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3세

역대 러시아 제국 차르
옐리자베타 여제표트르 3세예카테리나 2세
One of the most peculiar cases of the right man at the right time was Peter III of Russia. An ardent admirer of Prussian miloiterism and Fredrick the Great, he became tsar just in time to take Russia out of the coalition against Frederick at the moment when the latter was facing catastrophe. Peter III, soon thereafter killed, was on the throne just long enough to save Prussian militarism. A nincompoop himself, a man who certainly had no conception of the importance of his act, he nevertheless indirectly played an important part in the molding of modern Europe. - <A Preface to History> by. Carl G. Gustavson
역사를 바꿨다고 볼 만한 사람들 중 가장 기묘한 케이스는 러시아의 표트르 3세다. 프로이센 군국주의와 프리드리히 대왕의 열성적인 팬으로서, 프리드리히 대왕이 7년전쟁에서 재앙을 맞이하는 도중 딱 맞는 시간대에 즉위해서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교전을 중단시켰다. 표트르 3세는 곧 죽임을 당했지만 프로이센 군국주의를 구할만큼 적절한 기간 동안 즉위해 있었다. 멍청이답게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고, 본의 아니게 현대 유럽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 <역사의 서문> 칼 G. 구스타브슨 [1]

본명은 카를 페터 울리히(Karl Peter Ulrich). 러시아식 이름은 표트르 표도로비치(Пётр Фёдорович).
생몰 1728. 2. 21 ~ 1762. 7. 17
재위 1762. 1. 5 ~ 1762. 7. 9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7대 차르. 재위기간은 극히 짧고 업적이랄 것도 없으며 오히려 본국에선 오명으로 유명하지만, 다른 방면으로 역사에 그 이름을 널리 떨쳤다. [2]

1 러시아의 황제

역사를 바꾼 독빠

1.1 유년기

홀슈타인-고토로프(Holstein-Gottorp) 가문으로 지위는 공작이지만 상급주군이 없는 엄연한 통치가문이라서 유럽내 왕족과 대등한 결혼이 가능한 집안이었고 혈통으로보면 어머니는 표트르 대제예카테리나 1세의 딸이고 부계로는 독일계라기 보단 스웨덴 덴마크 왕실과 혈연이 있있다. 영지인 홀슈타인-고트로프도 현재는 독일령이지만 지리상은 오히려 덴마크 본토에 가깝다. 본명은 카를 울리히이다.어머니는 자식을 낳고 곧 사망했고 10살을 갓 넘겼을 때 부친[3]을 잃고 작위를 이어받아 홀슈타인 공작이 되었다. 그런데 작위는 거의 명목상 작위로 선대때 덴마크왕에게 땅을 거의 대부분 뺐겼고 여러곳을 유랑하며 살았고 불우했다. 사실 남은 영토도 어린시절 유랑할때 거의 다 뺐겼다. 거의 망국의 왕자나 다름없었고, 결국 프로이센프리드리히 대왕이 거둬줘서 12세까지 베를린 근처 포츠담 궁정에서 살았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워낙 역사에 나올까 말까한 전무후무한 먼치킨인지라 생전에도 빠가 넘쳐나서 주목받기 힘든 사실이지만 이런 개인적 관계도 후술할 내용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선대가 스웨덴 왕실 혈통도 있기 때문에 스웨덴왕의 후계후보로도 꼽혔고 표트르 대제의 외손자였는데 표트르 대제의 혈통에 매우 집착한 이모 옐리자베타 여제가 독신이었던 관계로 어린나이 때부터 신체적 정신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후계자로 낙점 받았다. 이모이자 양어머니(?) 옐리자베타의 뜻에 따라 같은 독일계인 작센-안할트의 조피 프레데리케와 결혼했다. 이 둘은 6촌이긴 하지만 근친혼 영향으로 혈연상 꽤 가까운 편이어서 옐리자베타가 며느리로 낙점했다. 동생처럼 잘 봐줄거라 기대하고...

