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무개혁

1 개요

제국의 때 늦은 불꽃[1]
대한제국(조선)의 고종 황제1897년 광무 연호를 선포한 뒤 시행한 근대적 개혁을 말한다. 보통 1905년 을사늑약을 계기로 중단되었다고 여겨진다.

광무개혁의 성격을 단순하게 설명하면 절대왕정식의 개혁정책이다. 꽤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으며, 조선 구한말의 여러 개혁 시도 중 군사적 측면에서 나름대로 효과를 본 유일한 개혁이었다. 실제로 러시아와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하자 광무개혁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실제 광무 연호를 쓴 시간은 1907년까지이지만, 개혁 기간은 러일전쟁이 시작된 1904년 까지거나 길게는 을사늑약까지로 개혁을 위하여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었다.

광무개혁의 이념은 동도서기론이나 중체서용론에 기반을 둔 구본신참(舊本新參 : 옛것을 기반으로 새것을 참고한다)이었다. 단, 그렇다고 해서 대한제국이 갑오개혁 이전 옛 제도로 복귀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신분제 철폐를 뒷받침하는 법적 조치나, 근대적 조세 및 토지제도 운용, 아울러 탁지부를 중심으로 한 재정운영체계는 광무개혁이 갑오개혁의 성과를 일정 부분 계승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단지, 실제의 재정운영은 궁내부와 내장원이 주도를 하게되면서 있으나 마나한...

2 개혁내용

2.1 군사 부문

외세의 간섭없이 자주적으로 이룩한 군사정책(외세의 간섭 때문에 전에 있었던 갑오개혁을미개혁에는 군사에 관한 개혁은 거의 없었다.)으로, 고종은 예전부터 한 밀덕해서 개국 직후부터 무기를 사들였고, 실제로 시위대/친위대의 무기 수준은 한 때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을 능가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정작 무기의 운용에는 무지하여 상선에 대포 몇 개를 달았을 뿐인 배(양무호)를 군함이라고 사오기도 했다. 연안포함이나 정규프리깃도 아니고 상선대포만 얹은 시대착오적인 물건으로, 이와 같은 것은 서양에서 19세기 초중반 군사기술이 미개한 미개척지에서 강제로 물건을 팔기 위해 사용하던 물건[2]이었지 정규해군을 상대로 사용하던 것이 아니었다.

원래 이 배는 영국의 딕슨사에서 건조한 팰러스(Pallas)호를 일본 미쓰이 물산이 1894년 25만엔에 구입해 9년간 석탄 운반선으로 사용하였는데, 1903년에 조선 정부가 구조 수리비를 포함하여, 55만엔(당시 대한제국 돈으로는 그 두 배인 110만원에 해당)에 구입하였다. 출시당시 25만엔이었던 9년된 중고화물선을 가지고, 값을 깎긴 커녕 두배가 넘는 가격으로 인수한 것이었다.

더욱이 문제는 이 중고무장상선을 구입하는데에도 국방예산의 1/4 이상이 들어갔고, 이렇게 무리해서 구입한 군함(?)은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경술국치 이후 일제에 의해 수송선으로 쓰이다가 침몰했다.[3][4]수송용 상선을 함대로 굴리는 대한제국의 위엄

그밖에도 평소 귀가 얇은 고종이 무기상인이 사라는 대로 무기를 사댔기에 대한제국군은 엔필드나 레밍턴 롤링블럭부터 독일의 마우저 M1871까지 실로 다양한 무장을 하게 되었는데 총알 규격이 죄다 재각각이었기 때문에 보급에서 난항을 겪었다. 근대 무기를 얻으려고만 했지, 근대무기의 보편성과 통일성은 확보하지 못하였다. 무기의 보편성과 통일성의 중요성은 이미 이전부터 중요하게 여겨서 조선시대 문종도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고종은 주먹구구식 호기심으로 무기를 구입했기에 이런 점은 고려하지 못했다.

