는 곡이 있다. 여기서 타이스는 사람 이름이며 배경은 4세기-로마제국 말기의 여기, 즉 이집트이다.[49] 직할령의 수도는 알렉산드리아(현 이집트 알 이스칸다리야).
- 크레타 에트 키레나이카 속주 ♠ : 크레타는 말그대로 현재의 그리스 크레테 섬이며 키레나이카는 현재의 리비아 바르카 지방(그리스어 명인 키레네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재 입장에서는 상당히 백괴스러운 속주인데 크레타는 아카이아 같은 그리스 또는 가까운 아시아 속주에 묶지 않고 훨씬 먼 키레나이카 묶어놓은 것도 웃기지만 정작 이 속주의 주도는 고르티나인데 크레테 섬에 있다(...). 위치는 현대 그리스 크레테 주의 주도 이라클리온에서 가깝다고 한다.
- 트리폴리타니아 속주 ♠ : 현 리비아 타라불루스 지방 일대. 속주 이름인 트리폴리타니아 지방으로 더 유명하다. 주도는 렙티스 마그나(현 리비아 콤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황제가 되기 전의 출신지이며 이때문에 세베루스 황제는 최초의 아프리카 출신 황제가 되었다. 이 때문에 세베루스가 흑인이라는 설도 있다.
- 아프리카 속주 ♠ : 현 튀니지 일대 이며 주도는 처음엔 자마 레기아(그 유명한 자마 전투가 벌어진 곳 맞다. 현 튀니지 자마)에서 카르타고(현 튀니지 카르타지[50])로 옮김[51]. 3차 포에니 전쟁 후 카르타고는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여러번 재건 시도가 있었고 결국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재건되어 주도의 지위를 되찾는다. 이 카르타고는 로마인들이 재건한 신도시었기 때문에 오리지날 카르타고 유물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라 한다. 카르타고가 폐허였을 때의 주도는 우티카(현 튀니지 자나)이다. 아프리카는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은퇴 후 자신의 일자리가 없어진 사병을 정착시킨 땅이기도 하다. 즉 마리우스는 여기 속주를 최초의 기반 및 클리엔테스로 가지게 되었다.
- 누미디아 속주[52] ♠ : 현재의 알제리 북부이나, 지중해성 기후의 북부 해안을 제외한 알제리 땅의 대부분이 사막인 걸 감안하면 실제 알제리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다[53]. 주도는 키르타. 아프리카와 함께 로마의 코끼리병을 책임져왔으며 누미디아 왕국은 2차 포에니 전쟁 까지만 해도 카르타고에 협력하였다. 하지만 2차 포에니 전쟁 이후에는 로마편에 붙어 카르타고의 통수를 날리고 괴롭힌다. 이는 로마가 보기에도 도를 넘어설 정도였다고. 이 때문에
대 카토를 제외하고모든 로마 지식인들이 불필요하다고 욕한[54] 3차 포에니 전쟁의 원인이 된다. 그럼 누미디아 왕조의 최후는 어땠냐고? 카르타고 멸망 약 반 세기 후 누미디아 왕 유구르타가 오해와 실책 및 악수를 쌓은 끝에 전쟁을 일으키는데 이를 유구르타 전쟁이라 부른다. 유구르타 전쟁은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전쟁이었으며 유구르타의 패배로 끝나게 된다. 물론 유구르타는 처형되었고 누미디아는 로마가 접수해버렸다.통수에 대한 인과응보
- 마우레타니아 팅기타나 속주 : 아프리카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속주. 주도는 팅기스(현 모로코 탄자). 이웃 누미디아나 카르타고와는 달리 조용히 로마에 접수되었다. 참고로 마우레타니아라는 말에서 무어 및 무어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였으며 모로코, 모리타니의 어원이 되기도 한다.
- 마우레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 속주 : 누미디아와 마우레타니아 팅기타나 사이에 끼인 속주. 이 속주 또한 조용히 로마에 접수되었으며. 주도는 카이사리아(현 알제리 셰르셸)이다. 여기서 보면 카이세리, 카이사리아 등 이름이 비슷한 도시가 많은데 이는 모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을 딴 것이다. 즉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자신의 정복도시에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을 붙여놓은 것과 똑같은 행위였던 것.
