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시아에서 온 드리블러
이름 | 호세 페드로 세아 (José Pedro Cea) |
생년월일 | 1900년 9월 1일 |
사망년월일 | 1970년 9월 18일 |
국적 | 우루과이 |
출신지 | 레돈델라[1] |
포지션 | 인사이드-레프트, 스트라이커 |
신체조건 | 172cm / 73kg |
등번호 | -[2] |
소속팀 | 리토 (1922-1928) 벨라 비스타 (1928-1929) 나시오날 (1929-1935) |
국가대표 | 26경기 / 13골 (1923-1932) |
감독 | 우루과이 (1941-1942) |
1 생애
1.1 선수 생활
1.1.1 클럽
세아는 몬테비데오의 클럽 중 하나인 CA 리토와 1922년에 처음 계약을 했다. 하지만 리토의 전력은 그리 강한 편이 못되었고 1928년에는 아예 리그 꼴찌로 강등을 당했다. 이로 인해 세아는 대표팀의 주장이었던 호세 나사치의 소속팀인 벨라 비스타로 팀을 옮기게 되었고 그곳에서 1년을 보냈다. 그 이후에는 우루과이 리그의 강팀 나시오날에서 남은 선수 생활을 보냈다.
1.1.2 국가대표
세아는 1923년에 국가대표팀에 데뷔하였고 그 대회의 두 번째 시합이었던 브라질전에서 첫 골도 기록하였다. 라이벌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도 승리를 챙기면서 세아는 3경기 만에 첫 메이저 대회 트로피를 차지했다.
이렇게 우루과이는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고 남미 대륙을 대표하는 자격으로 이듬해의 파리 올림픽에 참가하였다. 세아는 4강전이던 네덜란드전에서 동점골을 넣으며 2:1 역전승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결승전에서도 득점을 기록한 세아는 다시 좋은 활약을 펼치며 우루과이의 우승에 큰 보탬이 되었다.
세아는 그 이후의 우루과이의 메이저 대회 정복에서 힘을 보태며 조국이 세계 최강급 강팀으로 명성을 떨치는데 이바지했다. 하지만 1929년의 코파 아메리카는 실망스러웠다. 아르헨티나에게 뿐만 아니라 파라과이에게도 일격을 당하며 3위에 머무르고 말았다.
초대 월드컵에서 세아는 생애 최고의 활약을 보였다. 팀의 우승은 물론 5골을 넣어 팀 내 최다 득점자의 자리에 오른 것. 특히 4강전에서의 해트 트릭과 결승전에서의 동점골이 백미였다. 세아는 1932년 홈에서 열린 브라질전을 끝으로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였다.
1.1.3 이후
은퇴한 지 6년 후, 그는 대표팀의 감독으로 돌아왔다. 처음 참가한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준우승에 그쳤지만, 다음 대회에서는 결국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는 지휘봉을 내려놓았고 이후에는 저널리스트로 활동하였다. 세아는 70회 생일잔치 이후 불과 3주도 안되어 사망했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그는 기술이 뛰어난 선수로 명성이 높았다. 특히 드리블 기술이 뛰어나 상대 수비수를 교란시키는데 능했다고 알려져 있다.
3 뒷 이야기
- 세아의 출생지는 불분명하다. 레돈델라와 몬테비데오 두 곳 중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로 인해 세아의 별명은 엘 바스코(el vasco), 바스크 사람이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몬테비데오에서 보냈다는 것이다.
- 세아는 푸슈카시 페렌츠와 함께 올림픽 결승전과 월드컵 결승전에서 모두 골을 기록한 두 명의 선수 중 한 명이다. 월드컵 우승까지 맛 본 선수는 세아가 유일하다.
4 수상
4.1 클럽
-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2회: 1933, 1934(이상 나시오날)
-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2회: 1931, 1935(이상 나시오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