물론 애초에 외국과 계약을 해서 공장을 통하여 무기를 생산시킬 근대적 기술이나 지식, 자금등이 없었기 때문에 무기상에게 구매하는 것에 크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한계도 있었다.

어찌됐건 대한제국군은 무기만 마련했지 지도력은 부재하여 실전에서는 매번 털렸다. 경복궁이 일본군에게 포위당했을 때나, 을미사변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나마 지방의 진위대 군사력은 제법 쓸만했지만, 러일전쟁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고, 대개 후일 일본군과 함께 최익현의 의병과 동학당을 때려잡는 역할이나 했다. 군대가 해산된 뒤에도 정미의병전쟁에 합류해서 나름 도움은 되었지만 전세를 바꿀 정도는 아니었다.

2.2 경제 부문[5]

인삼을 전매 수출하고, 그 외에 목재, [6] , 소가죽[7], 면화, 금광의 을 수출했다. 독자적으로 채굴이 힘들 경우에는 채굴권, 벌목권을 넘겨줘서 수출한 부분도 제법 되었다.

여하간 이 덕분에 수치상으로는 1898년에 나라의 빚을 대다수 갚았다는 말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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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에야 겨우 공식반환된 호조태환권의 원판[8]

토지개혁(양전지계사업)도 부분적으로 진행했다. 이를 흔히 광무양전이라고 부른다.[9] 일부 지역에서 토지소유증서인 지계가 발급되고 토지의 소유주를 기재하였다. 토지의 소유주를 시주時主라고 부르고 이 사용범례를 칙령으로 반포하여 규정하였는데, 문제는 시주(時主)는 문자그대로 토지점유에 있어 '임시지주' 혹은 '임시점유자'로서 확실한 토지소유주로 지정된 자가 아니었다.[10] 게다가 지계작성 마저도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실제 토지소유자와 시주명이 다르고[11] 면적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고 기초적인 삼각측량은 시도조차 되지 않는 등 불철저하게 이루어져있던 상태였다.

그리고 광무양전과 함께 시행된 광무사검 당시 토지의 소유실태를 고려하지 않은채, 민간과 소유권리가 얽힌 분쟁지를 전부 국유지로 환수함에따라 전국적인 국/민유지 분쟁으로 불거져 커다란 민심이반을 불러일으켰다. 이야기인즉, 당시에 국유지였던 아문둔전(衙門屯田 : 관아의 토지)과 궁방전(宮房田 : 궁방이 소유한 토지 즉, 왕실이 소유한 토지)등은 실질적으로 관이나 궁에 의해 소작료만 거둬지거나, 아니면 관리가 되지 않은체 인접 농민들에 의해 경작되고 있어, 문서상으로만 국유지이지, 실질적으로는 경작중인 농민소유에 가까워 소유권이 복잡하게 얽힌 중층적 혹은 다층적인 소유상태였다.[12] 이미 광무양전이전 갑오개혁으로 이러한 토지를 구분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국유지로 편입하여 분쟁소요가 잇따랏는데, 광무양전때에는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내장원의 주도하에 무리하게 국유지편입을 시도하여(이른바 광무사검), 다층적으로 소유권이 얽힌 농지에서 경작민의 경작권과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아, 국/민유지 분쟁소요가 일어났고[13], 이는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벌이기 전까지 해소되지 못하였다.

금융과 화폐면에서는 은본위제도를 확립하였고, 이후에는 금본위제도와 근대적인 화폐발행까지 진행하였지만, 실제로 시행되지는 못해서, 결과적으로는 호조태환권 일부만 발행되고, 결과적으로는 백동화만 유통되었다. 국립은행설치계획도 있었지만, 재정적인 한계로 실제로 설치되지는 못했다[14]. 그나마 유통되었던 백동화는 주조가 남발되면서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불러일으켰다. 화폐의 품질도 불량했거니와, 화폐의 금속함량이나 품질이 균일하지 못하여 물가와 통화가치를 불안정시키는데 일조하였다. 이역시 일제때 화폐정리사업을 펼치어 대대적으로 구화폐를 신화페로 교환하여 정리하기 전까지 수습되지 못하여 화폐경제가 활성화되기는 커녕 물물거래로 회귀하였다.

