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노프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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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노프 왕조의 깃발로마노프 왕조의 문장

1 개요

1613년부터 1918년까지 러시아 제국을 통치한 왕조.

2 상세

시조는 의외로 러시아계가 아닌 독일의 올덴부르크 귀족 출신인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코빌라(Андрей Иванович Кобыла)라고 하는데, 14세기 무렵 프로이센(당시 튜튼 기사단)에서 러시아로 이주해 왔다고 한다. 14세기면 러시아가 아직 몽골족의 치하에 있을 무렵인데 이때 건너왔다는 것은 뭔가 말 못 할 사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반 4세의 아내가 이 로마노프 가문 출신으로, 둘의 결혼 때문에 차르의 지위를 계승할 명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후에 코빌라의 7대손인 미하일 니키티치 로마노프(Михаил Никитич Романов)가 1613년 러시아의 여러 귀족들의 추대로 제정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차르(짜르 Царь = 황제)로 추대 받으면서 로마노프 왕조의 역사가 시작된다.

로마노프 왕조의 성씨에는 슬픈 전설이라기보다는 역사가 깃들어있으니 다음과 같다.

안드레이 코빌라의 아들은 표도르 안드레이비치 코빌린(Фёдор Андрейвич Кобылин)으로, 그 아들인 이반 표도로비치 코쉬킨(Иван Фёдорович Кошкин)은 코쉬킨으로 '코빌라'를 썼는데, 러시아식으로 성을 차차 바꿔나갔기 때문에 3대의 성이 제각각이다. 이반 대부터 코쉬킨으로 정착되었는데, 이반의 아들인 자하리 이바노비치 코쉬킨(Zahari Ivanovich Koshkin)이 무슨 큰 공을 세웠는지 자하리의 아들 유리 자하리비치 코쉬킨(Juri Zaharievich Koshkin)이 그의 자녀들 대부터 성씨를 모두 '자하리-코쉬킨(Zaharin-Koshkin)'으로 바꿔버렸다.

하여 유리의 아들인 로만 유리비치 자하린-코쉬킨(Roman Jurievich Zaharin-Koshkin)은 가만히 있나 싶었더니 아들인 니키타 로마노비치 자하린-유리프(Nikita Romanovich Zaharin-Juriev)대부터는 아예 '코쉬킨'을 버리고 자하린-유리프로 성을 또 갈아치운다. 그리고 니키타 로마노비치의 아들인 표도르 때 드디어 로마노비치에서 따 온 로마노프로 성씨를 완전히 굳히고 다시 그 아들 미하일부터 로마노프 왕조를 이어간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코빌라 (Андре́й Ива́нович Кобы́ла / Andrei Ivanovich Kobyla)
  • 표도르 안드레예비치 코빌린 (Фёдор Андре́евич Кобылин (Ко́шка[1]) / Fedor Andreevich Kobylin)
  • 이반 표도로비치 코시킨 (Иван Фёдорович Кошкин / Ivan Fyodorovich Koshkin)
  • 자하리 이바노비치 코시킨 (Захарий Иванович Кошкин / Zakhary Ivanovich Koshkin)
  • 유리 자하리예비치 코시킨-자하린 (Ю́рий Заха́рьевич Ко́шкин-Захарьи́н)
  • 로만 유리예비치 자하린-코시킨 (Рома́н Ю́рьевич Заха́рьин-Ко́шкин / Roman Yurievich Zakharyin-Koshkin)
  • 니키타 로마노비치 자하린-유리예프 (Никита Романович Захарьин-Юрьев / Nikita Romanovich Zakharyin-Yuriev)
  • 표도르 니키티치 로마노프 (Фео́дор Ники́тич Рома́нов / Feodor Nikitich Romanov)
  • 미하일 표도로비치 로마노프 (Михаи́л Фёдорович Рома́нов / Mikhail Fyodorovich Romanov)

원래 슬라브 계통 민족들이 류리크 왕조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고리 류리크비치같이 성을 따로 안 만들어 살아온 기간이 다른 민족들에 비해 오래되었기에 +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아[2] 저런 괴악한 역사가 진행되었다고 보면 편하다.

