틱광둑

1 개요

釋廣德 (석광덕)
Thích Quảng Ðức

1897년 ~ 1963년 6월 11일

베트남의 고승. 친가톨릭 성향의 응오딘지엠(고딘 지엠, 吳廷琰 오정염) 남베트남 대통령의 불교 탄압[1]과 독재 지향 정책 그리고 시위자 학살[2]에 저항하고자 1963년 6월 11일 불교 승려들의 침묵 가두 시위가 있을 당시 틱광둑 스님이 주변 승려들의 도움을 받아 가부좌를 튼 상태에서 소신공양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이 사진과 영상이 특보에 호외, 속보를 타고 전 베트남은 물론 전 세계로 일파만파 전파되어 나가게 되었다.[3]

2 소신공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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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행위는 정권에 저항한 분신자살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끝까지 가부좌를 풀지 않고 비명조차 지르지 않는 틱광둑의 행동은 종교적인 열망을 기반으로 하지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이 느끼는 고통 중 최고순위가 작열통(몸이 불에 탈때 느끼는 고통)인데, 죽음에 이를 때까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태연하게 견딘다는 사실은 초인적인 인내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행위이다.

소신공양을 감행하기 이전에 제자들에게 "앞으로 넘어지면 흉한 것이니 해외로 피신해야 하며, 뒤로 쓰러지면 투쟁이 승리할 것"[6]이라는 말을 남겼다. 동영상을 보면 소신공양 중에 불길이 거세지자 쓰러질 듯 앞으로 기울어졌으나, 마지막 혼신의 힘을 쏟아 다시 가부좌 자세로 정좌하며, 결국은 뒤로 쓰러진다.[7] 이 엄청난 장면에 경찰들까지도 넋을 잃고 멍하게 서서 스님을 바라 보았고 주위의 승려들은 틱광둑에게 일제히 절을 올렸다.

소신공양이 끝난 후 그의 법체는 다시 한번 소각로에 넣어져 8시간 동안 화장(火葬) 되나, 그의 심장은 전혀 타지 않았다고 하며,[8] 이후 남베트남 정부에서 파견된 비밀경찰이 황산을 뿌려 훼손을 시도했으나 이마저도 실패하며, 금속 용기에 구리줄로 봉인하여 스웨덴 은행에 맡겨졌다가 이후 하노이 국립은행에서 소장중이라고 한다.

3 영향

이로 인해 불교 신자가 대다수인 베트남인과 응오딘지엠 정권은 반목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사상이고 뭐고 별생각 없던 사람들조차 남베트남 정권에 반감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응오딘지엠의 동생인 응오딘누의 마누라 쩐레수넌[9] "마담 누" 의 바베큐 드립과 "그래봤자 눈도 깜짝 안할거다" 라는 등의 허세와 안드로메다적 발언은 뿌리 끝까지 부패되어 있던 남베트남 정권의 무능함에 베트남 사람은 물론 남베트남 정권을 지원하던 미국 정부까지 대폭발[10] 하게 해서 결국 미국은 남베트남 군부를 사주하여 응오딘지엠 정권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이 사진이 미국 언론에 보도된 덕분에 남베트남의 실상이 미국 대중에 알려져 착실히 베트남 파병을 준비하던 미국은 부패 독재 정권을 도우려 전쟁을 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1964년 통킹만 사건이 일어난 뒤에야 본격적인 개입을 시작할 수 있었다.[11]

다만 이후에도 명분없는 전쟁이라는 꼬리표는 미국을 끝까지 괴롭혔으며, 결국 대규모 학생이 참여한 반전 운동과 유럽의 68혁명을 낳았다. 그리고 이로 인해 미국은 더 이상 베트남 전쟁을 진행할 수 없어 중도포기했고 그 이후 1973년에 미국은 징병제마저 폐지했다. [12]

베트남전의 시작과 끝을 각각 한 장의 사진으로 표현한다면 틱광둑의 소신공양 사진으로 시작하여 소녀의 절규로 끝나지 않을까. 왓치맨(영화)에서도 오프닝에서 베트남전을 상징하는 TV 영상으로 위 장면이 나왔다.

또한 이 사진은 서양의 발달된 물질문명으로 동양을 농락할 수 있다고 여겼던 서양 세계를 전율케 만들었다. 베트남 전쟁의 미국 패배는 이미 이 순간 결정되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을 정도. 이러한 의미에서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의 앨범자켓으로 쓰이기도 했다.[13] 틱광둑의 소신공양 이전까지 동양의 이미지는 단순히 미개하고 개화되지 않았으며 전근대적인 동네라는 인식 정도였지만, 이 일 이후 서구 지식인들은 과연 서구의 물질문명이 동양의 정신적 문화의 가치를 압도할 수 있는지에 대해 본질적으로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14] 이 일이 있은 후 1970년대부터 서구에는 도리어 뉴에이지와 같은 반동적 흐름이 나타났는데 이것도 아주 무관하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세간에 떠도는 유명 어록 중에는 마틴 루터 킹이 이 사건을 거론하면서 남긴 말도 전해지고 있다.

