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px 신라의 역대 국왕 | ||||||
54대 경명왕 박승영 | ← | 55대 경애왕 박위응 | → | 56대 경순왕 김부 |
시호 | 경애왕(景哀王)[1] | |
성 | 박(朴) | |
휘 | 위응(魏膺) | |
생몰년도 | 음력 | ? [2] ~ 927년 11월 |
재위기간 | 음력 | 924년 ~ 927년 11월 (4년) |
1 개요
신라 제 55대 왕. 신덕왕의 아들이자 경명왕의 동복동생이다. 신라 박씨 왕조의 마지막 왕이며 동시에 후임 경순왕 시대에는 신라의 통치력이 경주 바깥 어느 곳에도 미치지 못하는 도시국가 정도의 안습한 상태까지 떨어졌으므로 실권과 영향력이 어느정도 있었던 실질적인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 볼 수도 있다. 굴욕적인 일화인 포석정의 삽질로 신라 말기 왕 중에서는 꽤 인지도가 있으며 동시에 비극적인 삶을 산 인물이다.
본명은 박위응(朴魏膺), 경명왕 때 상대등을 역임했다. 원래 사위가 물려 받으면 그 직후엔 다시 김씨가 하는게 원칙인데, 경명왕이 즉위했다는 것은 박씨가 상당한 세력을 확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대표적인 세력가가 바로 박위응, 즉 경애왕으로 추측되고 있다.
2 치세
패기에 넘쳐 나름대로 망해가는 신라를 살려보려고 애썼던 젊은 왕.
경애왕은 해외 외교에 상당히 관심이 많았는데, 요사 태조본기에 따르면 926년 1월 거란태조 야율아보기의 발해 상경용천부 함락 때 거란 측에 서서 공을 세운 나라들로 해, 회홀, 토번, 당할, 실위, 오고 등과 함께 신라가 거론되고 있다. 물론 당시 신라는 서라벌조차 겨우 지킬까 말까 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상경용천부 공성전에 파병한 병력은 깃발만 보내는 정도거나, 기껏해야 매우 소수였을 것이다. 그러나 경애왕은 앞으로 발해는 망하고 거란이 승승장구할 것을 용케 예상하고 거란에 잘 보여둬서 나라를 보전에 도움이 되도록 조치를 해 뒀던 것이다. 그리고 927년 2월에는 병부시랑 장분(張芬) 등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면서 중원 국가와도 미리 친분을 맺어 두었다. 이 때 신라는 서해안과 남해안 지역의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에, 강주(경상남도 서부) 지역을 지배하던 반독립세력 왕봉규의 협조를 얻어 남해안을 통해 중국으로 사신단을 보낸 것으로 보이며, 왕봉규도 덤으로 후당에 같이 조공해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 관직을 받았다.[3]
한반도 내부에서도 경애왕은 이전에 방어 내지 방치 플레이에 가까웠던 신라 조정의 대응과 달리 비교적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였다. 후백제가 선왕 경명왕 시기에 대야성을 함락시키는 등 점차 강성해지자 막 건국한 고려의 왕건과 굳건하게 동맹을 맺어두고, 후백제와 고려가 대치하는 전선에 신라군을 파견해 고려와 같이 연합군을 편성하여 백제를 공격하는 등의 성과를 올렸다. 심지어는 후백제와 좀 더 적극적으로 싸워보자고 왕건에게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라고, 노골적으로 왕건 편 들고 후백제를 적대하는 경애왕에 분노한 견훤은 복수극에 나섰다. 후백제는 당시 지금의 경상북도 서부까지 차지하고 있었는데, 신라를 기습공격해 순식간에 경주 바로 옆인 고울부(영천시)까지 다다르자 경애왕은 급히 왕건에게 지원병을 요청하는데, 왕건은 1만 병력을 급파한다. 그러나 고려 지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견훤이 친정하는 후백제군이 경주에 도착했고, 이런 풍전등화의 상황에서도 견훤이 막 도착했을 때 그는 포석정에서 술을 마시며 놀고 있었다. 견훤이 급습하자 연회장은 난리가 났고, 미처 피하지 못한 신하들은 변을 당했다. 경애왕은 도망쳤으나 붙잡혔으며,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막장 플레이에 견훤도 혀를 끌끌찰 정도였다.
