鮑石亭
1 개요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에 있는 통일신라의 의례 및 연회및 망국의 상징장소로 1963년 1월 21일 지정된 대한민국 사적 제 1호이다.
조성연대는 전하지 않으나 『삼국유사(三國遺事)』 처용랑(處容郞) 망해사조(望海寺條)에 보면 “헌강왕(憲康王)이 포석금(鮑石今)에 놀러나와 남산신(南山神)의 춤을 보고 왕이 따라 추었는데 이 춤을 어무상심(御舞祥審) 또는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 했다” 라는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남북국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927년 신라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최후를 맞은 곳이기도 하다.
2 구조
정자는 없어졌고, 포어(鮑魚)[1]의 형태를 모방하여 만든 석구(石溝)만 남아 있다.
다양한 크기로 다듬은 돌 63개가 사용된 석구의 크기는 길이 10.3m, 폭 7m 정도이고, 물길 길이는 약 22m이다. 물길의 폭은 최소 24cm에서 최대 40cm로 다양하지만, 평균적으로 30cm 정도이다. 깊이도 평균적으로 22cm 정도이며 물길의 입구와 출구의 낙차는 40cm 정도이다.이러한 특징때문에 각 위치마다 속도가 천차만별이다.
흔히 망국의 상징이나 폭군의 사치에 포석정이 비유되지만, 실제론 후백제나 고려에 의해 만들어진 프로파간다일 가능성이 높으며, 실제로는 연회, 제사용 장소로 이용되었던것으로 추정된다.
수로에 술잔을 띄우면 술잔이 수로를 타고 다른사람에게 건너가는 구조이며 수로를 기가막히게 설계하여 술잔이 기울어지거나 부딪히지 않았다 한다. 그냥 부어라 마셔라 하는 용도는 아니고 술이 떠내려가는동안 싯구를 지으며 놀기도 했는데 그리 길지 않은 수로를 물길을 꼬아두고 수로의 깊이까지 계산하여 설계하여 술잔이 오래 떠내려가게하여 시를 지을 시간을 벌게 했다기도 한다. 술잔 타이머 관련기사 석굴암과 함께 통일신라 석조 건축 기술의 정밀함을 알 수 있는 유적.
뒷산에서 물을 받아 토하는 거북 모양의 돌이 있었다고 하나 1871∼1873년 사이에 누군가가 안동으로 옮겨갔다고 전할 뿐 소재를 알 수 없다.
1915년 철거 후 재설치하는 과정에서 없어진 돌은 새로 보충하는 등 임의로 보수되어 수로곡석(水路曲石)의 원형을 잃게 되었다. 거기에 사진 속에도 보이는 나무가 자라면서 돌을 건드려 미세하게 밀려난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 소금에 절인 생선, 전복을 가리킨다. 통설은 전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