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개요
1910년부터 1918년까지 걸쳐 일제가 실시한 경제 정책.
2 사업의 목적과 이유
경술국치로 일제가 한국을 병합한 뒤 식민통치의 경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조선은 농업국가였고 농업의 생산 기반은 토지였기 때문에, 우선 조선의 토지 소유현황을 파악할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조세를 정확히 매겨 재정 기반을 마련하고, 토지로 자본을 마련할 수 있게 함으로써 경제 개발을 촉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도 토지 소유권은 존재하였으나 이를 공적으로 명확하게 증빙할 수 있는 수단이 부족했다. 근대적인 부동산 등기 제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상속문서나 당사자들끼리 교환한 매매문기, 주변 마을 사람들의 증언으로서나 소유 여부를 증명할 수 있었을 뿐 객관적인 소유 증빙제도는 없었다.
물론 조선조정이 주기적으로 토지조사작업인 양전을 하고, 토지문서인 양안을 만들어 각 관청에 배치하였지만, 20년에 한 번씩 이루어지는 데다가 측정방법 때문에 근대적인 관점에서 신뢰성이 떨어졌다. 예컨대 토지의 규모를 측정하는 결(結)과 부(負)의 단위는 토지의 실제크기가 아니라 토지의 생산등급에 따라 나뉘었고, 같은 결이라고 해도 크기가 6~7배의 차이를 보였다. 생산력을 기준으로 땅의 값어치를 감안한다는 것은 목적자체는 참신하지만, 측정을 잘하냐가 관건이었다.
문제는 1719년 경자양안 이후 대한제국의 광무양전까지 179년간 실시되지 않았고, 그나마 가장 최근에 있었던 광무양전때는 토지의 실소유주와 실제 면적을 정확히 조사하지 못하여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1]
그렇기 때문에 일제는 다시 토지 소유 현황을 조사해야 했고, 병합 이전인 통감부시절부터 결수연명부를 작성하여 치밀한 사전조사를 거친 뒤, 병합이후에는 조선민사령을 통해 사유재산권을 확립하여 1912년부터 토지조사사업에 착수했다.
3 사업의 전개
3.1 기존학설과 변경사항
기존에 거론되던 토지조사사업의 문제점으로는 "일제시대 토지의 소유권을 주장하려면 일정한 기간 내에 관청에 신고하도록 규정하였는데, 대부분의 농민들은 글을 모르고, 신고방법을 제대로 통보받지 못하여서 신고 기간을 놓치거나 허위 신고가 많아 총독부 및 소수 지주에게 넘어가고 다수의 농민들은 땅을 뺏겼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재일사학자 이재무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고 이후 신용하 교수에 의해 '한손에는 피스톨 한속에는 측량기'라는 토지수탈론으로 완성되었다.[2]
그러나 1980년대 중반 김해지역의 일제시대 토지대장이 발견되면서, 이 자료를 바탕으로 조석곤과 배영순등의 학자들에 의해 신고주의로 인한 토지수탈설은 허구임이 드러났다. 즉, 결수연명부, 토지신고서 작성으로 이어지는 여러차례의 사전작업이 있었고, 일제가 토지조사사업 신고 절차를 끈덕지게 홍보했기 때문에[3] 당시의 농민들이 소유권신고를 알았고, 문기등을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부동산 등기신청을 하였음이 밝혀졌다.[4] 실제로 전국의 총 1,910만 7,520필지 가운데 신고 그대로 사정된 것이 99.5%였다. [5]
한편, 지주들이 농민의 땅을 자신의 땅으로 신고해 농민의 땅을 빼앗았다는 주장은 부윤과 군수가 선정하여 자의적으로 임명한 지주대표 즉 지주총대들이 구성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제기된 주장이었다. 그러나 현존하는 김해군의 토지신고서에 의하면 지주총대들의 경제적 지위는 보잘 것 없었고, 실권이 없어서 이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소유권이 조작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6]
3.2 지주와 소작인 위치의 변화
토지조사사업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지주들의 소유권만 인정되고, 소작권과 중간 권리들이 부정당한 것에 있다. 조선시대에는 지주라 하더라도 소작인이 지주의 땅에서 경작할 수 있는 권리를 함부로 빼앗을 수 없었다.
예를 들어 국유지에는 도장권導掌權과 도지권賭地權이라는 게 있었다.
도장권은 궁방에게 조세수취를 위임받은 권리로서 궁방에게 일정액만을 상납하고 땅에 지세를 걷을 수 있었는데, 땅을 매각하거나 처분할 수는 없다 뿐이지 궁방상납액보다 도장의 지조 수입액이 월등한 경우가 많고, 이 권리는 궁방이 토지를 매각하지 않는 이상 임의로 파기하거나 변경 소멸될 수 없었다.(매각하면 소멸한다.)