1.3.12 히스파니아
2차 포에니 전쟁 이후 카르타고로 부터 빼앗은 영토들로 구성되어 있다. 예로부터 산악지형이라 게릴라전이 자주 일어났으며 한니발의 동생이 이곳을 근거지 삼기도 하였고 세르토리우스의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제국 이후에는 갈리아와 함께 로마화의 우등생으로 불리었으며 황제 트라야누스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갈리아, 북이탈리아, 북아프리카와 함께 퇴역한 예비군 로마군이 정착하여 세운 도시가 굉장히 많다.(거의 로마제국 서부지역의 도시들은 거진 다 이런 과정을 거쳤다.) 이 지역 속주는 대부분 히스파니아라고 불리었는데 여기서 스페인어로 에스파냐, 영어표현으로는 스페인이 나오게 된다.
-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속주 : 현 스페인 영토의 대부분. 세르토리우스의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그후 착실히 로마화의 길을 걷는다. 트라야누스의 고향인 이탈리카가 이 곳에 있다. 주도는 타라코(현 스페인 타라고나). 바르셀로나와 같이 카탈루냐에 위치했지만 레콩키스타를 겪으면서 바르셀로나와 타라코의 운명은 뒤바뀌었다. 5세기 경에는 이 속주에 고트족들이 쏟아져 들어와 서고트 왕국을 세운다. 갈바가 네로의 뒤를 잇기 직전 이곳에서 총독을 역임하였다.
- 히스파니아 베티카 속주[55] ♠ : 현 스페인 남부. 주도는 코르두바(현 스페인 코르도바). 서 지중해 및 서유럽 세계에 위치했지만 가장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속주. 원래 카르타고 땅이었으나 2차 포에니 전쟁 후 로마에 귀속되었다. 빈덱스가 네로에 항거하였을 때 가장 먼저 지지를 보낸 곳 중 하나이며 5세기 경에는 이 속주에도 고트족들이 쏟아져 들어와 서고트 왕국을 세우지만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동로마가 일시 수복해 가기도 하였다.
황제 죽자마자 털리긴 하지만.
- 루시타니아 속주[56] : 현 포르투갈 중 두오루 강 이남 지역이며 일부 스페인 서부 영토(현재 스페인 에스트레마두라 지방)를 포함한다. 주도는 에메리타 아우구스타(현 스페인 메리다)이다. 하지만 리스본, 코임브라, 브라가 등 포르투갈 주요 도시들 중 상당수가 로마제국 시대에 건설 된 것이다. 네로의 자살 전에는 후임 황제 오토가 총독으로 다스리고 있었던 곳이다.
1.3.13 지중해 도서 지역
본격 로마의 밀셔틀 3
- 시킬리아 속주 ♠ : 현재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 최초의 로마 밀셔틀이자 라디푼디움[57]의 고향. 이칼리카르타고와 함께 로마 자영농의 몰락의 원흉이 된다.[58] 하지만 갈리아 키살피나(북이탈리아)와는 달리 로마가 멸망할 때 까지도 본국 이탈리아에 편입되지는 못하고 속주로 남았다. 편입되었으면 아마 시칠리아 속주 항목에 취소선 그었을 것이다.
로마 : 잘 들으세요. 선생님은 이제 영원히 속주가 되셨습니다. 다시말해 이제 멸망할때 까지 본국이 되실수 없단 이야기 입니다. 시칠리아 : 이보시오 로마 양반, 내가 속주라니, 내가 속주라니.. 아흑흑흑흑흑...주도는 시라쿠사(현 이탈리아 시라쿠사).
- 코르시카 에트 사르디니아 속주 : 코르시카는 현재 프랑스 코르시카 섬, 사르디니아는 현재 이탈리아 사르데냐 섬. 로마제국 이전에는 카르타고의 세력이 미치는 지역이었으며, 1차 포에니 전쟁 직후인 기원전 238년에 로마의 영토가 되었다. 코르시카와 사르데냐는 두 섬을 묶어 한 속주가 되었으며, 티베리우스 때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이곳으로 유배를 떠나기도 했다. 주도는 사르디니아 섬에 위치한 카랄리스(현 이탈리아 칼리아리).