결국 경애왕은 견훤의 강요에 의해 자결하는 비참한 운명을 맞았으며, 이후 견훤이 경애왕의 왕비를, 첩들은 장군들이 겁탈했다는 기록이 있다.
3 사후
서라벌을 침공한 견훤은 수도 경주시를 약탈하고 방화를 저질러 화려했던 신라의 보물들과 문화재들이 다수 손실되었다. 경애왕의 자식들은 인질로 견훤이 데리고 갔는데, 그 중 계림대군 순현(舜玄)[4]은 경주 박씨의 정식 시조가 되었다. 겁탈당했다는 경애왕의 왕비는 기록이 없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자식들과 끌려갔거나 치욕감에 자살했을 것으로 보인다.
견훤은 문성왕의 후손인 김부를 왕으로 세우고 철군하니 그가 경순왕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철군하는 견훤을 현재의 대구광역시 팔공산 인근인 공산에서 따라잡았고 공산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그러나 왕건은 여기서 신숭겸의 목숨을 대가로 겨우 살아나 단신으로 도망치는 대패를 당했고, 일시적으로 힘의 균형이 깨진다. 현재 대구광역시 전역에 많이 있는 왕건과 관련된 안습한 지명들은 모두 여기서 유래되었다. 사실상 후백제로서는 이때가 가장 절정기였었고, 견훤이 왕건에게 "나는 평양 성루에 내 활을 걸고, 패강(대동강)의 물로 내 말의 목을 축이게 할 것이다!"라고 패기있게 국서를 보냈던 게 이때에 있었던 일이다.
경애왕릉은 본인이 일생을 마친 포석정에서 가깝다면 가까운 1.5km 정도 남쪽에 있다. 이미 신라의 국력이 쇠할 대로 쇠한 시기에 조성된 능인 만큼 소박한 편이고, 능 주변의 숲이 볼만하다.
4 "포석정 삽질설"에 대한 반론
그러나 현대에는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시되고 있다.
1. 아무리 무능한 왕이라도 그렇지,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분명히 후백제군이 경주 코앞 영천까지 왔다는 걸 인지하고 고려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런 마당에 설마 술을 마시고 놀고 있었을까? 일단 후백제군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 인지를 했고, 고려에게 도와달라는 요청쯤은 할 정도의 개념은 있었다. 아무리 개념없이 굴어도 저정도 개념이 있는데 자기 목숨을 걸고 그런 풍전등화의 상황에 술을 마시고 논다는 게 맞지가 않는다. 2. 포석정은 흔히 그 특이한 물의 흐름으로 술잔을 띄우고 놀았다고 알려진 곳이지만, 경애왕이 붙잡혀 최후를 맞았을 때는 음력 11월, 즉 칼바람이 불고 얼음이 얼기도 하는 한겨울이었으므로 그런 시기에 야외에서 술잔을 띄우면서 한가하게 놀기는 어렵다. 경주는 겨울에도 눈이 잘 안 내리고 얼음도 쉽게 얼지 않는 따뜻한 남부지방이라 술잔을 띄우는 것 자체는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굳이 한겨울 야외에서 달달 떨면서 그거나 구경하고 논다는 것도 좀 부자연스럽다. 3.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애왕조에는 "遊鮑石亭宴娛" 라고 되어 있다. 흔히 "포석정에서 연회를 벌이고 놀았다"라고 해석되는 부분인데 遊는 "놀다" 말고도 "방문하다"라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으며, 실제로 삼국사기에서는 왕이 절에 다녀올 때도 이 글자를 쓴다. 4. 놀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다른 곳도 많았다. 안압지와 임해전 등의 인공호수들. 이 곳들은 신라 말기에도 연회장으로 사용하고 있었고[5] 실제로도 왕과 귀족들의 유희용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곳이다. 이런 놀 곳이 많은데 굳이 포석정에서 놀 이유가 없다. 5. 포석정은 신라의 성산(聖山)인 경주 남산의 중심에 있다. 포석정 북쪽 가까운 곳에는 박혁거세가 나왔다는 나정과 신궁이 있으며, 그 부인 알영부인이 나온 알영정, 박혁거세의 무덤 오릉, 그리고 신라 박씨 왕통의 상징적 장소랄 수 있는 배동 삼릉[6] 등 여러 성지가 많다. 또한 기록에도 '포석정'이란 이름 대신 '포석사(鮑石祠)'란 이름도 자주 나오고 실제로 이 터에서 '포석砲石'이란 글자가 새겨진 기왓장도 발견되어 포석정이 노는 장소가 아니라는 주장이 점차 설득력을 얻고있다. |
과연 포석정이 노는 장소였던건 사실이었을까? 음력 11월은 신라, 고려를 막론하고 팔관회가 있었던 시기였다.