1762년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차르 옐리자베타가 사망함으로써 직계 혈통은 단절되었다. 그 뒤를 이어 표트르 3세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고토로프 왕조가 시작되었으나 그대로 로마노프 왕조로 여겨진다.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가문과 비슷한 경우.

남자 친족들은 대공(Grand Duke), 여자 친족들은 여대공(Grand Duchess) 칭호를 썼다. 그러다 1886년 알렉산드르 3세 때부터 Grand Duke는 황제의 아들과 친손자, Grand Duchess는 황제의 딸과 친손녀, 그리고 대공의 정식 부인에게만 쓰도록 했다. 그 외의 친족은 그냥 Prince/Princess. 일본 황실친왕/내친왕과 왕/여왕의 구분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현재 로마노프 가문의 실질적 시조인 표트르 3세때에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19세기경부터는 이 가문에 미남 미녀가 많기로 정평이 난다. 그런데 그에 비례해서 경박하고 방종한 생활을 하는 황족이 늘어나고, 외모가 뛰어나지만 도덕적으로 문란하다는 로마노프 가문의 이 평판은 제정 러시아가 몰락할 때까지 바뀌지 않았다. 이에 대해 알렉산드르 2세의 딸로 러시아 황녀인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3]은 자신의 딸들에게 '네 사촌들이 그 잘생기고 예쁜 얼굴로 문 뒤에서 시종들과 무슨 짓을 하는지 알게 되면 놀라 뒤집어질 거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3 연혁

3.1 초기 역사부터 표트르 1세까지

초대 황제인 미하일 1세(재위 1613~1645) 이후 표도르 3세가 죽은 뒤 제위를 놓고 다소의 혼란이 일어나다가, 1682년 유명한 표트르 1세(대제, 재위 1682~1725)가 즉위하면서 수습된다.

표트르 1세는 강력한 황제권을 추구해 러시아 절대왕정의 기틀을 다졌으며, 적극적인 서구화 정책으로 러시아의 체질을 바꿔놓으려 했다. 또한 이를 통해 향상된 국력을 바탕으로 스웨덴과의 북방전쟁(1700~1721)을 치러 발트해로 나가는 통로와 발트 3국, 핀란드 등을 정복하였고,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해 모스크바를 대신해 러시아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북방전쟁을 승리로 이끈 직후인 1721년에는 모스크바 공국의 이름을 러시아 제국으로 바꾸면서 본격적으로 열강으로서의 러시아의 등장을 알리기도 했다. 이때 새 수도를 건설하기 위해 막대한 노동력이 투입되었고, 그 일대의 혹독한 추위와 식량부족, 과중한 노동으로 많은 백성들이 죽어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시체 위에 세워졌다는 말이 생겨났다.

3.2 여제 시대

1725년 표트르 1세가 사망한 뒤 또다시 제위를 놓고 정치적 혼란이 일어났는데, 어린 황제들의 급서로 중간중간마다 많은 여성 황제가 권력을 잡았다. 예카테리나 1세는 표트르 대제의 아내로서 문맹이었기에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 했지만, 안나 여제는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처벌하며 러시아 정교회 중심의 공포정치를 펼쳤다. 이후 당대 유럽 최고의 미녀로 불리던 옐리자베타(재위 1741~1762, 표트르 대제의 딸)가 즉위했다. 그녀의 치세 20년 동안 러시아는 안정을 회복하여 7년 전쟁에서 그 힘을 과시하고 그 다음에 이어진 팽창의 시기를 맞는다. 다만 옐리자베타는 결혼을 하지 않아서 엘리자베타의 사망으로 로마노프 왕조는 단절된다. 표트르 3세부터의 로마노프 왕조는 사실 덴마크와 스웨덴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고토로프 가문이다.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처럼 원래 가문명 뒤에 로마노프를 붙였다.