더불어 원래 이 두 사업에 대해서는 조정 내에서도 반발 여론이 엄청났으나 고종이 직권으로 궁내부 재원을 동원해서 진행해버렸다.[15] 그러나 속도가 빨랐을지언정 황제의 독단적인 진행이었고, 또 고종이 막무가내로 해서 큰 문제가 생겼다. 그러니까 고종이 한 번 삐끗하면 그대로 삐끗하는 것이다또한, 대부분의 수출액은 황제나 채굴권, 벌목권을 가진 열강 상인들에게 돌아갔고 일반 백성들에게 별로 돌아가지 않는 덕에, 일반 백성들의 삶은 나빠지지 않는 게 다행인 지경이었다. 서양식 4개 연대를 갖출 수 있는 금광을 헐값에 넘기질 않나... 황제는 이렇게 해서 벌어들인 돈을 대부분 군비나 한성의 전기 회사 등에 쏟아 부었다.

그리고 일제가 을사늑약 이후 들어선 이후로는 다시 1300만원[16]의 빚을 졌고,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십 만 원 수준에서 운동은 중단된다. 사실 국채보상운동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우선 국채배상운동을 하는 것 자체를 일제에서 방해하였고, 국채배상운동을 알게 된 일제가 이전보다 더 많은 빚을 조선 정부에 떠넘겼던 것이다. 애초에 처음 생긴 빚도 조선 정부가 필요해서 빌린 돈이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후에도 필요하면 빚을 더 늘리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얼마를 모으든 무의미했다.

3 실패

3.1 재정충원의 문제점

무엇보다도 근본적으로 이러한 정책들은 정상적인 정부 예산으로 이루어지는 정책이 아니라, 황제의 내탕금에 의존해야하는 꼼수, 비상수단의 방식으로 이루어진 정책들이었다. 즉, 군대나 경제 등에 근대화가 시도되었으나 정부조직은 근대화는 커녕 세도정치이전 조선보다도 더 후진 측근 중심의 밀실 정치로 후퇴한 것이다. 하긴 12세에 즉위하여 경연 등 제대로 된 제왕 수업은 거치지 않고[17], 22세에 친정을 하기까지 보고 자란게 흥선대원군의 섭정이었으니 이미 답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경연의 실효성을 검증할 수 있을까?심지어 직접 벼슬을 팔거나, 원납전을 걷어들이기도 했다. 당시 고종의 공식적 비자금창고인 궁내부와 궁내부 산하 내장원 내탕금은 기존의 탁지부를 훨씬 능가할 정도로 커져 있었다. 정부 예산보다 황제의 내탕금이 훨씬 컸다는 말도 있으니 말해 무엇하리. 이를 바탕으로 대한제국 시기 고종은 좌충우돌 움직일 수 있었다. (일본) 제국에 맞서는 (황제) 일인 전쟁!

이 자금은 이후 국립은행 설립준비금이었다는 학계의 설도 있지만, 결국 러일전쟁의 발발로 국립은행 설치는 물건너갔기 때문에 고종의 주머니에 남아있었다. 고종 항목에서 보듯, 이 내탕금들이 밀지와 함께 의병활동을 촉진하는데 도움이 되긴 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런 간접적 방식은 고종이 직접 나서서 싸우느니만 못하게 효과가 떨어졌다. 이런 숨겨둔 쌈짓돈 내탕금은 도리어 경술국치 이후에 효과를 발휘했고, 고종의 망명 자금으로 쓰여질 계획도 있었던 걸로 보이나, 고종은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3.1 운동에는 기여했지만 그게 끝

이런 비정상적 방법을 취한 것은 이미 정부 조직의 수세권이 열강에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개혁을 위한 자금을 조세로 걷어봐야 열강에 뜯기기만 하니 내탕금이 열강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 수세권을 황제가 직접 가져가는 방식으로 대응했다는 것이다.[18] 그러나 고종과, 그 주변의 별로 없는 고만고만한 인재들은 크게 규모가 확대된 내탕금을 제대로 된 개혁에 쓸 능력이 없었다.

