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ver Jude Phoenix
1970년 8월 23일 ~ 1993년 10월 31일
제 2의 제임스 딘이라고 불려지는 배우
목차
1 출생
1970년 8월 23일 히피인 알린 듀네츠와 존 리 바텀사이에서 태어났다. 뉴욕에서 비서 일을 하던 알린은 약혼을 앞뒀지만 모든 일에 지쳐 도망치듯 떠난 히치하이킹 여행에서 존을 만나 마드라스에 정착해 첫 아이인 리버 주드 바텀(River Jude Bottom)을 낳았다.
리버라는 이름은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속 '생명의 강(River of Life)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한 이름이다. 영어이름의 경우 단어, 자연물을 이름으로 잘 쓰지 않아, 리버의 이름은 특이한 편에 속해 종종 인터뷰어들에게 왜 이름이 리버냐며 질문을 받았다.[1] 리버의 중간이름 주드는 영국배우 주드 로와 마찬가지로 비틀즈의 노래 Hey Jude에서 따왔다.
리버의 부모님은 리버의 출생 이후 신의 아이들이란 종교단체에 가입했고 선교의 일환으로 남미 지역을 순회하며 살았다. 이때 어린 리버와 동생들은 종교단체의 노래를 부르고 기타를 치며 길거리 공연도 자주 했는데, 사실상 구걸에 가까웠다. 그들은 후에 종교단체의 비리와 폐단에 염증을 느껴 개종했고, 다시 미국에 돌아와 정착했다. 이 때 그들은 새로이 시작한다는 의미로 피닉스로 성을 바꾸게 된다(원래 성인 Bottom은 여러가지로 안좋은 의미이기는 하다).
리버는 이런 생활환경 탓에 정규학교수업을 들어본 적이 없고, 정규교육을 받으면 당연히 아는 상식인 위인, 역사, 문학 등을 전혀 몰랐다. 극작가 나오미 포너는 "리버 피닉스는 정말, 정말, 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는 읽고 쓸 수 있었고, 또 그러는 것을 좋아했지만 역사나 문학적 감각에 대한 깊은 사유가 부족했다"고 회상했다. 14살때 찍은 영화 《컴퓨터 우주 탐험》에 함께 출연했던 또래 이선 호크, 제이슨 프레슨과도 배경지식이 너무 차이가 나서 스탭들이 그때그때 가르쳐줘야 했는데, 리버가 힘들어했다고 한다.(게다가 영화속 배역이 무려 똑똑한 어린이 과학도였다...) 다행히 아역 배우들끼리는 아이답게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리버의 동생들은 그와 같이 재능이 많은데, 그 중 《글래디에이터》의 콤모두스 역을 맡은 호아킨 피닉스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2 데뷔 및 아역시절
미국에 정착한 후, 아이리스 버튼이란 아역배우 에이전트는 리버와 호아킨이 자매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며 잔돈을 벌고 있는 모습을 포착했다. 그녀 덕에 리버는 광고를 찍을 수 있게 되었고, 이후엔 여동생과 같이 쇼프로그램에 조연급으로 출연한다.
1980년부터 리버는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고 《판타지》라는 TV 드라마에 여동생과 함께 주연으로 출연해서 노래를 불렀다. 1982년에는 CBS 방송 프로그램 시리즈에 출연하기도 했는데, 기타를 들고 엘비스 프레슬리의 흉내를 내던 리버의 모습을 보고 PD가 섭외했다고 한다.
그 TV 시리즈가 끝나고 1년 후 즈음 리버는 1984년, TV 시리즈 영화에 출연해서 제프리 크로퍼드의 아역으로 출연했다. 비록 10분 정도만 화면에 나왔지만 리버의 배역은 매우 중요했다. 그 후 몇 달이 안 되어 ABC 방송국에서 난독증을 가진 소년을 연기해 호평을 얻었다. 호아킨과 같이 출연했으며 이 방송이 호아킨의 데뷔작이다. 이 후 여러 편의 드라마에 출연하고 첫 영화인 《컴퓨터 우주탐험》에 이선 호크와 함께 출연하게 된다.
2.1 스탠 바이 미
15세가 된 리버는 롭 라이너의 《스탠 바이 미》(1986)에서 리더 격인 크리스 체임버스를 연기하여 전국적인 명성을 얻는다. 워싱턴 포스트에서는 리버가 이 영화의 중력같은 역할을 했다고 극찬했다. 그에 대해 리버는 "나는 크리스 체임버스와 나를 동일시해서 마지막 촬영 후 가족만 없었어도 나는 정신과 의사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역에 몰입했었다.
