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벨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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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러시아 제국 차르
예카테리나 2세파벨 1세알렉산드르 1세

파벨 1세 페트로비치
Павел I Петрович
생애 : 1754년 10월 1일 ~ 1801년 3월 23일(46세)
재위 : 1796년 11월 17일 ~ 1801년 3월 23일(4년)

1 즉위 전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12번째 차르다. 표트르 3세예카테리나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예카테리나가 바람피워 낳은 아들이라는 카더라가 있었으나 별 근거는 없다. [1]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떨어져 옐리자베타 여제 밑에서 자라났다.

아버지가 어머니에 의해 폐위당한 후 줄곧 황태자로 있었으나 어머니의 정적으로 위험한 위치에 있었으며 실제로 예카테리나 2세 즉위 초에 정통성을 들어 여러 반란이 일어났기도 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파벨의 아버지이자 예카테리나의 남편인 표트르를 축출하고 당시 9세였던 파벨이 어린 점을 들어 자신이 통치자가 되었지만 파벨을 새 차르로 즉위시키지 않고 섭정으로 머물지 않은 채 자신이 직접 차르가 되어 통치했다.

애초에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떨어져서 성장한데다가 여러 정치적 입장이 미묘하기 때문에 불편한 관계이긴 하였으나, 예카테리나 2세도 낳은정이 있기 때문에 아예 아들과 관계회복을 시도하지 않은건 아니었다. 유일한 적자 파벨을 위해 며느리 간택 때 미모를 고려하여 아들과 함께 직접 간택했고 많은 자금을 하사하여 저택과 취미 생활이던 밀덕질에 돈을 펑펑 쓰게도 해주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관계에 타격을 준건 푸가초프의 난이었다. 3년여를 끌며 남러시아를 초토화시킨 농민 반란에서 우두머리 푸가초프가 자신을 표트르 3세라 자처하며 파벨을 옹립하겠다고 반란의 명분으로 삼았기 때문. 이 때문에 모자의 사이는 서먹해졌고 둘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여러 야심가들이 카더라 통신을 배포하면서 험악해졌다. 더군다나 이런 카더라 때문에 아들의 정사 개입을 원천 차단했고 파벨은 수도에서 떨어져 나와 정사에 배제되어 예카테리나 2세 치하에 찬밥신세였던 신하들을 측근으로 삼았다.

2 즉위와 치세

어머니는 파벨의 장자 알렉산드르가 태어나자 러시아 전통에 따라 부모에게서 아이를 빼았아 자신이 길렀다. 알렉산드르는 역시나 부모와 별 정없이 컸고 예카테리나는 10여년 전부터 파벨의 장남이자 자신의 손자인 알렉산드르를 계승자로 하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으나 뜻을 이루진 못하고 황태자가 파벨 1세로 즉위하게 되었다.

즉위하자마자 어머니와 관련된 모든 것을 부정하려 했고, 러시아 궁정에 만연한 프랑스풍은 물론 외국의 풍습과 물건까지 금지하려 했다. 파벨 1세의 말에 따르면 "러시아에서 귀중한 것은 자신과 자신의 군대와 자신과 이야기하는 사람 뿐"이었다. 다만 그 사람도 가치있는 것은 이야기하는 그 순간 뿐... 아버지 만큼은 아니지만 정신적으로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1797년 대관식을 치르자마자 제위계승법을 발표해 장자계승원칙을 확립시켰다. 그전까지는 차르가 생전에 직접 후계자를 지명하는 방식에서 서유럽처럼 법령으로 만든 것은 이전보다 진일보한 것으로 왕위계승자를 사전에 확정하고 정치적 혼란을 막는 조치로 업적이라면 큰 업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앞서 어머니 치세에 대한 반발로 자신을 건너뛰어 황위계승을 하려는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외교정책에 있어서 프랑스 혁명을 극도로 증오하여 사상은 물론이고 프랑스풍의 옷까지 규제했다. 이 당시 러시아 최고의 군인 중 하나로 꼽히는 알렉산드르 수보로프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기도 하고 나폴레옹에게 몰타를 잃어서 방황중인 가톨릭 몰타 기사단의 기사단장이 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 쳐발려서 굴복한 유럽 나라에서 대인배 취급을 받았으나 곧 러시아 빼곤 죄다 프랑스에 굴복하였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강화에 응해야 했다. [2]