1.2 황태자 시절

결혼한지 얼마 후 아내가 당연히 러시아어를 배우고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는 한편 이름도 러시아식으로 바꾸는 등 스스로를 러시아인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 반면, 그는 프로이센 궁정시절 영향도 있고 당시 유럽 젊은이들의 우상이던 프리드리히 대왕의 추종자라 독일식 군대 문화에 빠졌고 러시아로 오기 전 가정교사가 천박한 양아치라 기르면서 학대를 받아 안그래도 신체적 정신적으로 허약하던차에 더 심해졌다. 그의 지적 수준으론 새로운 학습이 어려워서 러시아어를 배우다 실증을 내고 결국 때려쳤다... 사실 이 정도면 그러려니 하는데 정신연령이 현재 추산하기론 초등학생 수준이라서 괴상한 장난을 많이 쳤고 곧 러시아 귀족들은 물론 외교관들에게 웃음 거리가 되었으나 이모가 워낙에 혈통에 집착한지라 후계자 변경 건의는 완전히 무시했다.

무엇보다 러시아에 적응하고 있었던 아내와 크게 충돌하여 부부관계도 소원해졌다. 표트르 3세 사후, 사실 그는 고자였다!부터 시작해서 지적장애나 반미치광이 등등 온갖 유언비어가 돌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그의 정신적 문제로 지적인 수준이 낮은건 맞는데 병크섞인 일화등은 예카테리나 2세 시절 많이 왜곡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표트르도 자신과 지적수준이 비슷한 애첩을 총애해서 바람을 피는 등 고자는 결코 아니었다. 표트르 대제 혈통에 집착한 옐리자베타 여제가 장자 파벨이 태어나자마자 부부에게 뺐어서 양육했고, 장성하면 표트르 대신 후계자로 세우려고 했고, 예카테리나는 그녀의 어머니가 표트르처럼 어리석어서 처음에는 같이 개욕쳐먹다가 예카테리나의 묵인으로 러시아궁정에서 추방하는 병크도 생겨났고, 러시아 궁정은 원래 문란해서 애첩두는 정도는 워낙에 흔한일이기 때문에 허물이 될 일은 아니었다.

둘 사이는 결혼 초반을 제외하고 곧 냉랭해졌는데 장자 파벨은 어쨌든 일단 둘 사이의 자식으로 인정받았다. 서로 바람피웠다는 식으로 친아버지가 표트르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은 있지만 명확히 밝혀지진 않았다. [4] 이런 소문이 더 났던건 표트르가 예카테리나를 여러번 죽이려고 간통구실드립을 쳤기 때문인데 러시아귀족들은 물론 홀슈타인서 데려온 신하들조차 그건 좀 아니라고 표트르를 말릴정도... 사실 아들인 파벨 1세를 보면 표트르 3세와 외모가 붕어빵이기 때문에 친아버지가 맞다는 의견이 주류. 표트르의 아버지 홀슈타인 고트로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와 표트르 3세와 파벨 1세를 보면 못 생긴게 3대가 붕어빵이다...

7년 전쟁 시절 러시아군은 적군 프로이센과 싸우는데 어려움 뿐만 아니라 궁정 눈치보기도 바뻤는데 당시 차르 엘리자베타 여제는 현재 백혈병으로 추정되는 불치병으로 전쟁 초반부터 건강상태가 심각했고 표트르는 대놓고 친프로이센이라 장군들은 이겨도 속이 탈판 이었다. 그렇다고 못 싸운건 아니어서 역시 많은 피해를 입긴 했지만 동프로이센을 점령하는데 성공하고 프로이센군을 오데르강까지 밀어붙이는데 성공했다. 다만 보급 한계로 인해 결정적인 승리는 거두지 못했는데...

1.3 즉위와 동시에 병크

이전 표트르 3세는 7년 전쟁 중 자기 입으로 적국인 프로이센에게 군사기밀을 넘기겠다는 등의 실언을 여러 차례 하면서 민심까지 잃어버렸다. 그래도 그냥 고향이 독일이니까 안타까워 하는 말 정도로 치부했지만… 아직 황제도 아니었고
여하간 1761년 12월 25일, 옐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하자 표트르 3세가 러시아 제국의 차르로 즉위했다. 그의 즉위로 러시아의 왕조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고토로프-로마노프 왕조로 교체된다. 즉위하자마자 그가 제일 먼저 추진한 정책은 바로…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그만둔다!