그 이후 리버는 피터 위어(트루먼 쇼,죽은 시인의 사회로 알려졌다.)의 《모스키토 코스트》(1986)에서 해리슨 포드의 아들 역을 연기했다. 리버의 연기를 보고 위어 감독은 "그는 당연히 스타가 될 것"이며 "연기력 이외에도 그에겐 무언가가 있다. 로런스 올리비에에게도 없는 무언가가 그에겐 있다"라고 이야기했다.
3 청년기
《모스키토 해안》 이후 리버는 10대 코미디 드라마인 지미의 이중생활에 출연했지만 자신의 연기에 스스로가 실망했다고 한다. "내가 생각한 대로 연기가 나오질 않았고, 전적으로 내 탓이다. 나는 코미디를 하고 싶었는데 내가 이 역에 맞는 사람인지조차 확신이 안 간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3.1 허공에의 질주
1988년 리버는 대감독 시드니 루멧의 《허공에의 질주》에 출연하게 된다. 이 영화는 FBI에 쫓겨 떠돌이 생활을 하는 가족 사이에서 태어난 피아노에 소질을 보이는 소년의 이야기를 담았는데 평생을 거처를 옮겨다녔던 피닉스 가족의 삶과 일맥상통한다. 당시 교제 중이던 배우 마샤 플림턴과 공연했으며, 이 영화에서 리버는 가짜로 연기하는 것이 싫어 직접 피아노를 배워서 연주한 것으로 화제가 되었다. 이 영화로 인해 National Board of Review에서 남우조연상을 타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동 부문의 후보가 된다. 루멧의 저서 《영화 만들기》에 따르면,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작가와도 논쟁할줄 아는 대담함을 보여주었디고 한다. 출처
3.2 인디아나 존스와 샌프란시스코에서 하룻밤
리버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에 출연하여 어린 인디아나 존스역을 맡았다. 1991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의 하룻밤》에 출연해서 젊은 해병을 연기했다. 같이 출연한 주연 여배우는 리버가 자신과 배역을 떨어뜨리는 것을 힘들어할 정도로 배역과 한몸이 되었다고 기억한다. "리버가 연기한 배역은 그와 성격이 너무 달랐다. 히피였던 리버가 해군을 연기하는 것에서 힘들어했다. 그래서 술을 마셨다."라고 회상했다.
3.3 아이다호
리버는 《페어런트 후드》와 《바람둥이 길들이기》라는 영화에 함께 출연해 절친한 친구가된 키아누 리브스와 함께 거스 밴 샌트의 아이다호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리버 피닉스는 어머니를 찾아 여행하는 남자 매춘부 마이크를 연기했다. 《허공에의 질주》와 함께 리버 피닉스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데이비드 안센이란 평론가는 "마이크가 그의 사랑을 고백하는 캠프파이어 씬에서 섬세함이 느껴진다. 그 장면, 그리고 모든 장면에서 리버 피닉스는 마이크로 분한 그의 모습을 너무 깊이 보여줘서 우리가 전에 그를 본 적이 있기는 한가 하고 질문하게 만든다. 아주 대단하게 섬세한 연기였다."라며 평했다. 이 영화를 통해 베니스 영화제, 평론가 협회, 독립영화제에서 주연상을 타게 된다. 이 연기로 인해 리버는 주연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였고, 개성강한 연기파의 이미지를 굳혔다. 이 즈음 리버는 마리화나, 코카인, 헤로인을 복용하기 시작한다. 거스 밴 샌트는 훗날 "핑크"라는 리버에 관한 책을 썼는데, 거기서 리버는 다른 마약 중독자와 달리, 특별한 때만 마약을 복용했고, 대신 알코올 중독 문제가 있었다고 밝혔다. 리버는 그의 커리어에 문제가 생길까 두려워 중독문제를 숨기려고 했다.
후에 로버트 레드포드와 함께 《스니커즈》라는 스릴러 영화를 찍었다. 이때즈음 리버는 《흐르는 강물처럼》의 폴 역할을 브래드 피트에게 빼앗기게 된다. 그 후 《콜리드 러브》라는 음악영화를 찍었고, 이 영화는 리버의 마지막 완성본 영화로 기록된다.
