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에 나타난 리얼리즘 경향. 프랑스 영화계의 누벨바그와 훗날의 영화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이른바 현실적인 영화들이 등장하게 된것이다. 다만 리얼리즘은 19세기 중엽에 이미 미술과 문학에서 사조로써 대두되었기 때문에, 이때의 사조를 네오 리얼리즘[1]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 발생 배경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후에 발생하였다. 패전국이던 당시 이탈리아의 영화계는 당시 국가의 사정에 의해 프로파간다 영화나 코미디 영화 등을 중심으로 제작되고 있었으며, 특히 대전 중 급속히 그 규모를 키웠던 미국 영화가 물량 공세로 치고 들어오는 상태였다.
이런 경향에 반하는 이탈리아의 영화 감독들은 구체적으로 시스템화 된 영화 제작 방식에서 이런 현상을 느끼고, 그에 반하기 위해서 제도를 벗어난 영화제작 방식을 꾀하였다.
하지만 당대의 현실을 반영한 작품은 현실이 시궁창이면 시궁창일 수록 빨리 사장된다. 지금이야 명작 취급 받는 작품들이 좀 되지만, 당시에는 과연 어땠을까?
2 기술적인 특징
특징 대부분이 돈이 없어서 그런것이다. 물론 종전후의 패잔국이자 거대 스튜디오에서 탈피한 제작방식을 감안하자면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규격화 되지 않은 상대적인 현실을 찍는다는 작가적 정신론도 무시하긴 어렵다. 돈이 없어서 그렇게 만든거였지만, 이것은 수많은 영화 제작자들의 미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 거친 편집.
뭔가 그 장면에서 인물들끼리 더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뚝뚝 끊김(이것이 장 뤽 고다르의 내멋대로 해라의 갑작스러운 점프컷에 영향을 줌) - 후시녹음 - 당시의 기술은 동시녹음을 쓸수있었어도 방음 시설은 비싸기에 후시녹음이 주류가 되었다.(그런데 60년대 이후에도 한국영화는 후시녹음이 많았었기에 헷갈릴수 있지만 우리나라에 이 사조가 유행했던건 아니다[2])
- 전문배우들이 아니라 길거리에 캐스팅한 사람들이나 인부를 배우로 썼다.
- 조명이 없는 자연채광.
- 한정된 공간이나, 게릴라식 촬영
- 핸드헬드가 많이 쓰였다. 헨드핼드는 들고 찍는거였는데, 당시 삼각대도 하면 돈이 들기에 이랬다고...
- 그외에도 일반 영화랑 비교해 보면 다른게 많다. 한계 때문에 크레인을 쓸 수 없는 등...
- 굉장히 제작일정이 빨랐는데, 배우들은 비전문 배우였기에 영화배우뿐만 아닌 다른 직업을 가진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
- 이 사조가 유행한 시기가 매우 경제적으로 안 좋았던 시기라서 스텝들도 감독 겸 제작자에게 돈을 받는 처지인 이상, 감독의 권한이 지금보다 훨씬 강력했다.
3 내적 특징
현실은 시궁창 그 자체가 많다. 주인공은 노력을 해도, 용을 써도 실패하고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한다. 왜냐하면 이미 전쟁이 휘몰아친 후 패전과 대공황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또한 사건의 발단과 전개에 일정량 논리성을 띄던 기존의 영화들과 다르게 네오 리얼리즘 영화는 논리보다는 갑작스러운 사건의 발생과 진행을 보여주는 경향이 크다.[3]
스튜디오의 촬영을 거부하고 직접 현장에 뛰처나가 촬영한 샷들은 패전 당시의 이탈리아를 있는 그대로 잘 보여준다. 대체로 큰 샷들(롱샷 등)을 위주로 촬영을 하기 때문에 극의 중심에 있어야할 주인공과 함께 실제 전후복구 중인 도시의 모습도 다량 함께 잡혔다. 이로써 극 영화 임에도 불구하고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기록 영화로써의 관점 또한 함께 획득하였으며, 그런 현실의 중심에 있는 주인공을 보여줌으로써 당대의 현실을 직관적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4 유명한 거장들
- 루키노 비스콘티 - 강박관념이 네오 리얼리즘의 효시로 꼽힌다.
- 비토리오 데 시카 - 자전거 도둑이나 움베르토 D가 유명하다.
- 로베르토 로셀리니 - 독일 영년, 무방비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