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개요
식민지 근대화론은 식민지배기에 근대 제도·기구·시설의 도입, 경제성장, 경제사회의 변화 등이 일어났고, 이것을 근거로 들어 부분적인 근대화가 이루어졌음을 주장하는 학설이다. 대한민국의 식민지 근대화론은 경제적으로 전통사회부터 산업사회까지의 변화를 관찰하며, 주권 강탈, 노동력 및 자원의 수탈, 사회와 경제 구조의 왜곡, 인적자원의 실력향상 가능성을 저해했음을 인정하면서도 근대문명이 이식되어 경제·사회·문화·사상에서 폭넓은 변화를 경험하였고 나아가 이것이 독립 이후 한국경제 발전에 영향력을 미쳤다고 주장하는 학설이다.
이와 유사해보이나 전혀 다른 학설로 식민지 근대성론이 있다. 식민지 사회와 근대 사회가 동전의 양면처럼 떨어질 수 없으며 이 근대는 해방 이후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전제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같으나, 이들이 설명하는 '식민지 근대'는[1] 고도화된 억압과 통제[2]라고 비판, 동시에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탈근대주의적 학설이다.[3] 학설자체는 근대성론이 먼저 나왔으므로 용어의 사용 밎 이해에 오해가 생길 수 있다.
2 유래
해방이후 한국의 식민지 수탈론이 일제시대 일본학자들의 '조선사회 정체론'을 뛰어넘기 위해 나왔다면[4] 식민지 근대화론은 해방이후의 식민지 수탈론과 자본주의 맹아론[5]을 뛰어넘기 위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일찍이 미국, 유럽 권의 개발경제학자들은 식민지배가 개도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주장했으나, 식민지는 제국주의세력의 착취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일반적인 분위기였으며 나아가 피식민지국가가, 식민지배로 인해 왜곡된 사회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독립한 후에도 선진자본주의국가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된다는 종속이론이 출현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스페인,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멕시코와 브라질,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한민국과 대만이 1970년대 이후 경제적으로 급성장하여 신흥공업국으로 불리게 되자 회의감이 퍼지기 시작했고, 대한민국 일제강점기의 경우 두가지 관점이 힘을 얻게 되었다.
하나는 마크 피티, 브루스 커밍스, 카터 에커트 등이 기존 개발경제학을 대한민국 일제강점기에 적용한 것이다. 피티는 이 시기를 "일본제국을 위한 수탈뿐 아니라, 사회간접자본 구축, 산업생산 기반 강화, 교육 및 위생의 개선 등이 수반된 개발이 이루어졌다"고 평가하였으며, 에커트[6]는 "전통사회가 산업자본주의를 마련할 기술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성장에 있어서의 유산이 인정될 수 없다"고 보고 일제의 전쟁부역은 비판하면서도 "식민지기의 산업화가 인력, 기술적 측면 등에서 해방이후 한국의 산업화에 영향력을 끼쳤다"고 주장하였다. 즉, 일제강점기 당시의 관민협력 개발경험이 현대 대한민국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며 나아가 이를 전통유산과 단절함으로써 오늘날의 식민지 근대화론에 이르렀다.
다른 하나는 나카무라 사토루나 미야지마 히로시 등의 학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데 조선의 독자적 발전에 식민지의 변화성과를 결합한 것으로 이병천, 김기원, 안병직[7] 등 한국의 진보적 경제학자들이 이를 수용, 자국에 소개한 것이다. 나카무라 사토루는 한국이 중진자본주의국으로 서게 된 배경으로서 "식민지화 이전의 내적 발전과 식민지배가 결합되어 본원적 축적이 급속히 이루어진 것을 토대로 1930년대 일본 독점자본이 진출해 자본주의사회가 되었던 것"을 지목하였고, 미야지마 히로시는 일제시대 토지조사사업을 "조선 내에서 지속되어온 토지개혁을 계승해 근대적 토지 변혁을 이루었다."고 평가했다. 이병천은 "1930년대의 이같은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이해는, 종래와 같이 그것이 식민지적인 것, 제국주의 지배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 그 때문에 전후 이러저러한 왜곡되고 파행적인 식민지 유제를 낳았다는 관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 전후 한국자본주의의 역사, 그 내적 모순의 전개과정과의 연관이라는, 한국현대사를 자본주의 역사의 관점에서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관점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김기원은 "식민지 하의 물적 유산이 해방후 국영기업이 되거나 민간에 불하됨으로써 자본주의 발전의 토대로 전환되었음"을 지적하였고 안병직은 "개발을 통한 제국주의측의 수탈이라는 의미로서의 개발이자 조선인을 근대적 주체로 변모시킨다는 자기개발로서의 개발을 뜻하는 개발로서의 개발이라는 구도로 봐야한다"고 하였다.