  • 7년 전쟁 항목에서 보면 알겠지만, 이 시점에서 러시아-오스트리아-프랑스-스웨덴으로 연결되는 4국 동맹은 독일 지역 지상전에서 유리한 상황이었다. [5] 프로이센의 최대 요새인 콜베르크가 러시아군에게 함락되었고, 영국은 지상전에서 프로이센에 현금 지원을 하다 그마저도 끊긴 지라[6]러시아군의 우세가 여전했다. 다만 러시아군이 표트르 눈치 보느라 다 이긴거 일부러 엎었다는 의견이 많았는데 현재 연구로는 부정하고 있다. 일단 러시아군의 보급선이 매우 길어서 전쟁 초기에는 이겨도 후퇴한게 옳았다는 판단이고 1760년 러시아군이 베를린을 함락하긴 했는데 역시 후방위협때문에 금방 후퇴했다. [7] 사실 프리드리히는 병력을 잃는것보다 땅을 잃는것을 선호해서 모잘라서 아까운 병력을 수비에 쓰지 않았고, 1760년 상황이 최악이긴 했는데 1761년엔 오스트리아군을 조금씩 밀어내서 조금 호전되는 추세였다. 프랑스는 유럽지상전에서 로스바흐 전투후에 거의 탈락했고, 스웨덴도 전쟁후반 소극적인건 마찬가지... 오스트리아역시 프로이센처럼 많은 손해가 누적되어서 러시아 의존도가 컸다. 그리고 프리드리히는 옐리자베타가 죽어가던 당시엔 슐레지엔에서 오스만 투르크와 협상으로 동맹이 성사되어서 봄이되면 투르크가 러시아를 공격할거란 희망에 호기를 부렸다고...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문서에는 오스만을 끌어드리려는 노력이 실패했다고 나오는데 어디가 맞는지 추가바람.

어쨌든 협상을 하는것은 옛군주가 죽고 새로운 군주가 되어서 할수도 있는데 조건이 승자의 조건이 아니라 패자의 조건이었다. 사실 엘리자베타 시절에도 7년전쟁에서 이겨봐야 얻을게 별로 없다는 이유로 개전 초에 반대가 상당했고 러시아도 많은 자원을 투입했기 때문에 계속 전쟁을 수행한것인데, 그동안 점령한 영토를 배상금도 안받고 돌려주고 병력까지 대여해줄것을 제의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얼쑤 하고 이 제의를 받아들인 건 당연지사. 러시아가 물러난것을 보고 스웨덴도 판세가 나가리가 된걸 보고 프로이센과 강화했다. [8]

거기다 러시아 정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성직자들에게 자신이 믿는 개신교의 목사들처럼 하고 다닐 것을 강요하는 등 교회마저 적으로 돌려버렸으니 실각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러시아의 모든 군인들과 귀족들은 멍청한 차르에 분노했고 이 자식 안 되겠어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을 외치며 차르를 갈아치우려는 반란이 일어 났다.

1.4 폐위와 의문사

1762년 6월, 표트르 3세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난 틈을 타 근위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아내가 주도했다는 설이 있는데 예카테리나의 역할이 별로 크지 않았다는 설이 새로 제기되고 있다. 근위대가 왜 반란을 일으켰냐면 고위 귀족자제들이 주축인 근위대를 홀대하고 홀슈타인 출신 떨거지 양아치들을 데려와서 근위대대신 자신을 호위병력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런 것들이 쓸모가 있냐하면 그것도 아니고 주색잡기나 하는 잉여들이라 이들의 비행까지 합쳐져서 민심은 완전히 떠났었다.

실각한 표트르 3세는 성에 유폐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급사했는데, 공식 사인은 복통으로 인한 출혈로 급사...
당연히 정황을 봐선 암살이다.

이 여파로 예카테리나는 차르 지위를 유지하려 귀족들에게 이권을 퍼주는식으로 반발을 무마하다 러시아의 고질이된 농노제까지 더 강화시켜버리게 된다. 그러고도 재위중 푸가초프의 난이 일어났고 러시아는 후진적인 전제군주국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외교적으로도 훗날 프로이센을 적대하지 않고 폴란드를 분할해야 했고,러시아는 서유럽의 자유주의와 완전히 반대로 가게 된다.

개인사적으로는 참으로 안습한 결말을 맞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멍청이가 예카테리나 2세 이후 로마노프 황조 모든 황제들의 직계 조상이 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로마노프 황가는 미남미녀가 많기로 유명하다!아무래도 황후들의 힘인 것 같다.

1.5 번외: 차르 스체판

1766년 크리스마스날, 표트르 3세라고 자칭하는 남자가 몬테네그로에 나타났다. 후에 '작은 스체판'(Scepan Mali)라고 불리게 될 그가 진짜 표트르 3세라고 믿었던 몬테네그로인들은 스체판을 차르로 추대하였다. 당시 몬테네그로의 통치자였던 블라디카(주교공) 사바는 그가 사기꾼임을 사람들에게 알렸으나 오히려 역관광당하고 구금당하였다. 몬테네그로의 이웃 국가인 오스만 제국베네치아는 이 가짜 차르를 토벌하기 위해 각각 1768년과 1770년에 군대를 보냈으나 전부 실패하였다.