3.2 인재의 한계

사실 이 장면이 광무개혁의 가장 큰 문제이기도 했으며, 한계이기도 했다. 당시의 인재풀은 대부분 광무개혁 자체에 반발이 심했다.

3.2.1 대다수가 반대하는 개혁

  • 가장 곁에서 보좌해야 할 왕실은 가장 고종에 대해 반발이 심한 세력이었다. 고종에 대해서 외척에 대한 이야기만 많고, 종실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것이 그 때문이다. 흥선대원군계를 포함한 왕실세력의 태반은 오히려 반란을 도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최익현 류의 골수 수구파들은 말할 것도 없이 제외되는데, 이 사람들이 원래 근왕주의자들의 기틀이 될 사람이다.
  • 고종의 성향과 가장 비슷한 세력이라고 한다면 단연 온건개화파가 되는데, 이들은 고종 재위 초기에 비해 점점 숫자가 줄어든다. 이것은 갑오개혁 등 외세의 영향으로 전향해서 이기도 하지만, 갑신정변 등에서 떼로 죽어나간 것도 문제였다[19]. 단적으로 갑신정변-갑오개혁-아관파천을 거치면서 유력한 온건개화파의 이름을 떠올리기 어려워진다[20].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정동파니 춘생문 사건 관련자 등이고 여기에 포함되면서 부각된 인물이 바로 이완용이란 것에서 이 시기 인재풀이 얼마나 좁은지 알 수 있다.
  • 개화파로서 독립협회류의 소위 계몽된 지식인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너무 이상만 쫓았다. 이들은 근대화에 대한 이상만 가지고 일본과 주변국들을 근대화의 스승으로 추앙하였고, 당시 정부를 타도의 대상으로 보았으며 무지몽매한 민중들 역시 계몽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았다. 비단 일본 외에도 친러, 친청, 친미 등 다양한 선으로 자신들 중심의 판짜기와 자신들이 배운 이론의 현실화를 시도했다.
본문에서 언급한 독립협회의 무관세 자유무역이 대표적 케이스이다. 현대 경제학에서는 무관세 자유무역이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고 가르치기도 하지만, 당시 조선에서 그걸 실행하면 조선의 상공업은 몰락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조선의 수출품은 일본으로 나갈 , 면포 정도였는데 정작 상대국들은 그냥 관세 적용하고 있었다. (쌀은 일본에 비해 정말 너무 쌌다.) 강화도 조약 등이 불평등 조약으로 불리는 이유가 일방적인 무관세라는 것도 크게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봐도 이건 그냥 책상물림들의 망상 이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말 그대로 허공 속을 날아다닌 부류. 이들은 결국 을사늑약과 강제병합,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보다 철저한 투쟁으로 가거나 아니면 일본과 동화되는 길로 가는 것을 강요당하고, 대다수는 후자를 선택했다.
  • 광무개혁을 통해서 성장시킨 이른바 국가 장학생들과 학생들이 있다. 광무개혁에는 학교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대부분 전문기술 위주였지만 일본이나 미국으로 국비 유학을 보낸 경우도 존재했다. 문제는 이 사람들도 상당수가 유학기간에 친일이나 친미로 돌아서서 반정부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외부에서 만난 문화적 충격에 더해서, 듣고 배운 것이 그런 것 뿐이니 당연한 수순이긴 하다.

3.2.2 지지자들의 한계

그나마도 이용익, 홍종우 같은 충직한 측근은 드물었고 함량미달에 삽질이나 하는 측근들이 가득했다. 그나마 이 두 명도 황제의 전폭적인 지원은 받지 못했다. 홍종우는 결국 해보고 싶은 것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물러났고[21], 이용익만 내탕금 마련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망하고 만다.