도지권은 소작권의 개념인데, 마찬가지로 토지 그자체를 매매하거나 임의로 처분할 수는 없지만. 일정액의 상납액을 납부할 경우 자기땅에서 어떤 작물을 심고 농사를 지을 것인지는 철저히 도지권을 가진자 재량이었다. 이 도지권은 매매, 증여, 상속 심지어는 저당까지 가능하였다. 만약에 도지권이 설정되어있는 땅을 지주가 팔거나, 증여, 상속한다고 하더라도 도지권은 제외된 것으로, 지주가 임의로 도지권을 처분할 수는 없었다.(매각해도 소멸하지 않는다)
그러나 토지조사사업에서 지주의 토지 소유권은 인정되었지만, 이 두가지 전통적인 중간권리는 인정되지 않았다. 때문에 소작인의 경작권은 인정되지 않았는데, 이는 조선민사령을 통해 조선땅에 적용된 일본의 민법이 지주들의 입김에 영향력을 받아 생긴 특징[7]이었다. 따라서 소작인의 협상 능력은 이전에 비해 추락하였고, 상대적으로 지주의 권리는 강화되었다.[8]
다만, 이전부터 소작농은 소작만 하는 경우보다 자작과 소작을 겸하는 경우[9]가 더 많아 소작지에 대하여 경작권 분쟁이 일어나는 경우는 드물었다.
3.3 국유지와 민유지
토지조사사업의 또 다른 논쟁점은 국유지에 대한 처분이다. 조선의 토지에서 국유지는 꽤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10] 국유지는 크게 관청 즉 관아, 아문이 관리하는 아문둔전(衙門屯田)과 통신을 위해 설치한 역재(驛制)에서 말을 키우기 위해 각 역마다 설치한 역토, 그리고 궁이 관리하는 궁방전(宮房田)등이 있었다.[11]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후 왕실과 관아의 재정이 크게 곤궁해지자, 황무지를 개간한 자가 그 땅에서 3년 간 농사를 지으면 소유권을 인정해주는 제도를 이용해[12], 전쟁으로 인해 주인 없어진 황무지를 궁방전 및 아문둔전 등으로 편입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자 왕실과 관아가 그땅을 직접관리하지 않고 농민에게 소작을 내주면서, 소작지가 되거나 농민의 사유지가 된 경우가 많았고, 경우에 따라선 관과 민의 소유권이 얽힌 경우가 있어, 소유권 분쟁이 생겼다.(이하 분쟁지)
이들 국유분쟁지는 크게 무토(無土)와 유토(有土)로 나뉘었는데 무토(無土)는 토지의 세금수입만 궁방과 아문둔전이 가지고 있는 사실상의 민유지였고, 유토(有土)는 궁방과 아문이 직접 매입하거나 관리하는 토지였다. 문제는 유토 중에서도 궁방이 매입과 관리를 다하고 있는 제1종유토와, 실질적인 관리와 개간이 농민에 의해 전담되어 민유지화된 제2종유토로 나뉘었는데 갑오개혁당시 사실상의 민유지인 제2종유토가 전체 유토의 2/3를 차지하고 있었다. 즉 거의 대부분의 국유지가 실상 민유토지의 성격을 띄고 있었던 것이다.
갑오개혁때는 지세의 확보를 위해 아무 구분없이 이 토지들을 전부 국유지로 간주하여 농상공부나 군부 소속으로 두었다가 소유권 분쟁이 일었고, 광무양전때는 황실재정 팽창을 위하여 궁내부 소관으로 이들 공토를 황실사유지로 간주하여 지대를 인상하고 수조를 부과하였다가 대규모 소유권항쟁이 야기되었다.
다시 일제때는 대한제국의 황실재산을 그대로 인수하며 이를 국유지로 인수하였다가, 갑오개혁때부터 이어오던 국유지 분쟁을 맞으며 1908년 이들 분쟁지를 역둔토로 구분하였다. 그래서 토지조사사업 때는 임시토지조사국과 분쟁지심사위원회를 구축, 심사를 거쳐 이들 무토와 제2종유토의 성격을 인정하여 민유지로 돌려놓았다.
나머지 환급이 되지 않은 토지는 역둔토로 구분, 이 땅들에 대해서는 1908년 '역둔토관리규정'을 발표하여 역둔토를 일종의 국영 소작지로 만들어 농민들에게 소작을 내주었고[13], 이후 역둔토는 1920년 역둔토불하를 거쳐 경작하던 소작농들에게 불하되었다.[14]
3.3.1 향교와 서원 및 공유지
조선시대에는 향교에게 국가에서 지급하는 정액외에도 스스로 매입하거나 지방의 유림들로 부터 기부받은 땅들이 많았다. 이땅들은 전적으로 유림이나 향교의 관리인이 관리하였다. 문제는 일제시대 민법상 교육법인은 재단이나 사단등으로 구성되며 이들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아야 하는데, 애초에 조선에 법인이라는 개념자체가 없었을 뿐더러 전통적인 조선의 향교는 지방교육기관인 동시에 이익집단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통감부 시절에는 사립학교령과 학회령을 공포하여 향교소속 토지를 공사립학교의 재산으로 편입하였고, 편입되지 않은 향교의 토지에 대해서는 1910년에 <향교재산관리규정>을 발표하여 "향교재산은 그 연원이 어떠하든 공공적 성격이 강한데 일부에서 이것을 지방유림의 사적 공유에 속한 것으로 보아 무단방매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하니 추후 이런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법령집 9: 419-20) 매매와 양도, 교환, 저당을 일체 금지하였다.