그 직후 즉위한 옐리자베타 여제의 외조카 표트르 3세는 무능하고, 러시아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친프로이센 성향의 독일인이었다. 로마노프 왕조의 남계 혈통이 끊겼기 때문에 옐리자베타 여제가 재위 당시 외조카인 표트르 3세를 차기 차르로 지명한 것. 표트르 3세는 당시 전쟁중이었던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2세의 광팬이어서, 다 잡은 전쟁을 중단하고 급히 전쟁 이전의 국경으로 평화협정을 맺는 병크 중에 병크를 저질렀다.

물론 자살을 계획하고 있던 프리드리히 2세의 입장에서는 최대의 행운이었지만. 굽시니스트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도 살짝 언급된다. 스쿨데이즈 패러디로. 성질도 더러워서 아내를 버리고 공개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다가 고작 반년만에 결국 러시아 정교회와 귀족, 특히 근위대의 지지를 얻은 아내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리고 1주일 뒤 알렉세이 오를로프라는 자에게 살해되었다. 아마도 예카테리나 2세의 지시(혹은 방조)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인은 심한 복통으로 인한 출혈로 발표되었다.

무능한 남편을 폐위해버리고 즉위한 예카테리나 2세는 다시 러시아를 안정시키고 강력한 권력을 휘둘러 러시아 절대군주제를 확립했다. 푸가초프의 난(1772~1775) 등 농민반란을 진압하고 농노제를 강화해 민중을 억압했지만, 우크라이나 스텝 지대에 농민을 이주시켜 대규모의 농사를 짓게 함으로써 러시아의 농업 생산량을 크게 끌어올려 농업을 진흥시켰다. 또한 상공업을 진흥시켜 국력은 크게 향상되었고, 볼테르 등의 문인들을 후원하고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를 초청하는 등 문화적인 면에서도 어느 정도 업적이 있다.

또한 향상된 국력을 바탕으로 외치에서 대성과를 거두었다. 3차에 걸친 폴란드 분할에 참여하여 1611년 모스크바 함락으로 러시아에 굴욕을 준 폴란드를 멸망시켰으며, 남쪽으로도 오스만 제국에 강한 압박을 가하여 러시아-투르크 전쟁(1770~1774)에서 승리하고 크리미아와 카프카스를 할양받아 영토를 넓혔다.

3.3 나폴레옹 전쟁

러시아 원정 항목 참고.

예카테리나 2세가 죽은 뒤 그녀의 아들 파벨 1세(재위 1796~1801)는 서방에서 프랑스 혁명의 열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왕권신수설을 내세우며 궁중에서 포악한 행동을 일삼아 귀족들에 의해 살해되고, 대신 아들인 알렉산드르 1세(재위 1801~1825)가 즉위했다.

알렉산드르 1세는 1804년 나폴레옹황제가 되자 앙숙 관계였던 오스트리아와 손을 잡고 직접 군대를 지휘해 프랑스에 대항했는데, 1805년의 아우스터리츠 전투(통칭 '삼제三帝회전')에서 참패하여 포로신세가 되는 굴욕을 당했다. 이 패배 후 러시아로 돌아온 차르는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에 대놓고 항의하지도 못하고 영국과 밀무역을 하는 등 안습한 모습을 보여주다가, 1812년 나폴레옹이 대군을 이끌고 동진해 오자 이에 맞서 초토화 전술을 강행하여 프랑스 군대에 엄청난 피해를 안겨주었다.

애초에 나폴레옹은 제정 러시아의 부도(副都)인 모스크바만 함락하면 전쟁이 끝날 거라고 예상한 듯 싶지만, 러시아답게 모스크바 시민을 소개하고 도시를 파괴한 뒤 인근 농가를 초토화시켜 프랑스군이 폐허 속에서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고 그 사이 러시아는 군대를 끌어모았다. 쿠투조프 원수가 지휘한 러시아 군대는 정면대결보다 게릴라전을 통해 프랑스군에 지속적인 피해를 강요했다.