1987년 10월경 「한국의 경제발전에 관한 역사적 연구」라는 주제로 한일 공동 연구가 시작된 이래 일본 도요타 재단의 연구비 지원에 힘입어 「근대조선의 경제구조(1989)」, 「근대조선 수리조합연구'(1992)」 등이 출간되었고[8] 호리 가즈오(堀和生)와 김낙년을 중심으로 일제시대 산업화연구가 진행되어, 각종 개인저작과 공동저작이 출판되었다. 이후에는 이영훈, 김낙년, 박기주 등이 결성한 낙성대경제연구소가 이를 주도하였다.
3 학설의 내용
식민지근대화론은 단순히 일제시대 한시점을 기준으로 이루어진 학론이 아니라 조선시대와 일제시대, 해방이후를 관통하는 포괄적인 학설이니 만큼 연구성과가 시기에 따라 나뉜다. 시기별로 제출된 논문이나 이를 정리하여 낸 정간집, 단행본등이 많으나 항목으로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3.1 조선후기[9]
- 사이짓기[10] 와 그루갈이[11], 연작법[12] , 이앙법[13]이 확산됨에 따라 넓은 땅에서 수십명씩 농사를 짓는 것보다 적은 땅에서 4~5명의 단위로 농사를 짓는 집약농법이 더 효율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에 농촌의 대가족은 해체되고 소가족 단위로 농사를 짓는 소농경영이 늘어나 농민에 의한 토지의 사유의식이 형성되었다. 이는 토지의 상품화 나아가 농산물의 상품경제화를 촉진하였다.
- 이 때문에 한 농지에 여러명의 노동력을 투하하여 농사를 지었던 재지사족(在地士族) 혹은 재지양반의 장원 농장은 날로 쇠퇴하였고 양반은 농토를 직접 경영하기 보다 농민에게 땅을 빌려주는 대신 소작료를 받는 지주-소작제도를 선호하게 되어 병작반수제가 정착한다.
- 구휼을 위해 시행되었던 환곡제도를 통해 쌀과 면포등이 전국적으로 유통되었고, 16세기 후반 이후 조정의 적극적인 장려 아래, 5일장, 이와 연계한 대장 그리고 상설시장에 이르기까지, 조밀한 농촌시장망, 장시[14]가 성립되어 18세기에는 전국의 물류는 환곡에 의존하고 그 하부는 장시가 담당하는 구조가 성립하였다.[15]
- 농업기술증진과 더불어 1763년 일본에서 고구마, 1820년 중국에서 감자 등 대표적인 구황작물이 전래되어 인구 부양력이 상승, 이에따라 18세기 후반까지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그 결과 산림자원의 희소성또한 증대되어 사양산(私養山)이 출현, 확산되는 등 산림에 대한 소유권 또한 등장하였다.
- 대외적으로는 1609년 대일국교정상화와 1661년 청의 해금정책으로 조선은 일본과 청의 중계무역을 하며 수익을 거뒀다. 구체적으로 연 40척의 상선이 은, 동, 납, 유황들을 가지고 와 무명, 쌀과 교역해 갔으며, 17세기 왜관에서는 조선산 해삼, 인삼 등을 수출해 은, 동, 물소뿔을 얻고 이를 가지고 중국에서 명주실, 비단을 수입해 일본에 재수출함으로써 은을 결제수단으로 2~3배의 차익을 실현하였다.[16]
- 대외무역을 통해 얻은 흑자로 조선은 막대한 량의 은을 획득하였고, 이 은을 판매하여 동을 수입하여 화폐인 동전(銅錢)을 주조하고 화폐를 유통시켰다.
- 그러나 1683년 청의 해금정책인 천계령이 해제되고 1687년 청일국교수립에 이어 1713년 중국 상인들이 대일 직접 무역을 개시하자 중계무역은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일본이 중국산 비단의 수입대체를 추진함과 동시에 아메리카산 인삼과 중국산 인삼을 도입하며 조선산 인삼의 수입대체전략을 실시한 것이다. 조선은 18세기 대중 가삼수출, 19세기 금광 개발 및 대중 금수출을 통해 이를 타개하려 했으나, 비단의 수입대체를 이루지 못하였고, 1차산품을 수출해 2차산품을 수입하는 무역구조에 고착됨으로써 결국 무역수지는 적자를 맞았다.
- 은의 유입양도 감소하였고 화폐주조를 위한 동의 수급또한 차질을 빚게 되었다.
