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페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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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내티 레즈의 영구결번
1 5 8 10 11 13
프레드 허친슨자니 벤치조 모건스파키 앤더슨배리 라킨데이브 콘셉시온
14 18 20 24 42
피트 로즈테드 클루스제프스키프랭크 로빈슨토니 페레즈재키 로빈슨
이름아타나시오 페레스 리갈(Atanasio Pérez Rigal)
생년월일1942년 5월 14일
국적쿠바
출신지Ciego de Ávila
포지션1루수/3루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60년 신시내티 레즈 자유계약 입단
소속팀신시내티 레즈(1964~1976)
몬트리올 엑스포스(1977~1979)
보스턴 레드삭스(1980~1982)
필라델피아 필리스(1983)
신시내티 레즈(1984~1985)
감독신시내티 레즈(1993)
플로리다 말린스(2001)
1967년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MVP
브룩스 로빈슨
(볼티모어 오리올스)
토니 페레즈
(신시내티 레즈)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토니 페레즈
헌액 연도2000년
헌액 방식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77.2% (9회)

1 개요

1970년대 메이저리그 신시내티 레즈의 황금기인 빅 레드 머신(Big Red Machine)의 중심 타자로 맹활약한 쿠바 출신의 1루수. 쿠바 출신으로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최초의 선수다. 찬스에 특히 강한 선수로서 신시내티 레즈의 최전성기에 큰 역할을 했던 선수다.

통산 성적은 0.279 2,732안타 379홈런 1,652타점.

2 선수 생활

2.1 미국으로 건너오다

쿠바에서 태어나서 자란 것도 쿠바였다. 아버지는 설탕 공장의 노동자였고, 자신도 어린 시절에 사탕수수를 날랐다고 한다. 설탕 공장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자신도 야구는 좋아하지만, 야구 선수의 삶 대신에 평범한 설탕 공장의 노동자 자리를 이어 받을 것처럼 보였는데, 반전이 일어났다. 신시내티 레즈의 스카우트였던 토니 파체코(Tony Pacheco)가 그를 주목해서 스카우트한 것.

당시 쿠바 혁명의 와중의 혼란한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쿠바 출신 선수들이 미국으로 못 건너가던 시절은 아니었다. 결국 비자를 얻어 미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야구 선수의 삶을 시작하는데, 비자를 받고 그의 수중에 남은 계약금은 고작 2.5달러였다고 한다(...)

마이너리그에서 초창기 정말 고생을 많이 하는데, 하필이면 처음 배속된 곳이 뉴욕 근처였고, 추운 날씨에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영어가 짧아서 의사소통에 고생을 했고, 이 때까지도 마이너리그에 쩔게 남아있던 인종차별로 인해 마음 고생을 많이 했다고. 다행히 따뜻한 샌디에이고 쪽에서 마이너리그 경력을 이어갔고, 그 곳에서 마이너리그를 초토화시킨 후, 드디어 1964년 메이저리그에 입성했다.

2.2 빅 레드 머신

초기 3년 간은 백업으로 활약하다가 1967년부터 본격적인 주전으로 자리잡았다. 주전으로 자리잡은 첫 해 26홈런 102타점을 기록하며 인상을 남긴 후, 그 뒤로 신시내티의 1루 자리를 지켰다. 이 해 처음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하게 되었는데, 연장 15회 접전이 펼쳐진 이 해 올스타전에서 캣피시 헌터를 상대로 결승 홈런을 터트리며 올스타전 MVP에 올라 강한 인상을 남겼다.

최고의 활약을 펼친 것은 빅 레드 머신이 갓 가동되기 시작한 1970년과 1971년인데, 이 때 각각 37홈런 122타점, 40홈런 129타점을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그 뒤로도 중심 타선에서 꾸준히 90타점 이상은 보장할 수 있는 선수였다. 빅 레드 머신의 수장인 스파키 앤더슨감독이 주자가 2루에 있을 때, 가장 뛰어났다고 평했을 정도로 타점 생산 능력이 좋았던 선수였다.

다른 빅 레드 머신의 주축들이 비해 나이가 좀 더 있는 편이라[1] 팀을 휘어잡는 리더로서의 역할은 아니었지만, 팀을 보듬고 팀의 갈등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역시 스파키 앤더슨의 말을 빌리자면, 팀의 심장이고 영혼과 같은 존재였다고.

빅 레드 머신에 있으면서 1975년과 1976년 두 차례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후, 1976시즌이 끝나고 몬트리올 엑스포스로 트레이드되었다.

2.3 빅 레드 머신 이후

몬트리올에서는 평범한 성적을 찍었다. 아무래도 나이가 있어서 장타력이 줄어든 것이 한 몫 했다. 그래도 클러치 능력은 있어서 꾸준히 90타점 가량은 만들어 냈다. 3년간의 몬트리올 생활을 마친 후, 보스턴 레드삭스의 계약을 맺었는데, 보스턴에서의 첫 해인 1980년, 나이 38세로 25홈런 105타점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보스턴과의 계약이 끝난 후에는 1983년 필라델피아 필리스에 합류하게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당시 필라델피아에는 빅 레드 머신에서 함께 영광을 누렸던 옛 동료 피트 로즈조 모건이 노장이 되어 이 팀이 있었던 것. 이들 및 필라델피아의 프랜차이즈 스타 마이크 슈미트와 함께 타선을 이끌면서 필라델피아의 1983년 내셔널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빅 그레이 머신이라고 칭하기도 했었다.

필라델피아에서 한 해 시즌을 마친 후, 친정팀인 신시내티 레즈로 다시 돌아와 대타로서 세 시즌을 뛴 후, 은퇴하게 되었다.

3 은퇴 이후 및 명예의 전당 입성

은퇴 후에는 바로 신시내티의 코치를 맡아서 1990년 팀의 월드시리즈 우승 멤버가 되었다. 선수로서 두 번, 코치로서 한 차례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게 된 것. 그리고 1993년에 감독이 되었지만, 성적 부진을 이유로 중도에 해임되고 만다. 그 뒤로는 고향인 쿠바와 가까운 플로리다 말린스에서 활동하게 되었는데, 2001년 감독이 중도에 해임된 플로리다의 감독을 잠시 맡아 팀을 이끌기도 했다. 그리고 그 뒤로는 플로리다의 자문역을 수행하고 있다.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는 9번의 도전 끝에 들어갔다. 1루수라는 자리를 놓고 보면, 동시대의 다른 타자들에 비해 딱히 나을 것은 없지만, 빅 레드 머신이라는 상징성과 당대 은근히 많았던 타점이 무기가 되어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수 있었다. 문제는 신시내티가 계속 손 놓고 있다가 켄 그리피 주니어가 신시내티로 오게 되자 부랴부랴 그의 등번호를 영구결번 처리한 것. 어째 대접이 영 그렇다(...) 뭐, 어쨌거나 신시내티 레즈의 전설로 그래도 신시내티에 가면 기립박수는 너끈히 받는다.
  1. 자니 벤치는 1947년생, 조 모건은 1943년생이다. 주전 유격수이자 주장인 데이브 콘셉시온은 1948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