최근에는 이런 의문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설이 제기되었다. 포석정은 사실은 연회의 장소가 아닌 일종의 성지로서, 술잔을 띄우는 그 구조물도 사실은 연회용이 아닌 제례용이었다는 것이다. 나라가 위급해지자 경애왕은 팔관회를 통해 신라의 선조들에게 나라의 평안과 안녕을 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경애왕은 "나라 망하는데도 술쳐먹고 논" 막장 왕이 아닌, 힘이 없어서 군사력으로 막지는 못하고 할 수 없이 살려달라고 신에게 싹삭 빌 수밖에 없던 눈물나는 망국의 군주라고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설이며 정설은 아니다. 별로 의미 없는 정황증거를 제외하면 중요한 근거는 11월에 포석정에 잔을 띄우고 놀 수 없다는 것과 견훤군이 공격해 오는 것도 모르고 놀고 있었겠느냐는 것인데,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 놀았다는 것보다 이 두가지를 더 잘 설명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포석정에서 잔을 띄우는 것이 유희용이건 제사용이건 11월에 사용할 수 없다는 점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또한 견훤군이 공격해 오는 것을 알았다면 비빈들을 거느리고 방어 거점 밖으로 나가는 것은 유희를 위해서건 제사를 위해서건 정신나간 행동인 것은 마찬가지. 정 안 되겠으면 고려 현종이나 조선 선조처럼 지방으로 도망을 간다던지, 아니면 경주 근처의 명활산성 같은 데라도 올라가 농성하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차라리 경애왕이 견훤의 공격 징후까지는 알았어도 구체적인 공격 내용은 몰랐거나, 혹은 견훤의 진격 속도를 잘못된 정보 때문에 오판했을지도 모른다고 해석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아니면 실제로는 견훤이 왕건의 구원 시도에 퇴각하는 척하다 질풍신뢰와 같은 급습을 시도해 경애왕을 죽여버렸는데, 역사적 기록은 이런 견훤의 천재적인 전략전술을 감추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어느 쪽이 맞을지는 각자 알아서 판단해야 할 일.
경애왕이 세상을 떠난 후 간만에 등장한 박씨 왕조는 15년 만에 허무하게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다시 김씨 왕조가 들어선다. 바로 신라 최후의 왕 경순왕. 이런 사실 때문에 백제가 신라 내부의 이러한 갈등을 알고 김씨와 손을 잡고 경애왕을 제거했다는 가설 또한 제기된다. 실제로 경명왕 때는 김씨의 반란 사건도 있었던만큼 박씨가 뜬금없이 재등장해 김씨를 밀어내고 대를 이어 왕을 하는 것에 대해 남아있던 김씨들이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건 분명하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도 김씨 세력의 일부가 박씨를 제거하기 위해 견훤을 끌어들인 것으로 묘사된 바 있다.
5 견훤은 정말 왕비를 강간하였는가?