알렉산드르 1세가 협상을 거부하자 나폴레옹은 소득 없이 철수하거나 수도인 북쪽의 상트 페테르스부르크로 진격하는 방안 중에서 선택해야 했지만, 보급이 여의치 않은 상태에서 혹독한 러시아의 겨울을 견디지 못 한 프랑스 군대에게는 퇴각 이외의 선택지는 없었다. 이때의 패배는 워털루 전투와 함께 나폴레옹의 운명을 결정지은 결정적 사건이었다.

이유야 어쨌건 러시아의 승리는 그때까지 적어도 육상에서는 패배한 적이 없었던 나폴레옹을 확실히 꺾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러시아는 위대한 '조국전쟁'의 이념을 선전하며 제국 러시아의 위세를 드높였다고 자랑했다. 실제로 이때 러시아의 힘을 과대평가한 서방국가들은 모두 러시아를 유럽 세계의 강대국으로 인정하고 한 몫 끼워주게 된다.

그러나 제정 러시아와 로마노프 왕조는 그 광대한 국토와 인구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그 때문에) 서유럽처럼 개혁을 시도하는 데 실패했다. 1825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터진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젊은 귀족들이 러시아의 문제점과 후진성을 자각하고 개혁을 시도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의는 평가해야 하지만, 강력한 황실의 힘을 누르기는 역부족이었다. 이후 니콜라이 1세(재위 1825~1855)가 반동정치를 강화하고 모든 개혁을 거부하면서 로마노프 왕조의 멸망은 이때 이미 잉태되었다.

3.4 몰락과 왕조의 멸망

러시아의 후진성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은 크림 전쟁(1853~1855) 때였다. 러시아 군대의 후진적인 모습은 다같이 막장이었음에도 두드러져보였고, 패전 직후 차르가 된 알렉산드르 2세(재위 1855~1881)는 이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알렉산드르 2세는 러시아의 후진성과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 '아래로의 그것(혁명)보다 위에서의 그것(개혁)이 더 낫다'며 국가로부터의 개혁을 시작했고, 그 일환으로 1862년 역사적인 농노해방령을 내렸다.

그러나 농노해방령은 러시아가 그것을 받아들일 만큼의 준비가 이루어진 상황이 아닌 상황에서 급진적으로 시행되어 농민들은 더 궁핍해졌고 견디다 못해 다시 농노가 되는 농민도 있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하겠다.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은 러시아의 지식층과 개혁파에게 아무런 희망도 주지 못 하고 차르 체제가 막장이라는 것,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것만 인식시켜주었다.

결국 차르 알렉산드르는 1881년 무정부주의자의 폭탄 테러로 사망하고 첫 테러 때는 무사했으나 멀쩡히 살아나와 "난 괜찮다"고 하는 순간 대기했던 또다른 암살범이 기다렸다는 듯이 폭탄을 던졌다. 즉사하진 않았지만 팔 하나와 두 다리가 잘려나가고 피투성이로 쓰러져 "짐은 궁궐에서 죽고 싶도다…"라는 말을 겨우 했는데 누가 봐도 가망이 없어서 신하들이 마지막 부탁대로 궁궐로 데려가서 결국 궁궐 안에서 사망했다. 그의 아들 알렉산드르 3세(재위 1881~1894)는 이를 계기로 반동, 억압정치를 더더욱 강화했다. 이로서 로마노프 왕조의 운명도 결정되었다.

로마노프 왕조의 최후 차르인 니콜라이 2세는 처음부터 황제감이 아니었다. 정치에도 무능하고 온후한 성품은 절박한 상태에 놓인 러시아의 체제를 개혁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특히 러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배한 것이 결정타였다.

이로 인해 발생한 경제난으로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지면서 차르 체제에 최후의 희망을 가졌던 모든 이들의 기대는 박살났고 로마노프 왕조의 운명은 이것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즉, 1905년 터진 1차 러시아 혁명은 로마노프 왕조의 전제정에 격렬히 항의하고 개혁을 부르짖었다는 점에서 12년 후의 2차 혁명의 전조였다.