3.4 필모그래피
개봉연도 | 제목 | 배역 이름 | 비고 |
1985년 | 컴퓨터 우주 탐험 Explorers | 울프강 뮬러 Wolfgang Müller | |
1985년 | 운명의 사람들 Surviving: A Family in Crisis | Philip Brogan | TV영화 |
1986년 | Circle of Violence: A Family Drama | Chris Benfield | TV영화 |
1986년 | 스탠드 바이 미 Stand by Me | 크리스 챔버스 Chris Chambers | |
1986년 | 모스키토 코스트 The Mosquito Coast | 찰리 폭스 Charlie Fox | |
1988년 | 지미의 사춘기 A Night in the Life of Jimmy Reardon | 지미 리어든 Jimmy Reardon | |
1988년 | KGB의 아들 Little Nikita | Jeff Grant | |
1988년 | 허공에의 질주 Running on Empty | 대니 포프 Danny Pope | |
1989년 | 인디아나 존스 - 최후의 성전 Indiana Jones and the Last Crusade | 어린 인디아나 존스 Young Indiana Jones | |
1990년 | 바람둥이 길들이기 I Love You to Death | 데보 노드 Devo Nod | |
1991년 | 샌프란시스코에서 하룻밤 Dogfight | Eddie Birdlace | |
1991년 | 아이다호 My Own Private Idaho | 마이크 워터스 Mike Waters | |
1992년 | 스니커즈 Sneakers | Carl Arbogast | |
1993년 | 싸일런트 저스티스 Silent Tongue | Talbot Roe | |
1993년 | 리버 피닉스의 콜 잇 러브 The Thing Called Love | James Wright | |
2012년 | 다크 블러드 Dark Blood | 소년 | 유작[2] |
4 밴드 활동
비록 리버의 연기활동이 가족들의 주 수입원이었지만 리버는 사실 음악에 상당한 열정을 두고 있었다. 친한 친구들, 친척과 함께 연주를 하기 시작했고, 재능이 많았던 리버 피닉스는 노래도 부르고 곡도 쓰고 기타도 쳤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 광고를 찍었고, 연기는 흥미로워서 했지만 레코딩 아티스트가 되는 삶을 꿈꾸기도 했다고 밝혔다. 연기자로 데뷔하기 이전에도 리버는 형제들과 함께 연주를 하면서 길거리를 다녔는데,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서 경찰들에 의해 제지되기도 했다. 지미의 사춘기에서는 리버가 작곡하고 녹음한 노래를 엔딩 크레딧에 넣으려 했는데, 20세기 폭스사에서 잘랐다고 한다. 하지만 감독은 다시 감독판에 넣었다는 후문. 리버는 이후 여동생 레인과 함께 Aleka's Attic 이라는 밴드를 결성한다. Aleka's Attic의 곡 중 한 곡은 아이다호의 사운드 트랙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보통 밴드의 곡은 PETA 같은 보호단체의 자선 앨범에 수록되었다.
5 사회 공헌
리버 피닉스는 동물권리보호와 환경보호 그리고 정치 운동에 힘쓴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PETA의 대변인이었으며 1992년에 모금을 한 것으로 인도주의자 상을 받았다. 1990년에는 어린 팬층을 겨냥한 환경의식 에세이를 썼고 그게 세븐틴이란 잡지에 실렸다.
- 채식주의자였다. 리버의 첫 여자친구 마사 핌프턴은 "우리가 열다섯 살이었을 때 리버와 저는 맨해튼의 비싼 레스토랑에 갔어요. 저는 연한 껍질의 게를 주문했는데 레스토랑을 떠난 후에 리버는 울면서 걸어다니기 시작했어요. 내가 나오자 그는 '난 너를 사랑해... 근데 왜?'하고 말했어요. 그는 내가 동물을 먹는다는 것이 상당히 아픔으로 느껴졌던 거에요."하고 회상했다.
리버는 경제적으로도 많은 환경, 인권 단체에 기부를 했으며, 코스타리카의 위험에 처한 땅을 800에이커 구입했다.
6 죽음
사인은 약물과다복용. 1990년부터 리버는 헤로인과 온갖 약물을 시작했는데 점점 도무지 제어가 안 될 정도로 만성 중독에 빠졌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원인이 되었다.
리버는 조니 뎁과 친했었는데 당시 로스앤젤레스 선셋대로에서 뎁이 운영하던 클럽인 '바이퍼'에 자주 왔었다. 1993년 10월 31일, 핼러윈이자 리버가 사망한 그날도 그 클럽에 들러서 공연을 하기로 되어있었는데, 그 날 아침 리버는 실외에서 쓰러졌고 5분 이상 동안 발작을 일으켰다. 그의 동생 호아킨이 911에 전화를 걸었을 때는 리버가 숨을 쉬는지 안 쉬는지조차 말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그 후 그는 앰뷸런스에 태워져 여러가지 응급치료를 받았지만 그를 구할 수 없었다. 오전 1:51 스물 셋의 나이로 리버 피닉스는 짧은 생을 마감한다.