- 로도스 속주 ♠ : 현재의 그리스 로도스 섬. 주도는 로도스 섬에 위치한 동명의 도시 로도스(현 그리스 로도스)이며 장미꽃이 피는 섬이란 뜻이 있다. 아테네 수준은 아니지만 아카데미들이 많이 몰려있어
이바라키학원도시라 불렸다고. 많은 명사들이 도피성 유학을 떠난 것으로 유명하다.현재 우리가 필리핀으로 도피성 어학연수 떠나는 것과 유사하다. 다만 로도스는 여자보다는 거상 관광으로 더 유명하단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 키프로스 속주 ♠ : 말 그대로 현재의 키프로스 섬이다. 조그만 섬 안에서 그리스인과 터키인이 반띵하고 있는 그곳. 이곳은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전도여행을 떠난 곳으로 유명하며 주도는 파포스(현 키프로스 파포스). 성경에서도 이 도시 이름이 나오는데 이름이 바보(...)
데살로니카, 고린도, 에베소, 안디옥, 서머나... 진짜 이따위로 번역한 놈 누구임?
1.3.14 이탈리아
속주는 아니지만 넣기로 하였다. 수도는 당연히로마. 재밌는 것은 로마 시를 14개 구(區)로 나누었는데, 이탈리아 반도 또한 14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었다고. 기본적으로 이탈리아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 시민권자는 세금이 면제였다고 한다. 이상하게 서로마 제국시기로 갈수록 수도 로마의 중요성은 떨어지고 대신 메디올라눔, 라벤나등 지방도시들이 중심지화 한다.
원래 이탈리아란 개념은 이탈리아 반도를 뜻하는 말이었고 동맹시 전쟁 이전에는 본국 이탈리아라는 개념이 없었다. 즉, 동맹시 전쟁 이전의 이탈리아 반도는 도시국가로서의 로마와 동맹 도시국가 연합체인 로마 연합 그리고 여러 로마의 사유지와 에트루리아 족, 삼니움 족 등의 부족국가 또는 그 영토들이 섞인 짬뽕과도 같은 상태였다. 또한 로마 연합의 동맹국 시민들은 로마 시민권 보다 한 단계 격이 낮은 라틴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이민족을 포용한 다는 점에서 굉장히 장점인 제도였지만 라틴 시민권을 로마 시민권으로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는 한계가 있었다.
로마가 아직 이탈리아 반도에 국한되어 있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포에니 전쟁 이후 지중해 세계 곳곳에 속주를 두게 됨으로서 동맹국 시민에 대한 역차별이 되었다. 비유하자면 포에니 전쟁 때 끌려온 카르타고인 소년 노예가 능력만 좋으면 주인의 신뢰를 얻고 장성하여 자유를 구입할 수 있었고 그 소년의 자식이나 손자대에 가서 일정 재산을 갖추게 되면 로마 시민권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포에니 전쟁에 참여한 동맹국 시민은 영원히 라틴 시민권에 만족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는 로마의 동맹시들이 불만을 갖게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되자 원전 91년, 호민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이러한 불만 및 사회적 문제를 막기 위해 로마 시민권을 이탈리아 반도 전역으로 확대하자고 하였으나 기득권 층은 물론 무산자 로마 시민까지 반대하였다. 반대만 하면 모를까 기득권 층은 드루수스는 살해해 버리는 병크를 저질러 버렸고, 중재 역을 해줄 드루수스가 사라지자 동맹시 및 이탈리아의 부족들은 일제히 반기를 들게 된다. 이를 동맹시 전쟁이라 부른다. 피첸토족, 베스티노족, 마루키노족, 파엘리노족, 마르시족, 프렌타노족의 반란으로 시작되었으며 독자적 수도(코르피니움), 독자적 국명(이탈리아), 독자적 화폐와 상징(로마의 늑대에 대비되는 이탈리아의 황소람보르기니?)을 만들었다고. 이 전쟁은 마리우스, 술라, 크라수스, 폼페이우스[59]등 로마의 쟁쟁한 정치가들이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60]가 로마 시민권을 이탈리아 반도 전역으로 확대하는 법안을 내고 민회의 찬성을 얻으므로서 동맹시 전쟁은 종결된다.