처음에는 민중들의 거센 항의를 무시했던 니콜라이 2세는 저항이 점점 더 커지자 두려운 마음에 개혁을 약속했고, 민중의 항의는 조직력이 결핍되어있었기에 곧 가라앉았다. 차르는 이 요구가 아마 한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러시아 민중은 이제 차르 체제에 희망을 버렸고 전제정에 신물이 나있었다. 1914년, 복잡한 동맹관계에 의해 러시아가 전쟁을 시작하자 이러한 불만과 분노와 증오가 일시에 폭발했다. 엄청난 전선의 패배 소식과 물가 폭등, 물자 부족 등 모든 것이 차르 체제의 실정(失政)과 무능과 부패를 보여주었다.

1917년, 러시아력 2월에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일어난 빵을 달라는 민중시위는 금세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되어 마침내 혁명으로 발전하였다. 전선에서 이 소식을 들은 니콜라이 2세는 퇴위를 선언, 동생에게 양위하였지만 동생 미하일 대공이 거부하여 황위는 공중에 붕 뜨게 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4월에 귀국한 레닌의 선동으로 러시아력 10월에 볼셰비키가 무력으로 임시정부를 뒤엎고 소비에트 러시아를 건국하면서 어떤 의미로든 제정 러시아는 마침내 문을 닫게 되었다. 1918년 적백내전이 개시되자 유폐되었던 차르 일가는 처형되었고, 이것으로 300년간 이어진 로마노프 왕조도 역사 속의 잔재로만 남게 되었다.

3.5 현황

1918년 러시아 혁명으로 로마노프 가문은 제위를 잃고 차르와 후계자를 포함한 많은 인물들이 살해당하여 왕조가 단절되었다. 이후 로마노프 가문은 니콜라이 2세의 사촌인 키릴의 계보[4]로 이어지고 있으나 1992년 대를 이은 마리야 여대공이 여성이기 때문에... 어머니 예카테리나 2세와의 사이가 나빴던 파벨 1세가 여성의 계승권을 부정한 전례가 있다. 그리고 귀천상혼 논란[5] 때문에 가문 내에서 분열이 일어나 두 파벌로 나뉘어있다.

한편 마리야 여대공은 프로이센 왕족과 결혼해 외아들 게오르기를 두었기 때문에 게오르기가 당주 자리를 계승하면 가문 이름이 호엔촐레른-로마노프 가문으로 바뀔 예정이다.

4 역대 로마노프 왕조 차르

눈치챘을지 모르겠는데 뒤에 붙는 '~비치(남성)'나 '~브나(여성)'의 경우는 누구의 자식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제정 러시아에서 가톨릭이나 개신교 국가에서 시집온 여성들은 정교회 세례를 새로 받을 때 대부를 선 남성 또는 성인(성인을 대부로 삼는 경우도 있었다)의 이름을 부칭으로 삼았다. 예컨대 예카테리나 1세, 2세나 니콜라이 2세의 황후인 알렉산드라 같은 경우.