- 또한 조선 건국 이래 지배층이 해상무역을 금지함은 물론 원격유통을 탄압하여, 원격지유통이 일본에 비해 낙후되었다. 그나마 개성 일대의 상업엘리트 송상만이 일제강점기까지 살아남았을 뿐, 이로인해 대규모 자본 축적이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여기에는 관허 독점과 이권추구 행위가 한몫했다고 볼수 있다.
- 광업에 있어서는 부역제가 해체되고 별장제, 물주제로 전환되어 상인자본이 투입, 생산증대와 함께 민영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설점수세제, 수령수세제 등으로 자금만 제공할 뿐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 물주, 책임하에 자본투입을 하지 못하는 덕대는 산업 자본가로 볼 수 없다. 농지, 산림과 다르게 광산에 있어서 소유권은 대체로 확립되지 못하였고, 안정적인 광업투자를 뒷받침할 제도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국가가 민간 광산개발을 철회하면 자본 회수가 불가능 했다. 또, 이를 통한 효율적 세수확보의 관리체계또한 마련되지 못했다는 데서 한계를 지닌다.
- 또한 사회전체적으로 노동과 직업의 분화는 크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 그러므로 개항 이전까지 조선에 근대화가 이루어졌다고는 할만한 게 없으며, 다만, 근대화를 위한 선행 조건이 어느정도 갖춰졌다고 평가하는 것이 한계일 것이다.
- 19세기에 이르면 인구는 정체 혹은 감소하게 된다. 그 이유는 첫째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해 인구밀도가 양란이전을 추월해 부양 한계에 도달했으며, 둘 째 정치적 해이에 의해 전국적인 유통망의 핵심이었던 환곡재분배경제가 수탈의 도구로 전락하였고[17], 셋 째 조선 조정에 산림을 관리하는 체계적인 규정이 없던 탓에[18] 화전이 지나치게 많아지고 산림의 훼손과 벌채가 증가하여서 장마철에 홍수 피해가 커지는 등으로 농사를 망치는 경우가 잦아졌기 때문이다.[19] 즉, 맬서스 트랩에 갇혀, 같은시기 산업혁명으로 이를 타개한 서양과 달리 전통적 성장의 한계를 맞이한 것이다.
- 구체적인 유통망의 하락은 아래 표와 같다.
5일장으로 환산한 장시수 | ||
지역 | 1770년[20] | 1830년대[21] |
경기 | 101 | 93 |
충청 | 164 | 156 |
전라 | 203 | 175 |
경상 | 269 | 256 |
황해 | 82 | 93 |
평안 | 134 | 117 |
강원 | 67 | 51 |
함경 | 27 | 27 |
총계 | 1047 | 983 |
3.2 개항과 대한제국[22]
- 개항이 되어 조선이 세계시장에게 개방되자, 대일무역과 대청무역이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주로 쌀과 콩, 소가죽, 직물의 원료인 생사(生絲)등 농산품을 수출하고, 공산품인 면,모,견제품등을 수입하였다.
- 그 중 일본으로 쌀을 수출하는 것은 큰 이윤이 남았기에, 농업경작이 활발히 이루어져 퇴보 및 정체된 농업생산량은 다시 증가하였고, 쌀수출을 통하여 이득을 본 신흥지주계층이 형성되었다.[23]
- 면포(옷감)을 제조하던 전통적인 면업은 수입산 면제품에 밀려 해체와 재편을 거듭하였다.
- 쌀의 해외거래를 중심으로 외국자본 특히 일본계 자본의 유입이 증가하였다.
- 무역이 발달하여 토착 공장과 회사, 은행등이 설립되었으나 운영이 부진했거나, 외국상권과의 경쟁, 정책적 지원의 부족으로 1907년까지 조직을 유지한 경우가 드물었고 공장의 경우 인력에 의존하는 전통공장이 대부분이었으며, 근대적인 기계화 공장으로 이행에 실패하였다.
- 개화파가 중심이된 내각이 성립하여 갑오개혁이 추진되었다. 왕실과 정부를 분리시키어 국왕의 권리를 제약하고 신분제를 철폐하였으며 과거제도를 폐지하는 것과 동시에, 재정개혁을 위해 세금을 화폐로 납부하게 하였다. 그러나 금융 유통망의 정비 없이 세금을 화폐로 납부하게 하여 정부관리나 백성이 아닌 제3자인 상인이 화폐로 세금을 대납해주고 농민에게서 현물로 세금을 거두는 외획(外獲)이 극성을 부려 농민의 세부담은 종전과 큰 변화가 없었다.