1.4 디오클레티아누스의 4분제 시기의 속주
2명의 정제(正帝)와 2명의 부제(副帝)가 제국 영토를 4분하여 분담 방위하는 체제가 성립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동방 정제를 맡고, 서방 정제는 막시미아누스, 동방 부제는 갈레리우스, 서방 부제는 콘스탄티우스가 각각 방위하게 되었다.
각 황제들의 담당 지역은
- 동방 정제 - 오리엔트
- 동방 부제 - 일리리쿰
- 서방 정제 - 이탈리아
- 서방 부제 - 갈리아
로 분담되었으며, 각 지역을 총 12개 관구로 나누고 관구 밑에 속주를 두었다. 대신 속주의 규모를 작게 하여 숫자가 대폭 늘어나게 된다. 이후 이탈리아가 2개 관구로 분리되고, 이집트가 오리엔트 관구에서 독립, 마케도니아와 다키아가 분리되어 최종적으론 15개 관구로 정립된다.
위 지도에서 동쪽의 청색 계열 색이 오리엔트 지역, 그 서쪽 자색 계열 색은 일리리아 지역, 적황색 계열 색은 이탈리아 지역, 서쪽의 황색 계열 색은 갈리아 지역을 나타낸다.
1.4.1 오리엔트 지역
- 오리엔트 관구
- 폰토스 관구
- 아시아 관구
- 트라키아 관구
- 아에깁투스 관구
1.4.2 일리리아 지역
- 판노니아 관구
- 다키아 관구
- 마케도니아 관구
1.4.3 이탈리아 지역
- 이탈리아 관구
- 아노나리아
- 수부르비카리아
- 아프리카 관구
1.4.4 갈리아 지역
- 갈리아 관구
- 비엔네시스 관구
- 히스파니아 관구
- 브리타니아 관구
1.5 동로마 제국 시대 속주
1.6 관련 항목
2 速奏
대표적인 속주 기타리스트인 잉베이 말름스틴의 Far Beyond The Sun.
흔히 일렉트릭 기타 연주에서 많이 쓰는 말이다.- ↑ 발해의 행정구역이라는 뜻도 있지만 한자 자체가 다르다(涑州). 또한 허생전에서
짬뽕과 원자폭탄으로 유명한장기는 일본의 속주로 인구가 30만 호에 달한다는 표현이 있지만 그것 말고는 보통 고대 로마의 속주를 가리킨다. - ↑ 아우구스투스 이후 로마의 속주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원로원 속주와 황제 속주(아이깁투스의 경우 황제 직할령)가 그것이다. 원로원 속주의 특징으로는 제정 이전부터 로마 속주였거나, 경제력이 월등한 동지중해 지역 또는 전선에서 멀리 떨어졌다는 점을 가진다.(주로 남프랑스, 이베리아 반도 남부, 아프리카, 소아시아, 그리스에 위치) 그리고 총독은 공화정 시대의 그것과 같이 전직 집정관(Proconsul)중에서 원로원의 선출에 의해 나왔다는 특징이 있다. 반대로 황제 속주는 카이사르 이후에 추가되었거나, 서지중해 지역 또는 라인 & 도나우 전선 또는 그 근처에 위치해 있다는 점(주로 브리튼 섬, 갈리아, 발칸반도, 시리아 등)이고 선출 방법은 황제가 임명한 황제 대리인(legatus Augusti)이 총독을 맡았다. 하지만 황제 속주나 원로원 속주 둘 다 공통적으로 원로원 계급 출신자 또는 일부 기사(에퀴타스-여기서 기사는 말 타고 다니는 나이트(Knight)가 아닌 경제인. 재벌 총수 즉, 이건희나 정주영 구본능, 최태원 같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된다.)출신들이 올라가는 경우가 많았으며 제도적인 것 이외에 일반적으로 속주의 종류를 크게 구별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주로 황제 속주의 총독은 군대 경력이 있는 예비역 장군들이 맡았다고 생각하면 되고, 원로원 속주 총독은 문민 관료 출신들 또는 정계 은퇴 직전의 정치가들이 맡은게 보통이었다고 한다.
- ↑ 브리타니아로부터 분화
- ↑ 브리타니아로부터 분화
- ↑ 다만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때, 글래스고와 에딘버러를 잇는 선 까지 로마제국의 영토가 되었으며 이는 현 스코틀랜드 남부 지방이다.
