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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제정러시아 장군도 방탄훈장(...)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수보로프(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Суво́ров)
1729. 11. 24~1800. 5. 18
러시아군 전략의 아버지.[1]
프리드리히 대왕,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사이에 등장한 유럽의 먼치킨.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대원수이자, 생애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불패의 명장.
1 생애
수보로프는 노브고로드 공화국 시기부터 전해져 오던 유서깊은 귀족 가문의 후예로 태어났다.
그는 바실리 수보로프의 외아들이었으며, 바실리는 당시 러시아 귀족들의 전통과는 달리 위험한 군인보다는 안전한 관리로 키우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한 아버지의 바램과는 달리 수보로프는 어릴적부터 군대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으며, 군인이 되는 것을 꿈꾸었다. 아버지는 그의 관심을 다른 분야로 돌리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런 그가 11세가 되던 해에 아브람 페트로비치 간니발[2]이 집에 방문했고, 그 아버지의 하소연을 들었던 간니발은 수보로프와 오랫동안 군사에 대해 토의하고는 바실리에게 아들의 천직은 군인이라 말하고, 결국 하는수 없이 그의 아버지는 수보로프를 군대에 입대시킨다.
그렇게 군에 입대한 수보로프는 1741년의 러시아-스웨덴 전쟁, 7년 전쟁 등에 종군하였다. 그렇게 종군하면서 활약하던 수보로프는 33세의 나이로 대령이 되었다.
그 후 폴란드 전역에서 폴란드군을 대파하고 크라쿠프를 함락시켜 러시아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 영토를 분할해 강점하는 데에 일조했으며, 그 공으로 소장이 된다. 또한 1787년에 벌어진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러시아 - 투르크 전쟁)에서도 무수한 전공을 세워 예카테리나 2세와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에게 각각 백작 작위를 서훈받았다.
투르크를 굴복시킨 후에는 타데우쉬 코시치우쉬코가 폴란드 해방 투쟁을 일으키자 폴란드로 파견되어 폴란드 저항세력을 개발살(...)[3]내고 코시치우쉬코를 포로로 잡는 등의 무공을 세웠으나, 전투 후 귀환하던 중에 예카테리나 2세가 사망하고 파벨 1세가 즉위하면서 찬밥 신세가 된다. 파벨 1세는 자신의 성장과정으로 인해 모친의 유산(여제의 가신이나 측근, 그녀가 확립해 놓은 대외정책 등)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는데 이는 예카테리나에게 신임받던 수보로프도 예외가 아니었고, 수보로프도 파벨 1세의 지리멸렬한 행동에 대해 경멸감을 감추지 않았기에 파벨 1세는 수보로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등 노골적으로 견제를 가했다.
그러다가 프랑스 혁명전쟁이 일어난 뒤 1799년에 이탈리아로 파견되어 거기에서 프랑스 혁명군을 격파해 프랑스 세력을 이탈리아에서 일시적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듬해 코르사코프 장군의 군대가 앙드레 마세나가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격파당하고 동맹이던 오스트리아군이 러시아군의 위기를 외면하자 군의 재정비를 위해 알프스를 넘는 과감한 기동을 강행한다. 프랑스군도 이를 요격하기 위해 따라붙었으나, 수보로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의 진용이 견고하여 결국 요격에 실패하고 놓쳤고, 이 전공으로 역사상 4번째이자 마지막 러시아 대원수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전공으로 인해 수보로프는 당초 러시아에서 개선식을 거행할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나, 변덕스러운데다 수보로프를 싫어하던 파벨 1세는 이내 이를 취소해 버렸고, 수도로 귀환한 수보로프와의 면담조차 거부했다. 오랫동안 전쟁터를 전전하면서 건강을 해친데다 파벨 1세의 연이은 푸대접으로 인해 실의에 빠져 결국 며칠 후 사망하고 만다. 그의 시신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에 매장됐으며, 파벨 1세의 방해로 인해 그의 장례식은 러시아의 전쟁 영웅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초라하게 치러졌으나, 훗날 알렉산드르 1세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르스 광장에 수보로프를 기념하는 거대 조각상을 세운다.