리버 피닉스의 부검결과로 밝혀진 공식 사인은 급성 다량 약물 중독이다. 혈내에서 많은 양의 헤로인과 코카인 그리고 다른 약물들이 발견되었는데, 평소 복용하던 약물들로 인해 몸이 안 좋아지자, 누군가가 건넨 약을 먹고 이것이 악화되었다는 누군가의 증언이 있다.
사회적 활동을 많이 하고, 소신있는 발언을 자주 했던 리버의 생전 이미지로 인해 사후에 리버는 "채식주의자 제임스 딘"이라고 묘사되기도 했고 다른 요절한 배우들과 비교되어 보도되기도 했다. 리버는 생전에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 크리스천 슬레이터 역에 캐스팅 되어 있었다. 슬레이터는 캐스팅 수익금 전부를 리버가 생전에 기부하던 자선단체에 기부하였으며, 영화 엔딩 크레딧에는 리버 피닉스에게 헌정한다는 문장이 나온다. 거스 밴 샌트는 그의 영화 《밀크》에서 클라이브 존스 역을 리버에게 주기로 했고 90년대에 영화를 제작하려 했지만 결국 그 역은 에밀 허시가 2008년에 연기하게 된다. 그리고 밴 샌트 감독은 리버를 주인공으로 앤디 워홀 영화를 찍으려 했지만 그의 죽음으로 무산되었다고 밝혔다. (워홀의 젊은 시절이 리버와 사뭇 닮아있었다고..), 리버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악연?)인연이 꽤 깊은데, 꽃미남 젊은 배우로 많이 비교되어 회자되었고, 당시 이 시대의 제임스 딘이라는 평가를 받던 리버와 약간 라이벌 구도에 있었던 것도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리버 피닉스는 《바스켓볼 다이어리》에 출연을 앞두고 있었는데, 그의 죽음으로 그 배역은 디카프리오에게 갔고, 국내에는 리버를 모델로 그려졌다고 잘못 소문이 나있던 《토탈 이클립스》도 리버가 아주 큰 흥미를 보이던 작품이라고 한다. 아쉽게도 캐스팅이 시작되기 전에 리버는 죽었고, 모두 알다시피 그 배역은 디카프리오에게 가서 그의 리즈시절 기념비적 영상으로 회자되고 있다(...) 만약 리버가 살아있었다면 우리는 리버의 랭보를 봤을지도 모를 일이다.
리버가 사망할 당시 호아킨이 911에 구조 전화를 건 음성이 녹음되어 방송에 공개되고#유튜브 링크, 장례식장에 리포터가 침입해서 리버의 시신 사진을 찍어가는 등 미디어는 예의없는 모습을 보였고 그에 염증을 느낀 호아킨은 잠시동안 할리우드를 떠난다.
리버의 죽음 이후 어머니 알린(개명 후 하트 피닉스)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기고한다.
" 그의 친구, 동료 그리고 우리 가족들은 리버가 정규적으로 약을 복용하던 사람이 아닌 것을 압니다. 그는 우리와 같이 플로리다 집에서 함께 살았고 클럽 소동의 일부인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그 때 유타에서 6주간 촬영을 하고 왔어요. 우리는 핼러윈과 나이트클럽, 파티같은 분위기가 그의 보통 경험과 아주 벗어나는 것을 잘 알고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젊은 청년들이 약물 복용으로 죽어갔을까요? 저는 리버가 떠남으로써 세상이 그의 세대의 정신이 어떻게 닳아 무너지고 있는지 집중하길 소망합니다. 리버는 지구에 살아있으면서 큰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는 그의 목소리를 찾았고 집을 찾았습니다. 온 세상의 이야길 듣는 걸 잘 하던 리버는 아무도 그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는 것에 좌절했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체르노빌에서 일어난 일에도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엑슨발데즈의 기름 유출 사건에도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피가 튀는 전쟁에도 아직 충분하질 않습니다."
미국의 펑크 락 밴드 레드 핫 칠리 페퍼스는 <Blood Sugar Sex Magik>의 수록곡 'Give It Away' 에 그를 기리는 가사를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