- ↑ 로마식 방어의 개념을 당시에는 리메스(Limes)라 불렀으며, 이런 리메스 시스템은 팍스 로마나의 기초가 되었다. 이때문인지는 몰라도 현대 이탈리아의 군사전문 잡지의 이름도 이걸 따서 리메스라 한다.
- ↑ 갈리아 코마타로부터 분화
- ↑ 갈리아 코마타로부터 분화
- ↑ 원래 이름은 갈리아 트란살피나였으나 후에 바뀌었다.
- ↑ 갈리아 코마타로부터 분화
- ↑ XX(경기도, 충청남도, 강원도, 경상북도 등)도청을 영어로 XX Provincial Office라 하는데 여기서 Provincial이란 말도 프로방스처럼 프로빙키아에서 유래하였다.
- ↑ 라인강 동쪽 지역은 서기 9년 토이토부르크 전투로 인해 상실되었다.
- ↑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게르마니아 방벽 건설을 통해 편입.
- ↑ 실제로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로마의 데나리우스가 발견된 적이 있다.
- ↑ 베네치아의 전신이 된 도시. 훈족에 의해 파괴된 후 유민들이 근처 섬에 베네치아를 건설하였다.
- ↑ 20-50년 사이 일리리쿰 속주에서 분화
- ↑ 시르미움은 후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국을 4등분할 때 일리리아 속주의 수도가 된다.
- ↑ 여기서 인페리오르와 수페리오르는 수도 로마를 기준으로 해서 가깝냐(수페리오르) 아니면 머냐(인페리오르)에 따라 기준이 나뉘며, 영어 superior(우등한), inferior(열등한)의 어원이 된다.
- ↑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는 다뉴브 강 좌안(하류 방향 기준, 로마제국 영토는 주로 다뉴브 강 우안에 있다.)에 있다. 공식적으로 로마제국이 다뉴브 강 바깥인 슬로바키아 땅에 무얼 한 건 없지만 브라티슬라바 남쪽 근교에서 로마 제국의 국경촌 유적이 발굴된 걸로 보아 국경 거점 몇 개 정도는 세운 것으로 보인다.
- ↑ 로마의 유명한 기병대장들이나 3~4세기의 황제 대부분은 이 지역 출신으로, 기병을 장악한 뒤에 황제가 되곤 했다.
- ↑ 118~158년 사이에 다키아 수페리오르, 다키아 인페리오르로 분할되었다가 다시 합쳐짐
- ↑ 보통 다키아 하면 도나우강 이북 루마니아를 떠올리지만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언급된 다키아의 범위는 이보다 훨씬 넓었다. 지금의 루마니아는 물론 몰도바, 우크라이나 서부(舊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역) 및 폴란드 남부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언급된 다키아의 범위이다.
- ↑ 20-50년 사이 일리리쿰 속주에서 분화
- ↑ 혹은 살로나라고도 부른다.
- ↑ 모이시아로부터 분화
- ↑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콘스탄티노플은 콘스탄티누스가 새 수도를 건설하기 전까지는 주도나 로마제국 주요 도시가 아닌 그냥 소도시였다. 즉, 대한민국의 세종특별자치시와 위상이 비슷하다.
- ↑ 스파르타쿠스의 원래 목표는 고향인 트라키아에 독립국을 세우는 것이었다.
- ↑ 스파르타의 병영국가적 생활양식은 이미 로마시대 때 랜드마크 중 하나가 되어 스파르타 사람들의 돈벌이가 되었다.
- ↑ 특히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속주세까지 면제되었다! 물론 네로가 속주세 면세 혜택을 그리스 전역으로 확대했으나 베스파시아누스 때 아테네와 스파르타만 혜택을 주기로 원상복구 되었다.
- ↑ 큰 도시는 주도가 아니며 오히려 주도는 잘 알려지지 않는 도시라는 점이 공통점이다.
하지만 코린트도 성경에 나오는 고린도 전후서로 유명하지. - ↑ 판티카파움이 아니다.
- ↑ 2014년 유로마이단의 혼란을 틈타 러시아계가 다수이던 크림 반도가 우크라이나에서 분리 독립해 러시아에 편입되었다.
- ↑ 라자스탄이 아니다!