국내에선 폭압적인 정책으로 인기를 잃고 있었다. 무엇보다 귀족들의 특권을 제한하는 것으로 많은 반발을 샀다. 전대 차르이던 예카테리나 2세가 재임 시절 자신의 취약한 정통성을 군대와 귀족의 인기를 얻어 만회하려고 국가 소유의 농노까지 마구 퍼주면서 귀족의 농노제 특권을 강화시켰는데 파벨은 일단 예카테리나 여제 시절 총신들에게 뿌려진 국가소유 농노들을 환수하고 여제의 애첩들을 궁정에서 쫓아내는 한편 당시 일주일에 4일간 지주에게 봉사해야 하는 농노의 의무를 3일로 단축시키고 남는 시간에는 국가농장에 투입하려 했다. 단순 산술적으로 지주들의 수입이 4분의 1은 줄어드는 격. 게다가 군대에는 엘리자베타 여제 이후 독일풍이라면 알레르기 돋는 러시아 군대에 자신의 취미였던 프로이센 복장을 입히고 군제마제 개혁하려 했다. 이러니 공공연히 귀족들 사이에서 쿠데타 카더라가 돌았고 반대파에선 의심많은 파벨의 의심을 더 자극하려고 아내와 아들 알렉산드르와 콘스탄틴까지 차르를 죽이려한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이에 파벨은 가족들을 궁정에서 내쫓는다. 이것이 치명타가 되는데...

3 암살

차르의 의심으로 인해 자기 가족들과 분리된 차르는 자신의 호위연대를 궁에 상주시켜 놓고 있었는데 마침 호위연대장을 출타시킨 그날밤 사건이 터졌다. 궁에는 이미 내통자가 있었고 새 차르치세에 쫓겨난 귀족들이 허락도 없이 궁에 들어온 것. 사건은 치밀하다기보다 우발적으로 일어났다. 차르가 오기전 술에 대판 취해서 서로 눈치만 보다가 차르가 옆방에 들어가자 몸으로 막고 차르에게 퇴위 서류에 사인하라고 강요했으나 차르가 화가 나서 거부하며 나가자 물러서기까지 했다. 그러나 예카테리나 시절 애첩으로 총애받다가 쫓겨난 신하가 술이 거하게 취해서 용감하게 파벨을 태클(?)로 넘어뜨린 다음 금속상자로 관자놀이를 내리쳤고 놀란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버닝겐 백작이 주도했다곤 하는데 영국의 지원설도 있고 단독적인 범행은 아니었다. 이미 인심을 잃은건 오래 되어서... 후일담으로 버닝겐 백작은 소식이 알려지고 3일 연속 잠도 못자고 울고 있는 알렉산드르에게 그만 울고, 통치를 하십쇼! 라 일갈했다고 한다. 후에 알렉산드르는 쿠데타 가담자들을 포상하지도 않고 추방하지도 않고 그냥 면직처리만 했다. 이것이 알렉산드르의 솔직한 심경이었을듯.

아들 알렉산드르 1세와 동생 콘스탄틴은 아버지 파벨 1세에 대한 음모를 사전에 알고 있었다고 한다. 암살까지 동의했는지는 현재까지 불분명하다고 하는데 최소한 아버지의 퇴위까지는 동의했고 "해치지는 않는다" 정도로의 동의가 있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덕분에 알렉산드르는 어머니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태후(원래 이름은 조피 도로테아)에게 부친을 살해했다는 강한 의심과 심한 질책을 들었고, 치세 내내 아버지를 죽였다는 죄책감과 함께 어머니를 거스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파벨 1세는 자신을 암살한다는 음모론에 빠져 황후와 이혼하고 자신의 정부와 재혼하여 황후에게서 낳은 알렉산드르와 그의 형제들의 계승권을 박탈하려는 시도까지 했으므로 알렉산드르에게는 아버지의 암살을 저지할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4 평가