- 한편 상인들의 외획으로 쌀과 화폐의 유통이 활성화되어 농촌과 도시에 상품화폐경제를 확대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외획경제는 한일합방이 되기전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 대한제국에 의해 광무개혁이 실시되지만, 사유재산권을 인정치 않았고 민에 의한 사적토지소유권을 배제한 결과 국/민유지 분쟁을 불러일으켜 왔으며, 황실품위유지비 등의 지출은 많으나 농상부분에 대한 지출이 극미하여 실제 효과가 거의 없었고, 정부와 왕실이 분리되지 않았으며 왕실의 은닉금과 재산이 정부의 재정을 능가하였다.(광무개혁 참고)
- 이미 18세기부터 대외무역적자로 인한 동의 수급곤란과 물가의 급격한 상승으로 화폐경제는 붕괴하여 외국인들이 많이 드나드는 개항장에서 조차 조선인 사이에서는 화폐보다는 실물거래가 지배적이었고, 그나마도 조선과 대한제국 정부가 백납전과 백동화를 남발하면서 화폐가 제대로 유통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일본화폐가 깊숙히 유통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 전체적으로 화폐와 시장, 금융망의 정비가 미흡하였고, 회사와 공장의 운영이 미숙하였으며, 경제는 1차산품인 농산품에 수출에 의지하는 단계였다.
3.3 일제강점기[24]
- 토지조사사업을 통하여 기존의 가문이나 왕실, 관청등의 소유권이 얽혔던 복잡한 토지소유권이 등기제도의 도입등을 통해 일물일권(一物一券)적인 토지소유권으로 정리되었고 국유지와 사유지의 명확한 개념이 정착하였다. 특히 왕실의 재산은 국유지로 환수된 후 다시 농민들에게 불하되어 민중에 의한 토지의 매매와 자본 전환이 수월해졌다.
- 또한 토지조사사업으로 가문이나 문중재산은 법인으로 인정되지 않고 개인명의에 따라 분할되어 전통적 신분인 양반가문의 재산기반이 붕괴하는데에 한몫했다.
- 동시에 토지조사사업으로 징세기구와 제도가 정비되고, 일제의 화폐정리사업으로 구화폐가 정리되고 화폐경제가 정착함에 따라 전체적으로 정부의 조세수취가 개선되고 세금도 금납화되었다.
- 일본계 은행들이 공식적으로 영업하여 조선에 은행과 금융제도가 정착하게되었다.
- 산림보호령을 제정하여 산림에 대한 체계적인 보호와 육성,관리가 시작되었으며 산사태나 토사로 인한 자연재해가 감소하였다.
- 토지소유권과 금융업이 성립되자 지주는 소작제도를 한층 더 활용하여 경제적 수익의 증대를 도모하였고, 산미증식계획시기와 맞물려 집중적으로 곡물생산량을 증가시켜 일본으로 쌀을 이출하여 소득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 1920~30년대에 이렇게 수입이 증가한 지주는 자신의 늘어난 소득을 재화와 사치품등을 구매하거나 금융과 주식투자에 활용하였다.
- 지주들의 쌀이출과, 일본산 공산품의 이입 확대로 금융업과 시장거래는 더욱 활성화되었다.
- 지주의 상품구매에 조선에는 공산품시장이 형성되었고, 늘어나는 수요에 공급을 맞추기 위해 조선에서도 공산품을 생산하기 위한 경공업단지가 조성되고 창업과 운영이 활발해진다.[25] 지주는 농업 부문의 재투자와 더불어 조선공산품 구입이나 조선 내 지주회사, 주식회사에 대한 주식투자도 병행하면서 조선에 있는 회사들도 더욱 성장하게되는 계기가 된다.
- 농업과 가내수공업이 아직도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공업 생산량은 30배 이상 증가하였고, 그중 공장의 비중이 크게 증가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에서는 일본상품에 대한 이입의존도가 점점 감소하여 일본산 상품에 대한 이입대체화가 진전되었고, 고무신과 메리야스 등 경공업부문에서는 오히려 일본을 능가하여 일본 본토로 이출까지 하였다.
- 이에 조선총독부는 농업중시정책을 농,공업병진 정책으로 전환하고 일본자본을 끌어들여 중공업단지 조성을 장려하였다.
- 농업용화학비료를 생산하기 위해 조선북부지역에는 중공업단지가 형성되고, 화학비료생산과 겸해서 전기등을 자급하게 된다.
- 한편, 산업화의 진전으로 근대적 노동자계급이 형성되어갔다.
- 기본적인 한계는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일제시대 경제는 성장추세였다. 실질임금과 소득, 소비, 식생활[26], 평균신장#, 평균수명과, 인구등이 증가하여 전체적으로 식민지기 경제는 성장하였다.