대수이름탄생사망즉위년일퇴위년일재위기간비고
01미하일 1세 표도르비치
Михаи́л I Фёдорович
1596.7.121645.7.131613.2.211645.7.1232년 149일
02알렉세이 3세 미하일로비치
Алексей III Михайлович
1629.3.91676.1.291645.7.121676.1.2920년 208일
03표도르 3세 알렉세예비치
Фёдор III Алексеевич
1661.6.91682.5.71676.1.291682.5.76년 100일[6]
04이반 5세 알렉세예비치
Иван V Алексеевич
1666.8.271696.2.81682.5.71696.2.813년 280일[7]
04표트르 1세(표트르 대제)1672.6.91725.2.81682.5.7
1696.2.8
1696.2.8
1725.2.8
13년 280일
29년
[8]
여제시대 개막
05예카테리나 1세 알렉세예브나
Екатерина I Алексеевна
1684.4.151727.5.171725.2.81727.5.172년 98일[9]
06표트르 2세 알렉세예비치
Пётр II Алексеевич
1715.10.231730.1.301727.5.181730.1.302년 258일[10]
07안나 이바노브나
А́нна Иоа́нновна
1693.2.71740.10.281730.1.301740.10.2810년 274일[11]
08이반 6세 안토노비치
Иоанн IV Антонович
1740.8.231764.7.161740.10.281741.12.61년 39일[12]
09옐리자베타 여제1709.12.291762.2.31741.12.61762.1.520년 30일[13]
10표트르 3세1728.2.211762.7.171762.1.51762.7.9185일[14]
11예카테리나 2세1729.5.21769.11.171762.7.91796.11.1734년 140일[15]
여제시대 이후
12파벨 1세 페트로비치
Павел I Петрович
1754.10.11801.3.231796.11.171801.5.234년 187일
13알렉산드르 1세 파블로비치
Александр I Павлович
1777.12.231825.12.11801.3.241825.12.124년 258일
14니콜라이 1세 파블로비치
Николай I Павлович
1796.7.61855.3.21825.12.11855.3.229년 98일
15알렉산드르 2세1818.4.291881.3.131855.3.21881.3.1326년 11일
16알렉산드르 3세 알렉산드로비치
Александр III Александрович
1845.3.101894.11.11881.3.131894.11.113년 236일
17니콜라이 2세1868.5.181918.7.171894.11.11917.3.1522년 139일[16]
  1. 고양이라는 뜻의 별칭
  2. 이고리 류리크비치는 '류리크의 아들 이고리'다.
  3. 빅토리아 여왕의 둘째 아들인 알프레드 왕자와 결혼했다.
  4. 1917년 당시 제위 계승 순위 3위였다. 계승 순위 1위였던 황태자 알렉세이와 2위 미하일 대공(귀천상혼을 해서 그의 외아들에게는 상속권이 없었다)은 볼셰비키에게 살해당했다.
  5. 마리야 여대공의 어머니 레오니다는 조지아의 왕가인 바그라티온 가문 출신이나 1801년 조지아가 러시아 제국에 합병된 후부터는 러시아의 일개 귀족 대우를 받았다.
  6. 표트르 1세의 이복형.
  7. 공동황제. 표트르 1세의 이복형으로, 정신지체가 있어서 실제 정무는 보지 못했다.
  8. 1696년 2월 8일까지 이복형 이반 5세와 공동황제였다가 그 이후부터는 단독황제가 되었다. 1721년, 러시아 제국을 정식 선포하고 자신을 "임페라토르(황제)"라고 칭함.
  9. 황태자 알렉세이가 1718년에 반란에 가담하여 황태자 자리에서 폐위된 뒤 고문후유증으로 죽고, 그 아들인 훗날의 표트르 2세도 아직 너무 어렸기 때문에 표트르 1세의 두 번째 황후인 예카테리나가 즉위했다. 농민 출신-게다가 러시아인도 아니고 독일계였다-으로, 문맹이었기에 정무는 귀족들의 추밀원이 맡았다. 표트르 1세가 재위하던 중 제위계승자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표트르 대제는 생전에 그녀를 공동통치자로 못박아 놓았었다.
  10.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할아버지 표트르 1세의 개혁 반대자라고 자칭하며 반개혁에 앞장(...)섰으나... 결혼식 직전에 천연두로 사망, 이로써 로마노프 왕조의 정통 남계가 단절된다.
  11. 이반 5세의 딸. 정권의 반대세력들을 무자비하게 처벌하는 공포정치를 펼쳤다. 이반 5세 혈통의 안정을 위해 이질녀 메클렌부르크의 손자 이반 6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12. 생후 2개월의 나이에 즉위했다. 섭정은 비론과 어머니 안나 레오폴도브나가 맡았으나 다음해 일어난 엘리자베타의 쿠데타로 슐레실부르크 요새에 유폐되었다. 이후 육군장교 미로비치가 그를 탈출시키려다가 실패, 23세의 나이로 살해당한다.
  13. 정통 로마노프 왕조의 종식.
  14.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고토로프-로마노프 왕조 창건. 즉위 6개월 4일만에 폐위되었다가 급사.
  15. 표트르 3세의 아내.
  16. 피의 일요일, 러시아 혁명. 퇴위 후 유배되었다가 볼셰비키에 의해 가족과 함께 총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