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만

< 192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
1928 - 시그리드 운세트토마스 만1930 - 싱클레어 루이스


Paul Thomas Mann (파울 토마스 만)
1875년 6월 6일 뤼베크 ~ 1955년 8월 12일 취리히

1 개요

독일평론가이자 소설가. 문장 표현력과 구성, 주제의식 등에서 이견없이 20세기 독일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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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독일 북부의 뤼베크에서 토마스 요한 하인리히 만과 율리아 다 실바 브룬스 부부의 차남으로 태어난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북부 독일인으로 엄격하고 강직한 사람이었으며,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브라질계였던 어머니는 낭만적이고 여유로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러한 부모님의 기질 차이로 인해 성장시절 그가 겪었던 고뇌와 방황은 후일 토니오 크뢰거(Tonio Kröger)라는 자전적 소설로 표출되기도 한다.

1891년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가족들은 뮌헨으로 거처를 옮기는 데 이후 1933년 나치의 박해를 피해 망명하기까지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뮌헨은 그의 거처가 된다. 뮌헨에서 뮌헨 대학교로 진학한 만은 작가로의 역량을 기우기 위해 경제, 역사, 문학 등 다양한 학문을 두루 탐색한다.

이후 형인 하인리히[1]와 함께 보험회사에서 일하던 만은 꼬마 프리데만 씨(Der Kleine Herr Friedemann)를 1898년 발표하면서 작가로 첫 발을 내딛는다. 이후 1905년 부유한 유대계 언론가의 딸이었던 카티아 프링스하임과 결혼한다. 먹고 살 걱정을 안하게 된 건 덤 나치에게 까일 거리를 얻게 된 것도 덤 평생을 함께한 부부관계에서 만은 6명의 자식들을 얻는다.[2]

1차 대전이 발발하자 휴머니스트 성향의 만은 여러 정치적 논설을 발표하며 빌헬름 2세와 전쟁의 비참함을 고발한다.[3] 또한 12년이라는 엄청난 세월에 걸쳐 작성한 걸작인 마의 산을 1924년 발표하며 독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작가로 발돋움한다. 이 <마의 산>은 1929년 그에게 노벨문학상을 선사한다.

하지만 1933년 나치가 집권하자 그는 더 이상 독일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고[4] 프랑스를 거쳐 1938년 미국으로 망명하여 프린스턴 대학교의 교수로 재임한다. 프린스턴: 아인슈타인이어 만까지 주다니. 이후 1939년 2차 대전이 발발하자 만은 BBC의 반 나치 독일어 방송을 진행한다.[5] 전쟁이 끝난 후 토마스 만은 유럽으로 돌아와 스위스 취리히에서 생활한다. 독일 국적을 포기한 것도, 독일 방문을 거부한 것도 아니었지만[6] 독일에서 거주하지는 않으며 여생을 보내다 1955년 취리히에서 사망한다.

독일 식자층 사이에서는 문장을 늘여쓰는 것이 보편적인데, 토마스 만은 이 문장 늘려쓰기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이로 평가받는다.

3 주요 작품 목록

  • 《꼬마 프리데만 씨 (Der kleine Herr Friedmann)》 (1898년)
  • 《부덴브로크가(家)》(Buddenbrooks) (1901년)
  • 《토니오 크뢰거 (Tonio Kröger)》 (1903년)
  • 《대공전하 (Königliche Hoheit)》 (1909년)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Der Tod in Venedig)》 (1912년)
  • 《마의 산 (Der Zauberberg)》 (1924년)
  • 《요셉과 그의 형제들 (Joseph und seine Brüder)》 (1933년-43년)
  • 《자유의 문제(Das Problem der Freiheit)》 (1937년)
  • 《바이마르의 로테 (Lotte in Weimar)》 (1939년)
  • 《뒤바뀐 머리들 - 인도의 전설(Die vertauschten Köpfe - Eine indische Legende)》 (1940년)
  • 《파우스투스 박사 (Doktor Faustus)》 (1947년)
  • 《거룩한 죄인 (Der Erwählte)》 (1951년)
  •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 (Bekenntnisse des Hochstaplers Felix Krull. Der Memoiren erster Teil)》 (1922년/1954년)
  1. 동생인 토마스 만의 임팩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 사람 역시 20세기 독일문학의 한 획을 그은 위대한 작가이다. 다만 문학활동을 시작하면서 둘의 사이는 급격히 나빠졌다. 토마스 만은 형의 작품과 형에 대해 혹평을 가했고, 그런 동생이 승승장구하는 것을 본 하인히리는 그로 인해 자신감을 상실하여 작품활동을 계속하지 못하고 미국에서 쓸쓸하게 죽었다.
  2. 여담이지만, 장남 에리카 만, 차남 클라우스 만, 삼남 골로 만은 모두 나중에 독일 문학계의 신진 작가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또한 4남이자 막내였던 미하엘 만도 문학교수로 활동한다. 흠좀무한 집안내력. 이쯤되면 문학에도 DNA가 있나보다.
  3. 물론 당시 독일 내의 분위기에서 이런 행동이 어떤 반응을 불러왔을지는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4. 괴벨스가 주도한 반 독일적 서적 화형식에 만의 책은 1순위로 리스트에 올라갔을 정도이다.
  5. 다만 영국으로 가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하셨는지 미국에서 녹음을 해서 그 테이프를 영국으로 보냈다고 한다.
  6. 1949년 괴테 탄생 200주년 행사때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을 방문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