- ↑ 트라야누스때 설립 후 118년 하드리아누스가 폐지
- ↑ 실제로 동로마는 만지케르트 전투이후 소아시아를 점점 상실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기병의 공급처인 목초지가 없어짐으로서 기병의 양과 질이 줄어드는 결과로 나타났다. 물론 12세기 알렉시오스 1세-요안니스 2세-마누엘 1세로 이어지는 콤네노스 황조 시대의 회광반조 시기에는 소아시아 상실로 인한 악영향이 거의 드러나지 않았지만, 사후 암군들의
알렉시오스 3세라던가 알렉시오스 3세라던가 알렉시오스 3세라던가(...)등장과 함께 십자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원인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 ↑ 3세기의 위기 때 로마 군사들 대부분은 페르시아 및 파르티아로부터 이 지역을 방어하고 반격하기 위해 쳐들어 가는 것을 마치 스페인인들이 엘도라도를 정복하는 것 처럼 생각하였다고 한다.
- ↑ 당장 신약성경 에베소서, 갈라티아서, 골로새서가 누구를 대상으로 쓰여졌는지 생각해보자.
- ↑ 사실 비티니아 속주는 폰투스 속주와 함께 오랫동안 비티니아 에트 폰투스라는 한 속주로 묶여 있었고 분리 된 것은 거의 말기의 일이다.
- ↑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는 이 유언이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 ↑ 사도 바울이 쓴 골로새서는 프리기아에 위치한 콜로사이라는 도시의 교회 신자들을 대상으로 쓴 서신이다.
- ↑ 후에 시리아 속주에 흡수
- ↑ 카르헤 전투에선 크라수스가 수레나스의 파르티안 궁병에게 농락당하며 대패하였고 크라수스의 전사로 이어졌다. 이는 삼두정치가 무너져버린 원인이 되었다. 그 후에도 카르헤 전투의 복수전이 많이 이어졌지만 전투로 이긴 건 없었다. 대표적으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의 파르티아 진격이 있었지만 욕만 잔뜩 먹고 성과가 없었으며, 아우구스투스는 외교적 합의를 통해 카르헤 전투 때 빼앗긴 대장기를 되찾아 오는데 만족해야 했다. 트라야누스의 원정은 대성공을 거둔 듯 보였지만 유지하는데 한계가 분명하였기 때문에 하드리아누스가 알아서 포기하였다. 트라야누스 이후에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각각 파르티아를 정벌하고 크테시폰을 점령하였지만, 마르쿠스 황제의 경우 "안토니누스의 역병" 때문에 세베루스의 경우 내부의 반란 진압 때문에 파르티아에서 철수하였다. 세베루스의 후임 황제인 카라칼라도 파르티아 원정을 떠났고 또한 실패로 끝났다. 게다가 실패로 끝난건 물론 자신의 실책 때문에 파르티아에서 마크리누스의 자객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파르티아가 멸망하고 로마에 대해 더 호전적인 페르시아가 세워지는 원인이 되고 로마의 시리아 지역 국경관리가 더 빡세질 수 밖에 없었다. 사산 왕조 건국 이후에도 여러 로마 황제들이 정벌에 나섰지만 큰 소득은 없었다고 한다.
사산 정벌 1빠 였던알렉산드로스 세베루스의 경우 페르시아의 전차부대를 궤멸 시키는 등 일련의 성과는 있었지만 역사가들이 밝혀낸 실상에 의하면 패배 또는 무승부나 다름 없었고 잘 해봐야 피로스의 승리였다고 한다. 군인 황제 시대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두정시대(테트라키아)에도 마찬가지였다. 반대로 파르티아와 페르시아 또한 로마제국의 동부를 일시적으로 유린하거나 점령하긴 했어도 마찬가지로 점유하진 못했다. 일례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세 초반부에 일시적으로 파르티아가 쳐들어 왔지만 역관광 당하였고 사산 왕조시대에도 마찬가지 상황이 벌어진다. 아르다시르 1세와 샤푸르 1세가 각각 점령에 성공하였고 특히 샤푸르 1세는 발레리아누스 황제를 사로잡기까지 했으나 거기까지였다. 또한 명군세종샤푸르 2세 또한 아미다 전투를 일으키고 구원나온 율리아누스 황제까지 전사시키는데 성공하였으나 아나톨리아 및 중근동에 대한 영구적인 점령엔 실패하였다. 이와 같은 대치는 고대 로마에서 동로마로 넘어온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결과적으로 로마와 페르시아 양국에 막대한 국력소모를 가져와 7세기에 이슬람이 발흥하게 된 원인이 된다. - ↑ 116년 트라야누스때 설립 후 2년 후인 118년 하드리아누스가 폐지
- ↑ 많은 역사가들은 만약 네로가 자살명령만 내리지 않았더라면 업적이나 명성으로 보아 네로 사후 코르불로가 황제가 되었을 거라 추측한다.