외국인 측근도 마찬가지였다. 대한국국제를 작성할 당시의 외국인 고문미국인 의정부 고문 로젠드르(Charles W. LeGendre)[22], 법부 고문 미국인 그레이트 하우스(Clarens R. Greathouse), 탁지부 고문 영국인 브라운(John M. Brown) 등이 교전소와 법규교정소를 거치면서 참여하고 있었다[23]. 이들은 법규교정소 내에서 국제적 법 지식을 가진 소수의 인물들로 실무적 역할을 담당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의 도움은 대표적으로 1898년 4월, 로젠드르가 자문위원회 설립을 병행한 절대주의 정책을 주장한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민영화나 만국법에 근본적으로 호의적이었던 열강의 시각을 대변하는 인물들에 불과했다.

이걸 단적으로 보여준 인물이 호러스 뉴턴 알렌[24]이다. 바로 앞서 경제적 개혁 분야에서 언급한 전기 회사가 문제였는데, 교과서에는 이걸 긍정적인 사례로만 보지만 사실상 황제랑 친하다는 이유[25]로 알렌이 소개한 이들의 미국 회사에 전기, 전차민영화해버렸다[26]. 비록 1899년에 세워진 이 한성의 전차가 일본보다도 3년 빠른 것이고 [27] 한성의 근대적 면모를 일신했다[28] 할지라도, 실질적으로는 그저 높으신 분들만을 위한 이야기였다. 게다가 최초 개통도 아니었다. 이미 1894년에 일본 교토 시치조에서 후시미를 연결하는 6.6킬로미터의 전철를 도입했다. 한성이 최초 운운은 도쿄보다 교토에 먼저 전철이 세워진걸 모르고 하는 소리. 또한 한성에 전철을 세울 때 실무진들(설계자+운전수) 면면을 보면 전부 일본에서 온 교토전철 직원이었다. 그리고 알렌 등은 황제의 기대를 배신하고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전차비를 왕창 끌어올렸고, 졸지에 조선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파업 + 폭동이 벌어졌다.

3.3 시간과 역량 부족

거기에 더해 시간도 부족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대한제국 체제가 이 정도까지 길게 갈 것을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관파천 이후 조선에서 세력을 상실하던 일본이 이를 반전하기 위해서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것은 대부분 예상하고 있었고, 대다수는 러시아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다. 때문에 고종이 전쟁에 승리할 러시아와 어떻게 외교적 관계를 형성하느냐에 더 골몰하는 게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했다.

문제는 러일전쟁은 생각보다 미뤄졌지만 그렇다고 아주 미뤄진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결국 대한제국은 1부(負)=1아르(are), 1결(結)=1헥타르(hectare)로 전통적인 계량 단위를 서구의 미터법과 완벽히 일치시키긴 했으나, 양전지계사업을 완수하지 못했고, 국립은행 설치와 같은 장기 프로젝트는 시도하지 못했다. 문제는 당연히 정부가 멀쩡할 수가 없다는 것이고, 그 시간에 다 했으면 졸속 행정으로 끝났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이다. 러일전쟁 후에 시도했을 때는 이미 일본이 모든것을 장악해서 어떤 의미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광무개혁은 사법제도의 법제화[29] , 상업은행 설립, 근대적 토지 소유제도 실시 등을 추진했지만 제대로 이룬 것은 없었다.

러일전쟁에서 손도 못쓰고 발린 것은 군사력도 군사력이지만 재정력과 기타 등등의 문제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일본이 러일전쟁으로 인해 사실상 파산지경으로 갔으며[30], 실질적으로는 대러시아 정책에서 영국의 용병 노릇 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자금 소모가 엄청났다. 이 시기 일본과 조선의 인구와 산업기반 등을 고려하면 경제력의 차이가 엄청난데도 이 모양이었다. 러시아도 마찬가지였고, 이 시기 제국주의 정책 자체가 국력을 상당히 소진하는 정책이었다. 한 마디로 조선은 비교적 작았고, 너무 늦었다. 최소한 임오군란 ~ 갑신정변 시대에 있어야 했을 정책이 10년은 늦었다[31]. 그리고 러일전쟁이 시작된 순간, 대한제국의 운명은 정해졌다.