3.4 해방이후의 연속성에 관하여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주로 직접적인 연관성 보다는 간접적인 영향력을 상정한다.# 왜냐하면 식민지기 물적유산의 거의 대부분이 해방이후 귀속재산불하로 가치가 하락하고, 그나마 남아있는것도 한국전쟁으로 상당수가 유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적유산보다는 제도적인 유산 특히 현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정착하는 시기가 일제시대였음을 지적한다.# 예컨데 제도적으로 토지 조사 사업 등을 통하여 사유재산권 등이 확보되고, 부동산 등기제도가 정착한점이나 사유재산권의 성립으로 문중과 가문에 의거한 양반 향교와 문중, 종중의 재산을 분열시켜 신분제 해체를 가속화한점, 금융권과 은행이 설치되고 근대적 회사와 공장이 등장하게 된 점등이 이후 해방이후 경제성장을 하는데에 경험적으로 영향력을 끼쳤다는 점등을 지적한다.
그밖에 식민지기에 형성된 인적자원들이 해방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끼쳤음을 언급#한다.
3.5 기존학설과의 대립
4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나?
한편 이들을 둘러싼 논쟁이 심화되고 확산될수록 논쟁의 긍정성은 점차 줄어들고 상대방에 대한 반론이 극단화되는 부정적 측면도 나타나게 되었다. 논쟁의 양측을 '식민지근대화론'과 '식민지수탈론'으로 구분할 때, 수탈론측에서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넘어 식민지 미화론 내지는 심지어 신식민사관으로 간주했고[27], 식민지 근대화론에서는 식민지시대 극심한 경제적 피해를 주장하는 관점을 '원시적 수탈론'으로 비난하였다. 그리하여 식민지시대 논쟁은 어느덧 도덕적 대립으로 전락하게 되었다.[28]
때문에 식민지 근대화론이 식민지 미화론으로 알려져 있는데, 해당 학자의 목적과는 별개로 식민지 근대화론 학문 자체로는 식민지 미화론 내지는 제국주의 옹호론과는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식민지 근대화론의 대표주자인 이영훈 교수는 일제하의 근대화는 제대로 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일제하의 조선 지배체제는 조만간 해체될 수밖에 없는 모순에 가득 찬 것이었다는 것이다.## 식민지공업화를 연구했던 김낙년 교수도 마찬가지로 6.25 전쟁 이후 한국의 공업화시설은 거의 대부분 유실되어 사실상 한국의 경제 성장은 제로에서 시작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
제국주의와 식민지 지배를 옹호, 변호하는데 식민지 근대화론의 실증 자료가 동원된다는 이유로 '식민지 근대화론은 식민지 경제의 미화에 목적이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애초에 이들은 지배의 당위성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미화'한다는 것은 식민지배의 당위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경제적인 실증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29]
게다가 김낙년의 저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상대적인 빈곤이나 분배의 불균등성의 문제까지 해결되었다고까지 주장하지는 않으며, 식민지적 근대화는 기존의 식민지 수탈론에서 주장하던 직접적 수탈이 아니라 근대의 이름을 앞세운 구조적인 간접 수탈 및 경제적 종속을 불러왔다는 점을 지적한다. 따라서 이들도 일제 식민지 근대화의 최종 목적이 한국의 경제적 종속과 완전한 병합에 있었음을 주장하는 것, 따라서 정리하자면 이들은 "(간접적) 수탈 중에도 근대화가 있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다만 이 논의들은 근대화를 지나치게 우선시한다는 지적이 있다. 식민지시대의 경제적 성장을 단순히 실증하는 것에 불과해도 문제는 근대화를 필연적이고 우월한 것으로 보아 "근대 = 선"으로 받아들이게 끔 한다는 것이다. 과거 식민지 미화론으로 근대화와 발전이 제국주의의 정당화를 위해 악용되어온 사례가 많으므로 그 저의가 의심받기도 한다.
후술할 정치적 논란은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실증적으로 재검토하는 것 자체에 문제가 될 것은 전혀 없다. 일부 진보 성향의 학자들도 여기에 동조했을 정도였다.[30] 그러나 식근론은 제국주의와 지배ㆍ억압의 관계를 옹호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현재까지도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5 반론
이에 대한 주류 국사학계의 반론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생산량이 느는 것보다 수탈량이 더 빨리 늘었다 - 쌀 생산량이 늘었지만 1인당 쌀 섭취량이 줄어들었다는 것에 근거한 주장.[31]
- 공장을 지었지만 기술은 안 가르쳐준다.[32]
- 철도를 지어서 교통을 편리하게 해서 물자를 일본으로 실어 나른다.[33]
- 관료와 공무원을 뽑았지만 대부분 하급 직원이었다.[34] 그나마 교사는 낫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조선인을 앞잡이로 삼아 '대일본제국의 인적자원'을 양성하기 위해 열어둔 길이었다. 그 '인적자원'도 결국 조선인 남자는 총알받이, 여자는…. 출세한 조선인도 있는데, 이들의 성향을 어떻게 보냐는 것이 논란이다.