견훤이 왕비를 강간했다는 기록 또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애왕본기 4년에는 다음과 같은 서술이 있다.
萱又縱其兵, 剽掠公私財物略盡, 入處宮闕, 乃命左右索王. 王與妃妾數人在後宮, 拘致軍中. 逼令王自盡, 强淫王妃, 縱其下, 亂其妃妾.견훤이 또한 병사를 풀어 공사의 재물을 모조리 노략질하고, 궁궐에 들어가 좌우에 명해 왕을 찾도록 하였다. 왕과 비첩 수명은 후궁에 있다가 군사들에게 붙들렸다. 이에 왕을 협박하여 자살하도록 하고, 왕비를 강간하였으며, 아랫사람을 풀어 경애왕의 비첩들을 강간하도록 하였다.
ㅡ《삼국사기》경애왕본기
이 기록이 고려, 그것도 경주 김씨인 김부식에게 쓰여졌음을 생각하면 필요 이상으로 과장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왕건을 높이기 위해서 견훤은 깎아내려져야 했는데 그 일환이 이런 기록이라는 것이다.
이런 잔혹한 행위는 삼국시대에 신라가 백제에게 저지른 일에 대한 복수의 일환이란 해석도 있다. 실제로 과거 백제의 성왕은 비장 도도에게 참수된 머리가 신라의 북청 계단 아래에 묻혔고 의자왕은 항복 직후 태종 무열왕과 제장들에게 술 시중을 들어야했으며 당나라에 끌려가서 당고종과 측천무후에게 모욕당하고 비참하게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7][8] 의자왕의 태자 융은 문무왕이 침을 뱉기까지 했다. 이런 역사적 경위에 따라 견훤도 신라를 정벌한 후 "의자왕의 한을 씻었다."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이미 백제가 망한지 수백년이 흐른 상황에서, 그것도 상주 사람인 견훤이 그렇게 심한 원한을 품었다는 것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물론 견훤은 자신의 지지기반인 백제 유민들에게 뭔가 보여줄 만한 보복행위가 필요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9] 여하간 이 기록을 뒤엎을 수 있는 사료는 현재까지는 없으므로 해석은 알아서 하길.
게다가 승자가 패자 우두머리의 아내를 강간하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는 패자의 모든 것이 승자에게 예속되었음을 알리는 하나의 정치적 이벤트로 행해지는 일이었다. 구약성경을 보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예루살렘을 점거한 후 다윗의 후궁들을 공개적으로 강간했고 티무르도 사로잡은 오스만 제국 술탄 바예지드 1세의 황후를 바예지드가 보는 앞에서 스트립쇼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0] 다만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대단히 드문 일이었음도 유의. 이쪽에서 찾아봐야 수문제와 선화부인 정도다.
태조 왕건에서는 견훤이 경순왕과 술을 마시던 도중 온갖 굴욕을 당하며 목숨을 구걸하고, 경애왕의 왕비에게 자신의 시중을 들라고 말했다가 막상 경애왕의 왕비가 치욕으로 여겨 자살하자 당혹스러워 하면서 그렇게까지 할 마음은 없었다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마도 제작진측에서는 역사적인 사실은 있었으되 후대에 후백제를 깎아내리려는 서술로 확대된 것으로 여겼던 듯.
배우는 문회원. 재미있게도 경애왕을 연기한 문회원과 견훤을 연기한 서인석은 훗날 제5공화국에서 각기 황영시와 노태우를 연기하게 된다.
어디선가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술을 마시며 놀다가 지은 <번화곡(繁花曲)>이 전한다. 진짜로 경애왕이 이런 시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번 감상해 보자. #
기원실제혜이사동(祇園實際兮二寺東)양송상의혜나중(兩松相依兮蘿中)
회수일혜화만오(回首一兮花滿塢)
세무경운혜병몽롱(細霧輕蕓兮幷濃)"기원정사[11]와 실제사, 두 절의 동쪽에
소나무 한 쌍이 등넝쿨 속에 기대 있도다.