또한 서원의 경우 본래 독립적으로 지방유림들에 의해 운영되었지만 법인의 자격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서원부속의 토지가 개인명의로 신고되는 등 법적으로 전통관습이 인정받지 못하였다. 이는 조상의 유산이나 종중 일동의 각출과 기부에 의해 형성된 종중재산이나 문중재산으로 형성된 토지에도 마찬가지였다. 토지의 소유자를 분명히 할 수 있는 법인이나 개인, 국가외의 소유자는 일체 인정치 않아 당사자간에 소유권 처리 분쟁이 많았고, 결국에는 개별 사적재산으로 분할되었다.[15]
세부 행정구역이었던 면동리의 공유지의 경우 도별로 <면동리유재산관리에 관한 건>을 두어 면 소유지는 면장이, 동리의 소유지에 대해서는 경기도와 강원도는 동리장이 관리하고, 다른지역에서는 면장이 관리하도록 규정하였다.
3.3.2 임목지대의 소유권
조선과 대한제국 정부는 토지의 소유권이 분명치 않은 산림에 관하여서는 무주공산의 원칙을 내세워 "산에는 정해진 주인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금산(禁山 출입이 금지된 산)이나 봉산(封山 목재 채취가 금지된 산), 태봉산(胎封山 왕실의 태를 묻어 출입이 금지된 산)등 아예 왕실의 임목지역으로 나무를 해가거나 출입을 금지하는 경우나, 조상의 묘를 지어(분묘지) 사유지화 된 것등이 있었으나, 왕실이 관리하던 금산 외에는 애시당초 국가의 허락없이 개별적으로 관리가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총독부가 들어서기전까지 제대로된 파악과 관리가 안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일제시대에 이르자 총독부는 삼림법을 제정, 소유형태에 따라 제실림, 국유림, 공유림, 민유림으로 구분하고 주인이 없는 토지는 국유지로 편입하는 한편 분묘지등 사적으로 관리된 토지에 대해서는 관행에 따라 사유지로 인정하고 지적도를 제출하여 소유권을 입증토록 하였다. 또한 산림의 벌목과 개간등이 전적으로 금지되는 보안림(保安林)을 설정하였고, 보안림으로 설정되어 벌목이나 개간을 하지못하여 금전적인 손해를 보는 사유림 소유자는 보상을 청구할수 있게 하였다. 더불어 보안림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임목지역을 논밭으로 개간하기 위해서는 총독부 농상공부대신에게 허가를 구하여야만 했다.[16]
4 결과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하나의 토지에 하나의 권리가 존재하는 일물일권적 토지소유권이 확립되었고, 부동산등기제도가 완전히 자리잡게 되었다. 이에따라,지주들의 경제력이 강화되고, 토지의 매매가 자유로워져 일본인 중에서도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을 획득한 대지주가 출현하였다.
이전과 달리 토지조사사업을 기점으로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는 관습적인 관계가 아니라 법적인 계약관계가 되었고, 소작인의 소작권이 소멸하여 지주는 유리해진 반면 소작농은 불리한 입장에 쳐하였다. 더불어 지방의 전통조직이었던 서원과 향교, 문중, 종중의 공동재산권이 법적으로 무시됨으로써 이들의 경제적 기반이 약화되어 양반을 중심으로한 전통적 신분질서가 붕괴되는데에도 일조하였다. 또한, 산림지역에 대해서는 국유지와 민유지를 체계적으로 구분하고 또한, 보안림을 설정하여 산림을 체계적으로 육성 및 관리하고자 하였다.
한편, 근대적 사유권의 확립에 따라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을 하는 금융상품도 같이 출현하였고, 전국적으로 균일하지 않았던 지세제도도 정비되어 총독부의 안정적인 지세수취가 가능하였다. 예컨데 사업이전에 지세는 도별로 상이하여 사업이후 강원, 경기, 경북, 경남, 평북은 크게 증가하였는데 비해, 전북, 전남, 함남, 함북은 오히려 감소하였다. 이는 구한말 행정의 미비로 체계적인 생산력 측정이 이루어지지 않아 지세가 고르게 수취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어쨌던 사업이후 전국적인 지세수취액이 17%가 증가하여 일제로서는 보다 더 안정적인 지세수취가 가능하게 되었다.
5 매체에서 나오는 토지조사사업
조정래의 아리랑에서는 지주총대가 임의로 토지소유권을 지정하고, 농민이 이것에 반발하여 지주총대임원을 폭행하자, 일본경찰에 의해 즉결 총살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이 때문에 한 때 이영훈이 조정래 소설을 비판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