광무개혁은 뭔가 하려는 시도가 있는 개혁이었으나, 근본적으로 황제와 측근들 중심의 비상수단과 황제의 권위에만 의존한 막무가내 개혁이었다. 개혁은 지도자의 역량과 뒷받침 해주는 제도, 인재풀 그리고 과감한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시이다.
  1. 아예 효과가 없는 것만은 아닌, 그나마 이 당시에는 훌륭한 개혁책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미 시기를 놓친 뒷북성에 가까웠고 외부 상황도 상황이거니와 여러 가지 문제점이 겹친 까닭에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만 개혁이다.
  2. 예컨데 제네럴 셔먼호가 이경우에 해당한다.
  3. 이에 대해 당시 유행이었던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사야했다는 지적도 있는데, 양무호 취역은 1903년이며 드레드노트1905년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당시 대한제국 재정으로서는 구입도, 운용도 불가능하였다. 근대해군의 개념도 없는 나라에서 전함을 구입하라는 소리는.요즘으로 치자면 제대로된 해군도 없는 아프리카 소국에게 이지스함을 사라는 꼴이다. 아니 북한같은 나라한테 USS 엔터프라이즈함 사가라는 것과 같다
  4. 일설로는 고종의 기념일을 맞아 해외 인사들을 초청해 연회를 여는데 군함이 축포를 쏘아야 국가의 위신이 선다는 신하의 말을 들은 고종이 구입을 강행한 것이라고 한다.
  5. 대영제국 출신 고위인사였던 이사벨라 비숍이 쓴 '한국과 한국인들'이란 책에서 대한제국 직전 경제력을 서술한 부분을 살펴보면 이렇다. 1896년 조선에 입항한 화물선 자료. 1886년~96년간 조선의 전체 수출/수입량. 1895년~96년간 조선의 총수출량과 종류. 1895년~96년간 조선의 총수입량과 종류.
  6. 쌀의 경우 대체로 일본으로 수출되는 편이었는데, 이를 통해 부를 축적하여 신흥지주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7. 하야미 아키라의 '근세 일본의 경제발전과 근면혁명'에서 나오는 내용을 통해 당시 정황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개항기~대한제국기 시기 일본은 적은 면적에 인력을 많이 투입하는 조밀경작이 유행하여 소를 이용한 우경이 줄어듬에 따라 소를 키우는 농가가 점차로 줄어들어 개항기가 되면 조선으로부터 소가죽 등을 수입하는데 적극적이었다.
  8. 근대적 지폐를 발행하는 과정에서, 임시로 지급하려고 했던 공초이다.
  9. 197~80년대에는 김용섭의 주도하에 광무양전의 사업이 근대적인 지계사업과 근대적 소유권을 확보한 근대적 개혁정책으로 평가하는 학설이 있었으나, 8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조석곤, 배영순, 이영훈등의 학자들에 의해 반론이 제기되었다. 광무양전때 지급된 지계가 소유주나 토지면적을 제대로 기재한 것도 아닐뿐더러, 토지소유자의 존재를 명확히 규정한 것도 아니니 만큼 근대적 성격의 개혁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 근 최근에는 왕현종과 최윤오등의 사학자를 중심으로 토지대장연구반이 결성되어 설사 광무양전의 실적이 미비하더라도 그 정책의 성격은 근대성을 내포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광무개혁의 근대성을 부정하는 학론과 대립하고있다.