가짜 드미트리라는 선례가 있던 러시아는 이 소식에 민감하게 반응하였고 예카테리나 대제는 스체판을 제거하기 위해 게오르기 돌고루코프 공을 특사로 보냈다. 돌고루코프 공은 스체판의 정체를 밝히는 데 성공했지만 몬테네그로인들은 그에 개의치 않고 스체판을 여전히 차르로 모셨다. 결국 돌고루코프 공은 스체판을 제거하는 것을 포기하고 러시아로 돌아갔다.

진짜 표트르 3세와는 달리 스체판은 유능한 통치자였다. 스체판의 제위 기간 6년 동안 몬테네그로의 부족들 사이에 만연했던 분쟁이 사라졌고, 1771년에는 유력 부족장들로 구성된 상설 재판소가 설립되었다. 그의 명으로 도로망이 건설되었고 러시아군을 본떠서 편성된 상비군이 만들어졌으며 처음으로 전국적인 인구 조사가 실시되었다.

표트르 3세가 아닌 것이 공개된 이상 러시아 황실에서 스체판과 적대할 이유가 없어진데다가 스체판은 오스만 제국에 맞서고 있었으므로 러시아는 스체판과 손을 잡기로 결정, 스체판은 1772년 예카테리나 대제로부터 러시아군 중장 계급과 성 블라디미르 훈장 2급을 받았으나, 1773년에 오스만의 사주를 받은 이발사에게 암살당하였다.

2 슈발리에의 등장인물

모티브는 1이다. 원판이 찌질한 위인이었던지라 애니에서도 인간 쓰레기로 묘사되었다. 툭하면 술 마시고 아내를 상습적으로 구타하며 이모 엘리자베타 여제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그걸 아내에게 덮어씌우려 하는 등(...). 결국 이모가 시해되자 이젠 내가 황제라며 희희락락하지만, 여제의 유지를 이어받아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반격에 나선 아내 예카테리나 2세가 그의 음모를 공표하고 귀족들의 동의하에 황제가 되면서 졸지에 폐위당하고 궁전의 정원에서 교수형당했다.
  1. 해당 글귀는 구스타브슨 교수의 역사 입문서 <역사의 서문>에 있는, 영웅론에 대한 반박 중 일부분이다. 참고로 함께 언급되는 인물들은 윈스턴 처칠, 나폴레옹, 표트르 1세, 프리드리히 2세같은 당대의 쟁쟁한 영웅들 뿐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들은 모두 하나씩 이유를 붙여서 어떻게 이들의 재능 하나가 역사를 뒤바꾼게 아니라는 점을 피력하는데 표트르 3세는 케이스가 하도 황당해서 그런지 의도가 없었다라는 식으로 그냥 퉁치는 느낌이 강하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묘하게 찝찝하다
  2. 사실 철종마냥 어디서 데려온 듣보잡 왕족의 이미지도 있는데 실제로는 표트르 대제의 외손자다. 아래의 가족관계 설명 참조. 같은 이름으로 외조부의 명성에 먹칠을 했다
  3. 홀슈타인-고트로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1700년 ~ 1739년). 그는 스웨덴 국왕 칼 11세의 외손자다.
  4. 예카테리나의 다른 자식, 딸하나는 친부를 놓고 의견이 갈린고 마지막 낳은 아들은 사생아라 백작작위만 주었다.
  5. 프랑스는 사실 전쟁초반 독일전역에서 로스바흐에서 참패하고 주전장을 식민지로 시선을 돌렸으나 캐나다 인도등지에서 영국에 완전 쳐발렸다.
  6. 영국이 유럽지상전에 나서지 않은건 아니다. 조지 2세의 3남 컴벌랜드 공작에게 원정군을 맡겼다가 실패하자 친척이자 프로이센 궁정의 장수였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에게 영국군을 맡기기도 했다. 친척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공국과 헤센공국도 프로이센-하노버-영국의 동맹이었다.
  7. 정확하겐 베를린시에 사례금을 받고 공격은 면제했다. 대신 프로이센 왕의 궁전인 포츠담은 철저히 약탈했다... 왕족들은 미리 소식을 듣고 피신해서 잡지 못했다고.
  8. 스웨덴 왕비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여동생인 영향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