"...1963년 베트남 스님들의 소신공양은 서구 기독교의 도덕관념이 이해하는 것과는 아무래도 좀 다릅니다. 언론들은 그때 자살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그 본질을 살펴보면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저항 행위도 아닙니다. 분신 전에 남긴 유서에서 그 스님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압제자들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고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베트남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4 기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건이지만, 어째 한국에서는 그리 기억되는 사건이 아니었다. 반공주의의 영향과 베트남 전쟁으로 이해 경제성장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던 한국의 상황 상 베트남 전쟁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허용하지 않았던 분위기 때문.

또한 80년대 반공영화 '지옥의 49일'에서 북한군에 항거하던 신부는 십자가에 매달고 총살하고 스님은 화형시켜 죽이는 묘사 장면이 나온다. 틀까지 달릴 정도로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충격적일 수 있는 이 장면을 당시 독재정권의 교과과정에 의해 국민학교에서 교육목적으로 당당하게 틀어줘서 아이들은 사람이 타죽는 영상을 봐야 했다.
  1. 심지어 불교기를 거는 것조차 위법행위로 규정했다고 한다.
  2. 불교 승려만 20여명이 죽었다고 한다.
  3. 한국에도 1963년 6월 12일자 경향신문이 소식이 보도되었다.
  4. 흑백으로 찍힌 사진을 상상력을 동원해 컬러로 구현한 사진. 사진과 영상이 전 세계로 보도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소신공양의 사례일 것이다.
  5. 만 19세 미만은 볼 수가 없는 영상이다. 성인인증을 해야 한다.
  6. 그리고 정말 이 말은 중의적인 의미로 예언이 되고 말았다. 1차적으로 베트남 불교의 투쟁이 그의 소신공양으로 승리했고, 2차적으로 호치민의 베트남 공화국 (북베트남)의 "투쟁"이 베트남 전쟁 승리로 "승리"하였으며, 3차적으로 그런 베트남이 개혁개방을 하면서 공산주의의 특성으로 인한 종교의 탄압이 약해지면서 베트남의 종교 인구 (특히 불교와 개신교)가 증가했다.
  7. 이건 정말 자유에 대한 갈망이 낳은 기적적인 일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인간의 근육은 구부리는 근육이 펴는 근육보다 많기 때문에, 소사체는 근육들이 수축해 자연스레 안으로 오그라들기 때문. 정말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고통 속에서 최후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서 몸을 펴고 죽은 것이다. 이와 관련된 예제로 자해공갈죄 범죄의 경우 "뒤로 쓰러졌다"고 하면 일반적으로 자해공갈 피의자와 옹호자의 증언 신빙성이 급감할 정도이다.
  8. 오늘날까지도 심장만큼은 따로 남아있는데, 심장이 숯이 되어 남았다는 얘기도 있고 전혀 타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다.
  9. 1924~2011. 남편이 참혹하게 사살당할때 얼른 달아나서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등 떠돌면서 살다가 갔다. 죽을 무렵에 고향에서 죽고 싶다고 애원했으나 베트남 정부나 여론은 "50년 가까이 지났어도 당신 죽일 사람이 많으니 그냥 해외에서 죽어라. 시체조차도 베트남에 오면 도저히 멀쩡할 수 없을테니까" 라고 차디찬 반응을 보였다. 결국 로마 한 초라한 호텔에서 쓸쓸하게 죽고 이탈리아 공동묘지에 대충 묻혀졌다.
  10. 사건으로부터 시간이 많이 지난 뒤에 달렸을 위 영상의 댓글을 보면 저 여자에 대한 욕설이 99%일 정도이니 당시의 반응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11. 하지만 통킹만 사건은 1995년 미국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S. McNamara)의 고백으로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사건의 진상을 일부 조작했음이 드러났다.
  12. 물론 이건 밀턴 프리드만등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공도 있었지만
  13.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에서 "머신"은 "기계"로 대표되는 서구 문명 전반을 뜻하기 때문.
  14. 이걸 두고 동양의 정신 문명이 승리했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일본 제국이 옥시덴탈리즘을 내세우며 정신 문명이 우월하다는 선전과는 엄연히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