2 평가
러시아군 전략의 아버지라는 명성에 걸맞게 신중하고 상세한 전략 구상과 과감한 전술기동을 통해 승리를 쟁취해내던 장군으로, 자신의 저서에서도 이러한 부분들을 강조하는 구절이 나온다. 또한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한 군의 정예화와 단결력 고양을 중시하던 인물로 본인 역시 체력 단련에 노력을 아끼지 않아 강건한 신체를 자랑했다고 한다.[4]
다만, 전쟁에 있어서 아군의 승리를 이끌어내려는 마음이 지나쳐 적에게 무자비한 희생을 자주 강요했다. 투르크의 전쟁 막바지에 투르크군이 농성하던 이스마일 요새를 함락시킬 때만 봐도 요새 내부의 무슬림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3일 동안 학살했다. 이 당시 학살당한 무슬림의 수가 무려 4만 명을 넘나드며 생존자는 고작 수백 명에 지나지 않을 정도의 참상이었다.
또한 폴란드의 해방 투쟁을 분쇄할 당시에도 자치도시 중 하나인 프라가를 함락시키면서 약 2만 가량의 폴란드인을 학살. 이와 같은 무자비한 학살 행위는 저항의지를 분쇄하는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으나 후세에는 당연히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수보로프가 주도적으로 학살을 일으켰는지는 자세한 정황이 남아 있지 않아 역사가들마다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총평을 내리자면 그야말로 러시아스러운 장군. 본의는 아니지만 수보로프의 뛰어난 전략과 전술은 결국 후대 러시아 군대의 인명 경시 풍조로 이어진다. 수보로프 자체는 러시아의 강점을 인구라고 적으면서 동시에 정예병의 생사를 강조하는 유능한 지휘관이었으나, 이후 러시아 장군들은 그냥 수보로프가 보여준 과감한 기동 및 착검 돌격만 보고 따라하는 추태를 보인다.
조금만 더 자세히 첨언하자면 18세기 때는 유럽도 머스킷의 명중률, 연사력 등이 좋지 않아 수보로프는 총보다 총검이 더 좋은 친구라고 언급하는데, 이런 문제점은 수보로프 이후 시대로 넘어가면 기술력의 발달로 보완되기 마련이다. 18세기 이전에나 통했던 총검 돌격을 19세기~20세기 지휘관이 무작정 따라하니 인명 경시 풍조로 이어질 수밖에. 한신의 배수진을 후세 중국인이 바보처럼 따라했던 것과 비슷한 경우.
서양 역덕들 사이에서는 러시아 장군치고 굉장히 높게 평가받는다. 서구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러시아 출신 장군임에도 고평가받는 것이니 수보로프의 역량을 엿볼 수 있다.
대략 나폴레옹과 한니발 수준으로 쳐주는 듯. [5]
3 서훈 내역과 기타 이력
러시아 제국 육해군 대원수
이탈리아 공작
신성 로마 제국 백작[6]
- ↑ 실제로 제정 러시아는 러일전쟁까지도 수보로프의 전략과 전술을 답습했다. 그야말로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러시아군 전략의 아버지. 제정 러시아의 전략과 전술이 소련으로 이어졌단 것을 생각하면 공산권 전략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있을 듯.
- ↑ 대 문호인 푸슈킨의 증조부이며, 표트르 1세의 흑인 측근 중 한명. 참고로 간니발은 한니발에서 파생된 이름이다.
전설의 그이름 - ↑ 이 과정에서 표트르 바그라티온을 만나게 된다. 자세한건 바그라티온 문서 참조.
- ↑ 당장 말년에 직접 말타고 알프스를 넘던 양반이다.
- ↑ 실제로 수보로프는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전역을 보고 "나라면 나폴레옹을 이길수 있다"고 말했다(...)
- ↑ 폴란드 전역에서 요제프 2세가 수여한 작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