최근까지는 예카테리나 여제와 알렉산드르 1세에 가린데다가 짧은 치세에 암살당했기 때문에 러시아에선 부정적인 평가가 대다수였다. 그러나 그가 진지하게 개혁을 원했는지는 차지하고서라도 농노제를 건드린 것만으로 영국같은 자유주의 국가에선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고, 톨스토이도 소설에서 농부들의 대사를 통해 "파벨 황제가 살아계셨더라면 우리가 더 평안했을 텐데" 드립[3] 나오기도 한다. 예카테리나와 알렉산드르 모두 자유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나 즉위 후엔 어른의 사정으로 반동적으로 변모하는데 긍정적인 평가가 많은 반면 파벨은 아버지와 닮았다(?)는 까임 덕에 제대로 된 평가나 연구가 좀 부족한게 사실.

5 후손

독일 출신의 나탈리아 알렉세예브나와 결혼했으나 그녀는 자녀 없이 1776년에 사망했고, 후처와의 사이에서 장남 알렉산드르(1777년생), 차남 콘스탄틴(1779년생) 이후 알렉산드라(1783년생), 엘레나(1784년생), 마리아(1786년생), 예카테리나(1788년생), 올가(1792년생), 안나(1795년생) 등 딸만 6명을 두다가 3남 니콜라이(1796년생)와 4남 미하일(1798년생)이 태어났다. 그러나 올가는 1795년에 요절했고 알렉산드라와 엘레나는 출산 중에 죽었다. 더군다나 파벨 1세 이후로 살리카법이 개정되면서 로마노프 왕조의 계보는 니콜라이 1세의 계보로만 이어졌다.

5.1 가족에 대한 일화

딸 가운데 넷째는 나폴레옹이 후처로 삼고 싶어했는데 유럽의 폭도떼 두목(?) 나폴레옹 소리에 기겁한 황태후가 강력하게 반대했고 알렉산드르 1세가 얼른 자신의 이종사촌 올덴베르크 대공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버렸다.

당연히 나폴레옹에게 거절 편지를 보내야 했는데 당시 높으신 분들 예법은 직접적인 거절이나 비난을 하지 않기 때문에 마흔 먹고 후계자가 급한 나폴레옹에게 전한 말이 "넷째 여동생 대신 14살 난 막내 여동생이 있는데 성인으로 장성할 때까지 기다려달라" 지곤조기? 였고, 그나마도 편지가 도착한 것도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를 쳐바르고 빈에서 프란츠 2세의 딸 마리아 루도비카 (마리 루이즈) 에게 청혼하고 나서였다. 당연히 나폴레옹 이를 꽤 불편하게 받아들였고 호사가들에겐 if 떡밥으로 나폴레옹에게 순순히 여동생을 조공으로 바쳤으면 러시아 원정도 없었고 나폴레옹의 몰락도 없고 유럽의 역사가 바뀌었을거다 하는 카더라가 퍼지기도 했다.
  1. 무엇보다 아버지와 생김새와 성격이 비슷하고 표트르가 지능이 떨어져도 자기자식도 못알아볼 정도의 백치는 아니었다. 엘리자베타도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었고. 후대에 예카테리나가 여러 남첩을 두고 문란한 것을 두고 공격하여 생긴 카더라로 보는게 유력하다.
  2. 프랑스와 평화협상으로 쫓겨났다는 서술이 있는데 전혀 아니다. 1795년에 프로이센이 바젤 화약으로 맨처음 굴복했고 오스트리아는 1797년 캄포모르니오 조약으로 더 일찌감치 굴복했다. 1799년에 2차 대프랑스 동맹에서 이탈하긴 하는데 스위스 전역에서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못받고 취리히 전투에서 발리고 나서 어쩔 수 없이 강화했다.
  3. 톨스토이는 저서 전쟁과 평화에서 주인공 대사로 "위대한 예카테리나 대제" 드립을 치기도 하지만 예카테리나가 농노제를 강화한 것 때문에 소설 밖에서 개인적으론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