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데리코 펠리니

파일:Federico-Fellini.jpg
Federico Fellini
(1920년 1월 20일 ~ 1993년 10월 31일)

fellini-a-4.jpg
1940년 로마에서

1 개요

영화 역사에 손꼽히는 거장
환상과 꿈을 넘나드는 영화의 광대이자 마술사

이탈리아영화 감독, 네오 리얼리즘 계열로 분류된다.[1]

특이하게도 그는 미신을 숭배했었는데, 피누스라는 점쟁이를 데리고 다녔다. 펠리니가 자신의 영매 친구들에게 영화흥행성적을 물어봤는데, 두 편이 흥행에서 참패한다고... 진짜로 참패했는데, 정확히는 점쟁이의 예언이 연예계를 떠돌아 다니면서 불안감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 《달콤한 인생》은 '파파라치'라는 낱말을 만들어냈다. 그래서인지 펠리니는 1993년 10월 31일[2] 로마의 한 병원에서 다발성 뇌출혈 합병증으로 죽어가다가, 어느 파파라치에게 죽기 직전의 모습을 찍혔다. 하지만 이탈리아 언론의 결정에 따라 그걸 올리는 신문사나 잡지사는 없었다.[3]

여담으로 죽기 전에 데이비드 린치와 만났다고 한다.(<데이비드 린치의 빨간 방>에서 언급된다)

2 스탠 리와의 인연

tumblr_l4mfg0Fnlt1qcqz6qo1_500.jpg

여러 면에서 펠리니의 인생은 만화 같았다. 그러므로 그가 만화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60년대 중반, 펠리니는 마블 코믹스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스파이더맨헐크를 좋아했는데, 그 계기가 1965년 11월 뉴욕에 방문했을 때, 바이러스에 감염돼서 입원을 했었다. 그러자 누가 만화책을 권해 주었는데, 거기에 재미들린 펠리니는 마블 사에 전화를 해 스탠 리를 만났다고 한다.

리와의 인연은 오랜 세월 동안 계속되었는데, 리가 로마에 들를 때는 펠리니의 별장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출처:로버트 쉬네이큰버그의 "위대한 영화감독들의 기상천외한 인생 이야기")

3 그외 가십거리

그는 의료팀의 감시 아래 환각제 LSD를 복용했는데, 끝내주는 환상을 경험못해서 실망했다고...

4 플래시 고든이 뭐기에

펠리니는 상습적으로 과장이 심한 편이었다. 특히나 영화 역사에 기록을 남길 욕심으로 그의 창의적인 공적을 과장되게 꾸미는 경향이 있었다. 그중 수십년동안 계속되어온 허풍 일화가 하나 있다. 1930년대 말 펠리니가 미국 만화 《플래시 고든》의 이탈리아어판을 그렸다는것이다. 그러나 진실을 속일 수는 없었다. 인터뷰에서 펠리니는 1938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모든 미국 만화를 금지했을때 만화 《플래시 고든》을 지켜낸것이 자신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무솔리니는 그런 금지령을 내린적이 없었다.

펠리니는 앨릭스 레이먼드의 액션이 넘치는 우주모험극 《플래시 고든》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런데 펠리니가 주장하기를 주인공 플래시 고든이 포버스 행성에서 납치되어 호크맨 행성으로 이송되는 그 유명한 스토리 라인을 제안한 사람이 자신이라고 했는데 이 역시도 터무니 없는 허풍이었다. 그 줄거리는 레이먼드가 창작한 것으로, 1936년 영화 《플래시 고든》과 1980년 리메이크의 기본이 되었다.

물론 미국판 만화가 잠시 중단되었을 때 펠리니가 이탈리아어 판 플래시 고든의 일부를 직접 그리기는 했지만 그가 작업한 부분은 출간된적이 없었다. 한 이탈리아 기자가 증거를 내세워 펠리니의 '플래시 고든'일화는 거짓이었다고 다그치자 펠리니는 순순히 "아마 그럴걸요."라고 시인했다. 그러나 제작자 디노 드 로렌티스가 엄청난 예산의 1980년 영화 플래시 고든의 감독으로 펠리니를 1순위로 선택했다는 것만은 진실이었다. 하지만 그 계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 하지만 작품활동을 계속 했기 때문에 네오 리얼리즘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8과 2분의 1에선 초현실주의적 색채를 띤다.
  2. 공교롭게도 같은 날 미국에선 젊은 배우 리버 피닉스가 죽었다. 덕분에 유럽에선 펠리니 죽음에 묻혀 별로 알려지지도 못했다.
  3. 다만, 1993년 12월호 국내 영화지 로드쇼에서 누운 자리에서 숨을 거두기 전 그의 사진을 실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