  10. 이 시주의 성격에 관하여서 논쟁이 있다. 조석곤, 이영훈, 배영순등 종래에 있던 자들이 펼치던 학설은(사실 추세적으로는 이영훈, 배영순, 조석곤의 학설은 신조류에 해당하나 이들의 쓴 논문이 1980년대 즉 30년전에 나온 것들이라..) 시주는 한시적으로만 토지점유권이 인정될 뿐이므로, 궁극적인 토지의 주인은 (조선의 정치적 전통으로 볼 때) 국가 즉 왕이므로, 왕토사상을 잔존시킨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실제로 광무정권의 재정은 왕실의 재정을 관리하는 궁내부와 내장원에 집중되었고,광무사검 당시에는 내장원 관할 국유지가 무리하게 확대편입되어 농민들과 큰 갈등소요를 빚기도 하는 등 황권강화를 경제적으로 뒷받침 하려는 시도가 많았기에 시주규정조차 황실재산증식의 차원에서 백성의 토지소유권을 한시적으로 제한 한 것이 아니냐는 것. 반대로 최근에 왕현종을 비롯한 토지대장연구반에 의해 대두된 다른 학설은 광무양전 이전에 작성된 토지문서인 '양안'에서 토지의 주인(지주)인 기주외에도 토지의 임시점유자로서 시時를 규정하고 있음을 주목한다. 대한제국의 광무양전은 특별히 민의 토지사유권을 제한하여 시주규정을 두었다기 보다는, 이 사용사례를 계승하여서 토지소유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시주규정을 채택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11. 일제때에는 이 지계가 아니라 사거래시 작성하였던 사문서인 문기(공적문서가 아니다)를 바탕으로 소유권 조사를 실행하였다
  12. 국유분쟁지는 크게 무토(無土)와 유토(有土)로 나뉘었는데 무토(無土)는 토지의 세금수입만 궁방과 아문둔전이 가지고 있는 사실상의 민유지였고, 유토(有土)는 궁방과 아문이 직접 매입하거나 관리하는 토지였다. 유토 중에서도 궁방이 매입과 관리를 다하고 있는 제1종유토와, 실질적인 관리와 개간이 농민에 의해 전담되어 민유지화된 제2종유토로 나뉘었다. 그리고 갑오개혁당시 사실상의 민유지인 제2종유토가 전체 유토의 2/3를 차지하고 있었다.
  13. 일부에서는 장장 5년간 투쟁해서 얻어낸 경우도 있었다
  14. 이 중간과정이 러시아와 합자한 한러은행 설치가 있었지만, 러시아의 이권 침탈로 받아들인 독립협회가 크게 반대했고 러시아의 의욕도 부족해서 엎어진다. 교과서에서는 러시아의 이권침탈을 막아냈다고 평가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과정에서 일본 국립 제일은행이 제일 이득을 봤다. 당시 대한제국은 국립중앙은행이 존재하지 않아서, 중앙정부의 자금 상당수를 일본 제일은행의 한양지점에 예금하고 있었고, 이는 일본상인들에게 대출되고 있었다. 때문에 한러은행 설치는 일본 제일은행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었는데, 독립협회가 이 한러은행의 설치를 반대하면서 무산되어 버렸다.
  15. 이런 점이 광무개혁이 엄청난 속도를 낼 수 있었던 배경이며, 이태진 교수 등이 광무개혁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16. 그 당시 정부의 1년 예산에 맞먹었다고 하니 오늘날로 따지면 최소 수천 억~최대 수십 조 원은 되는 셈이다.
  17. 사실 조선시대의 경연은 성리학 위주였는데 근대화와 서세동점이 일어나는 격변의 세계에서 도움이 되었을지는 의문이다. 사실상 일본도 사상을 갈아엎다시피 했다.
  18. 일제가 러일전쟁 이후 한반도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면서 한 조치 중 하나가 수세권을 황제에게서 대한제국 정부 조직으로 환원하는 것이였다. 그래야 고종의 돈줄을 끊고 일제가 대한제국 제정에 대한 실권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 급진개화파들은 1차적으로 자신들의 라이벌이었던 온건 개화파의 제거에 힘을 쏟았다. 단적인 사건이 민영익이 칼을 맞은 것이다.
  20. 그나마 있다는 것이 민영익, 김가진, 이용익, 홍종우 정도이다.
  21. 홍종우는 황국협회의 보부상을 동원해 한국 최초의 백색 테러를 일으키면서 만민공동회를 물먹였다. 결국 두 단체간의 폭력사태가 발생하자 원래는 독립협회만 해산하였다가 만민공동회가 재조직되어 황국협회의 행태를 비난하고 독립협회만 해체당한데 대한 반발이 생겨나자 고종은 그제서야 황국협회를 함께 해산시킨다. 독립협회의 입장에서는 황국협회 해산 후에도 자신들이 어용단체와 동급으로 해산되었다는 것에 기가 막혔지만, 당한 황국협회 입장에선 그게 아니었을 것이다. 뭐 이 이후에도 홍종우는 대한제국에서 관직을 맡으면서 이것저것을 하긴 하지만, 고종과의 시각차이를 보이면서 결국 좌천된다. 자세한 것은 홍종우 항목 참고.