- 일제 시대 도시 건설은 자원수탈과 전쟁물자운송을 위하여서 경부선철도를 축으로한 주요 도시위주로만 성장하였다.[35]
즉, 국사학계는 "좋은 소고기를 얻기 위해 축사를 개조해준 것이 소들을 위한 것이라 할 수는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고려대 정태헌 교수는 애초에 식민지 근대화론이 "경제성장=善"이라는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제국주의 세력은 보다 효울적인 수탈을 위해 식민지에 자본주의를 이식하는 이른바 "개발-수탈"매커니즘을 활용하는 경향을 띠며, 일본도 이러한 원칙을 충실히 따랐을 뿐이라고 한다. 즉, 수탈을 위해서라면 근대적인 공업화를 하기도 하고(흥남질소비료공장 등) 지주제를 때로는 약화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기존 국사학계의 약점이었던 "근대화=장밋빛 미래"라는 자맹론의 유물론적 허점을 잘 보완한 이론으로서, 현재 사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를 연구할 때 정태헌 교수의 인식을 기본 베이스로 하고 접근한다. 다만, 정태헌 교수는 일제시대를 거의 수탈위주로 초점을 맞추는 탓에 학술적으로는 여러 오류를 빚기도 한다.#
같은 경제사학계에서는 충남대 허수열 교수를 중심으로 반론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는 한국의 근대화는 일제시대가 아니라 해방 후가 기폭제였다고 주장했다.[36] 예컨데, 30~40년 동안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면서 1인당 생산량이 증가할 때 '근대적 경제성장'에 이른다는 사이먼 쿠즈네츠[37]의 경제성장이론, 농업 부문에서 공업으로 많은 노동력이 이동하여도 도시의 실질임금이 떨어지지 않고 상승하게 되는 루이스 전환점 그리고 중공업비율의 증가를 척도로 삼은 호프만의 산업이론이나 1차산업의 비중을 척도로 판단하는 클라크(Clark, C)의 학설, 지출중 식비점유의 변화에 주목하는 엥겔 계수등을 종합하여 볼때 이모든 것들이 변화하는 시기는 1960년대와 1970~80년대라는 것이다.
허수열 교수는 "해방과 함께 '식민지적 경제구조'인 고율의 소작료 관행이 해방이후 농지개혁으로 소멸하고, 독립적으로 농사를 짓는 자작농의 시대가 열리면서 농업발전을 이룩하였으며 이것이 산업화를 뒷받침하였다고 덧붙였다.
2013년 10월 6일, 충남대 경제학과 허수열 교수는 일제강점기의 경제발전이 실증적, 통계적으로 허점을 지적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이영훈 교수가 주장한 'V자형 변화설'을 문제삼으며 방법에도 해석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제시된 자료를 통해 엄밀하게 분석하면 조선후기의 농업생산성은 오히려 변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일제강점기 경제발전, 통계적으로 입증 안 됐다" 구체적으로는 아래와 같다.
"조선 후기 혹은 19세기 조선경제의 위기론은 자료상으로 입증되지 않은 과장된 서술" "다른 문제는 이러한 주장이 1940년∼1945년의 식민지경제 몰락기를 논외로 한다" "한국의 농업생산은 식민지기에 다소 증가한 것은 사실이나 1940년대에 농업생산은 궤멸했고, 1955년까지 미곡생산량 혹은 미곡의 단보당 생산량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여러 주장은 대부분 각종 통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 외견상 매우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식민지 근대화론에서는 통계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런 자의적인 해석을 토대로 조선 후기의 위기를 과장하고, 식민지시대의 개발도 강조하는 것" "식민지체제 하에서의 조선경제는 민족별로 대단히 불평등한 경제였다" "생산수단은 후기로 갈수록 소수 일본인의 수중에 장악돼 가고 있었다. 교육 역시 민족적 차별이 뚜렷해 식민지체제하에서는 조선인들의 인적 자본 형성도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정치적 독립은 이러한 식민지적 질곡을 일소시킴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의 근대적 발전을 가능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의 하나였다. 해방 이후 농업, 광공업, 무역 등 모든 분야에서 식민지시대와는 전혀 다른 발전이 가능해졌던 것" |
물론 허수열 교수가 반박하는 것에도 재반박이나 재반론이 있는 만큼 논란도 많다. 하나만 예를 들면, 김낙년과의 논쟁에서 도정된 벼와, 도정되지 않은 벼의 수확량을 근거로 소득격차를 자의적으로 추론하다가 김낙년에게 논파당한 적이 있다. 더불어 1940~1945년간은 통계자료 자체가 불완정하고 미비해서 타격을 입었다는 것은 맞으나, 마찬가지의 이유로 해당시기의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허 교수의 말대로 농업생산이 완전히 궤멸되었는지, 아니면 정체되었더라도 현상유지는 하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다.