- ↑ 시리아로부터 분화
- ↑ 흔히 아는 유대는 개신교 성경식 표기이고 실제로는 유데아, 유다이아 등으로 불리웠다.
- ↑ 게다가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와 정식 결혼함으로서 모든 로마 시민을 적으로 돌리는 끔찍한 실책을 저지른다. 즉 로마 시민은 자기네 정치가가 외국 공주와 정략결혼 하는 것을 끔찍히 싫어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클레오파트라와 관계를 가진 카이사르는 이 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사생아까지 낳았어도 클레오파트라를 애인으로만 삼았지 결혼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런 점을 감안해 카이사르의 유언에서 사생아 카이사리온은 빠져있었다. 클레오파트라가 이 의도를 파악했는지는 불명.
- ↑ 또한 후일 황제가 되는 티투스도 유대 왕국의 공주와 사랑에 빠지긴 했으나 결혼하지는 않았고 이는 티투스의 치세 내내 지지율이 높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 ↑ 부연 설명을 하자면 타이스의 명상곡은 원래 오페라 타이스(Thais)에서 막이 바뀔 때 나오는 음악이었다. 또한 오페라 타이스는 아나톨 프랑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이교도 여사제 타이스가 기독교의 수도승 아타나엘과 사이에서 종교적인 지조와 사랑 사이에서 고민하는 내용이다.
- ↑ 튀니스 근교의 도시다. 튀니스 대도시권 안에 속함.
- ↑ 카르타고의 경우 7세기의 이슬람의 발흥으로 인해 최종 멸망하였는데, 이 멸망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문화유산들이 잘 보존될 수 있었다 한다. 아무도 건드리는 사람이 없어서 보존되었다는 이야기다. 오히려 근대도시로 탈바꿈 한 유럽지역의 로마 도시들은 개발과 맞물려 제대로 된 문화재 발굴도 어렵고, 또 개발이 잘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가 많다고. 대표적으로 로마 지하철이 문화재 발굴 때문에 1호선을 만드는데만 20년이 넘게 걸리고, 이제야 3호선을 만들정도 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의 거대 도시들 중에서는 고대에는 타 도시 주변의 위성도시였으나, 근대에 그 도시를 제치고 거대도시가 된 곳이 많다. 대표적으로 스페인 톨레도-마드리드의 관계가 있다.
- ↑ 아프리카로부터 분화
- ↑ 먼 훗날 프랑스가 알제리를 식민지로 만들어 유럽인들을 이주시켰을 때에도 이 지역에 대부분 정착했다.
- ↑ 심지어 2차 포에니 전쟁의 명장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까지도 반대했다고 한다.
- ↑ 히스파이나 울테리오르 속주로부터 분화
- ↑ 히스파이나 울테리오르 속주로부터 분화
- ↑ 포에니 전쟁이후 로마의 식민지와 땅이 늘어나자 귀족과 부자들은 이 땅을 싸게 매입하고 싼 값에 노예를 부려 밀값을 폭락하게 한다. 이 대농장을 라디푼디움이라 하며 세계사시간에 단골소재이기도 하다.
- ↑ 전쟁으로 땅이풀리네 → 밀 농사의 플랜테이션화 → 밀값 폭락 → 자영농은 망했어요 테크 → 온갖 사회문제 발생. → 로마 공화정의 근본이 흔들림 → 걸출한 장군과 사병의 등장 → 내전! → 로마제국 성립 → PROFIT!
- ↑ 이때 폼페이우스는 10대 청소년이었다!
- ↑ 그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큰아버지이다. 이 때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아직 초딩이나 다름없던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