  22. 이 사람이야말로 묄렌도르프와 함께 프로 외국인 고문이었다. 프랑스계 미국인으로 남북전쟁에도 참전했던 로젠드르는 이후 공로를 인정받아서 미국에서 나름대로 입지를 가지고 있다가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후 일본에서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조선을 침공할 것을 제안했다. 그런데 정작 대한제국에 참여해서는 일본을 경계하라는 조언을 했다. 본문에도 있지만 프랑스계 미국인이면서 고종에게 전제왕정을 제안한 것만 봐도 이 사람이 얼마나 프로페셔널한지 보여준다.
  23. 재미있는 것은 아관파천을 거쳤고, 프러이센의 영향을 받았으면서 러시아와 프러이센 출신 외국인 고문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전제왕정을 찬성한 인물들이 죄다 영국인, 미국인들이다. 외국인 고문이 전제왕정 찬성했다는 이야기에 그럼 러시아나 프러이센 같은 왕정국가겠거니 하던 이들은 이 부분에서 한 방씩 제대로 얻어맞게 된다.
  24. 광혜원을 세운 그 알렌이다. 이 광혜원이 제중원을 거치면서 세브란스 병원으로 변했다가 연세대의 근간을 이루기 때문에 평가가 우호적으로 나오지만, 그렇게 바람직한 인물은 절대 아니다.
  25. 사실 이걸 단순히 친하다로 이야기하지만, 알렌은 당시 주조선 미국 공사였다. 운산금광 건도 그렇고, 이 전기회사 건도 그렇고 고종이 알렌을 매수해서 조선을 독립국으로 두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보고하게 약을 친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가능하다. 실제로 러일전쟁이 있기 이전까지 알렌은 이쪽 주장을 꽤 강하게 해서, 심지어 루즈벨트와 대립을 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만 뇌물에 약한 알렌은 러일전쟁으로 대세가 기울고 고종이 자신에게 더이상 이권을 주지 못할 상황이 되자 친일로 갈아 탔다.
  26. 다만 당시 재정을 고려하면 국가가 설립해서 운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만일 그걸 할 돈이 있었다면 철도를 부설했을 것인데, 철도도 외국자본에 넘어가게 된다.
  27. 그러나 일본측 자료에서 일본 최초의 전차개통은 1894년이다.
  28. 사실 전차나 전등 같은 것은 개혁과 변화를 대중에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아주 효율적인 홍보수단이기도 하다. 이걸 고종의 흥미로만 설명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29. 대한국국제에서 상술했듯이 헌법은 법제화한 바 없다. 근대헌법의 기본은 3권분립과, 시민의 권리를 확보하는 것인데 대한국국제는 어느 조건도 충족치 못한다.
  30. 그러고도 러시아에 준 타격은 얼마 되지 않았다. 러시아가 대놓고 패배한 쪽은 일본이라며 배상금 지불 따위는 생각도 하지 말라고 강하게 나온 것이 아니다.
  31. 여기서 최소한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최소한이다. 즉, 광무개혁 때 진행한 개혁들이 실제 성과로 나오기 시작하는데 필요한 시간이 그정도는 필요하다라는 이야기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실제역사대로 터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지 않는 결과를 위해서는 최소한 흥선대원군 실각 직후에는 변화가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