6 논쟁
식민지 근대화론에 반대되는 논리를 펴는 사람으로는 허수열[38]과 김인호 등이 있으며 허수열 교수의 대표저작으로는 '개발 없는 개발'이 있다.
낙성대 경제연구소의 '한국의 경제성장', '수량경제사로 다시본 조선후기', 허수열 교수의 '개발없는 개발', 그리고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과 그외 김낙년 등이 펴낸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 등이 근대화론 관련 대표 서적. 허수열의 개발없는 개발은 경제사학지 및 역사비평지에서 김낙년과의 2005 ~ 2006년 논쟁으로 유명하다.링크
식민지 근대화론은 국내에서는 꽤 논란이 있었지만, 광복 이후 민족사학 일변도이던 우리나라 사학계에 새로운 시각을 가져와 다시 생각하게 만든 긍정적인 영향은 있다. 예컨데 자생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맹아론이 한국 사학계의 주류일 적에 대대적인 반론을 펼쳐 큰 파문을 일었다.
한편 브루스 커밍스처럼 일본의 행정관료를 중심으로 한 개발식민주의가 결국 한국 사회의 일부분의 과잉발전, 대부분의 저발전으로 귀결되었다고 규정하고 있는 학자들도 있다.
또 한편, 자본주의 맹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하여 모두 근대화를 지향하는 단선적인 역사 의식으로 보고 '근대' 지향에서 벗어나자고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주장도 있다. 대표적으로는 식민지로서의 입장과 근대적인 입장이 어떻게 얽혀 있었는가를 탐구하는 식민지 근대성론, 근대화는 인정하되 조선총독부의 '근대식' 권력이 식민지인들의 실질적인 종속을 유도했다는 점에 주목한 근대 규율권력론, 일상사와 문화사적인 차원에서 식민지에게 '근대'가 어떤 의미를 가졌는가를 탐구하는 미시사적 접근, 식민지 권력 밖의 정치 권력을 찾아내 의미를 찾고자 하는 식민지적 공공성론 등이 제시된 바 있다.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석의 경우, 각 학자, 학파마다 주장이 많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공통점은 '근대화=좋은 것'이라는 기존의 도식에 반대한다. 즉, 근대화를 모든 문명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라고 보는 관념을 부정할 수 있고, '근대화는 되었지만 그 근대화가 오히려 사회의 해악이 된 경우' 라거나, '산업화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회의 발전'도 가능하다고 본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점으로 보면 현재의 식민지 근대화론에 관한 논쟁 자체가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다.
예를 들어, 일제 식민지 시대에 한국 사회에 공업 인프라의 부설, 농업 생산량의 증대등이 일어났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입장과, 그런 변화가 도리어 한국인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는 그 반대입장은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점 내에서는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산업 인프라의 건설'은 은 사실관계의 서술이고, '그것이 대중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는 가치판단의 영역이니까. 말하자면, 도구를 만드는 것과 그 도구를 좋은 데 사용하느냐, 나쁜 데 사용하느냐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이미 '식민지 근대화는 근대화의 물적 기반에 한정된 주장이고, 이 근대화가 불균형한 형태로 이뤄짐으로써 사회의 건강한 성장을 저해한 바가 크다'는 점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근대화를 사회 발전의 필수적 요소로 여긴다면 이와 같은 주장은 '도리어 사람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어떻게 발전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반론에 부딪힐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만약, 발전=근대화라는 도식을 포기한다면 이런 모순은 사라진다.
다만 포스트 모더니즘,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 식민주의가 위태롭게 혼합된 이러한 관점들은 여러모로 오독되기 쉽다. 그러니 위키에서 간단히 읽은 것은 사전 지식인 셈 치고, 관련 텍스트를 직접 찾아 읽어 보는 것을 권한다. 이러한 논의들은 때로 '포스트 모더니즘적 장난질'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기존의 근대화론/수탈론이라는 이분법적 담론과는 또다른 모델을 접하게 해준다.
7 정치적 논란
식민지 근대화론의 문제점 중 하나는 학설에 정치적 가치를 집어넣으면 언제든지 식민지 수혜론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근대화라는 용어 자체가 의미가 모호할 뿐더러[39] 비교적 가까운 시기로서 현재 정계나 경제계와 연관성이 있느니 만큼 식민지의 근대화를 연구하는 학설이 정치성을 띄지 않는 것은 어려웠다.
그런데 학문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정치적 행태를 보이고 있는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이중적 태도는 학문적 순수성이 의심받는 상황이다. 예컨데 안병직과 이영훈의 정치적 발언이나 행보 때문에 비판 받는 경우가 있다. 일부 언론에서는 친일인명사전 등 비슷한 사례의 논쟁에 대해서 이교수의 발언을 인터뷰하는 식으로 엮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이영훈 교수나 뉴라이트 집단이 식근론에 공감하는 다른 학자들까지 싸잡아 뉴라이트로 몰아 이들이 반발하기도 하였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의 경우가 그러한데, 결국 비뉴라이트 학자들이 새로 쓴 책이 '근대를 다시 읽는다'이다. 이들은 뉴라이트가 보여주는 '국가주의'적 내셔널리즘이나 근대주의를 비판하며 포스트 식민주의적인 면모를 강하게 보인다. 초점도 경제만이 아니라 사회나 심성, 언론, 대중문화 등으로 다양하며 현재는 기존 민족주의 역사학과 뉴라이트 역사관을 싸잡아 비판하고 있다.
여기에 이영훈 교수의 '대한민국 이야기'나, 그가 동조한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에서 드러나는 친일부역세력의 옹호나 독재 옹호, 국가주의적 내셔널리즘 주장과 같은 '당위' 문제의 근거로 자신의 연구 성과를 이용하면서 정치 문제가 끊이질 않고 있다. 즉, 이영훈 교수는 자신의 논문에서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정치적 해석을 부정했으나, 실제 그는 자신의 다른 저술, 강연 활동에서는 지속적으로 정치적 해석을 유도하고 있어서 그 자신의 목적이 대단히 무색해지는 결과를 낳고 있다.
더불어 '경제성장'과 '부국강병'만으로 독재가 옹호된다면 일제의 식민 통치조차 '경제적 인적 기반 마련'을 이유로 옹호되고, 친일 세력에게 면죄부 논리가 될 수도 있다는 것도 문제된다.[40] 물론 위와 같이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닌, 이교수나 안교수의 전문적 논문은 또 별문제라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한편, 뉴라이트나 유사 계열의 정치집단에서 식민지 근대화론과 함께 일부 친일적 소지가 있는 내용들을 주장하고 있다. 이쪽 계열에서 해당 이론을 그러한 주장들과 함께 소개하는 사례가 있어서 식민지 근대화론이 그러한 이론들의 근거가 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혐의를 받고 있다. 또한 일본 우파 언론들이 이러한 식민지 근대화론의 주장들을 신나게 보도하면서 이러한 모습이 국내에 보도되어 반감을 사기도 했다. 최근 인기몰이를 하며 무라야마 담화[41]를 부정하려는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가 2013년 4월 24일 식민지 근대화론을 인용하면서 자국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42] 직접적으로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았으나 '서울대학교 교수'를 들고 있는데 서울대의 식근론 교수는 오직...
한때 이들을 지지하기도 했으며, 지금도 전문적 실증 내용에 국한해 공감대를 이루기도 하는 포스트 근대주의와 포스트 식민주의 성향의 역사학자들은(국문학자 등 타 전공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식근론자들이 정치적으로 드러내는 우파 성향이나 국가주의 성향, 근대주의 성향을 비판하며 기존 국사학계의 민족주의 사학과도 대비되는 자신들의 논의를 이어나가고 있다. 천정환이나 윤해동, 황병주 등이 유명하다.
사학계는 분명 식민지 근대화론에 반대입장인데, 그렇다고 또 근거가 없거나 무시될 만한 이론은 아닌지라 이걸 국사교과서에 반영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논쟁을 벌인 사례도 있다. 일부 식근론 사학자들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를 진행하고 있다. 2013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사태 참조.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아무리 객관성을 가지려고 해도 식민지 근대화론은 한일관계에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에 언제까지고 시비에 휩싸일 여지가 많다. 근거 자체는 사실일지 몰라도 특정 이데올로기 미화에 악용 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자본주의'와 '경제성장'이 절대선처럼 여겨지는 풍토 속에서 일제-독재 경제성장이 그 자체로서 나름의 '당위'를 가지기 쉬운 풍토라는 점, '경제성장' 자체를 선으로 보면서 독재의 인권탄압이나 학살을 옹호하는 분위기, 내셔널리즘에 휘말리고 있는 남북대치의 상황이나 일본의 극우파 대두와 같은 현실 문제 속에 민감한 내용을 다루는 이 이론의 폭발성이 문제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