머리 들어 한 번 바라보니 꽃이 언덕에 만발했는데,
옅은 안개와 가벼운 구름이 둘 다 몽롱하구나."
6 삼국사기 기록
一年秋八月 경애왕이 즉위하다
一年秋九月 태조에게 사신을 파견하다
一年冬十月 신궁에 친히 제사지내고, 대사면을 하다
二年冬十月 태조가 투항한 능문을 돌려보내다
二年冬十一月 견훤이 진호를 고려에 인질로 보내다
三年夏四月 진호가 갑자기 죽자, 견훤이 고려를 향해 진군하다
四年春一月 태조가 백제를 친정하자, 왕이 그를 돕다
四年春二月 장분 등을 후당에 조공 보내자, 후당에서 관직을 제수하다
四年春三月 황룡사 탑이 흔들려 북쪽으로 기울다
四年春三月 태조가 친히 근암성을 깨뜨리다
四年春三月 명종이 왕봉규를 회화대장군으로 삼다
四年夏四月 왕봉규가 임언을 후당에 사신으로 보내다
四年夏四月 강주 관할 하의 4개 향이 태조에게 귀부하다
四年秋九月 견훤이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고 경순왕을 세우다
- ↑ '경애왕'의 '경(景)'과 '애(哀)'가 어설픈 일본 사학자들에 의해 각각 발해 13대 왕 대현석과 발해 15대 왕 대인선에게 매치되어 이들이 '경왕', '애왕'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개별 항목 참고.
- ↑ 어머니 의성왕후 김씨가 헌강왕의 딸이다. 어머니의 나이를 최소한 870년대 중반생으로 보아도 죽었을 당시 나이는 아무리 많이 잡아봐야 30대 후반이다.
어라? 태조 왕건에서는 적어도 50대로 나오던데? - ↑ 그러나 그나마 제3세력치고는 힘이 있던 왕봉규도 고려와 후백제라는 두 고래 싸움에 껴서 새우등 터지듯 927년이 지나기도 전에 곧 망한다.
- ↑ 다른이름으로는 입순(立舜) 혹은 수현(受玄).
- ↑ 예를 들어 경순왕 때 왕건이 서라벌로 찾아오자 안압지에서 연회를 열어 왕건을 접대했다.
- ↑ 초기신라 박씨 왕조 마지막 왕인 아달라 이사금과, 후기 박씨 왕조의 두 왕(신덕왕, 경명왕)도 여기에 묻혔다고 알려져 있다.
- ↑ 안습한 것은 의자왕보다 훨씬 암군이자 폭군이었던 손호, 진숙보 곁에 묻혔다. 이전 항목에서는 이건 망국의 군주들을 싸잡아서 비웃으려는 의도였다고 서술되어 있었는데, 그럴 의도였더라면 옛 신하들에게 곡을 하도록 허락하는 등의 조치를 취할 리가 없으므로 이것은 비웃기보다는 '망국의 왕이었음에도 나름대로 대접해주었다' 라고 보는 쪽이 실상에 가까운 듯 하다.
- ↑ 라는 가설도 많이 퍼져 있으나 현재는 당나라에 끌려간 백제 왕족들은 꽤 대우를 받았다는 가설이 더 설득력 있다고 본다. 의자왕의 장례 또한 나름 왕으로서의 대접을 해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의자왕 항목 참조.
- ↑ 궁예가 친아버지인 경문왕의 초상화에 검을 꽂은 것이, 궁예의 개인적인 감정에서라기보다 옛 고구려 유민들의 보복행위를 대신한 것이라는 해석과 같은 맥락.
- ↑ 세르비아 공주 출신인 바예지드의 황후 올리베라 데스피나가 티무르와 그 신하들 앞에서 알몸으로 술시중을 들고 춤을 추었다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세르비아의 초기 기록에만 보이기 때문에 세르비아인들이 대중 선동용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게 현재 통설이다.
- ↑ 인도 마칼타국의 수달장자가 부처님(석가모니)을 위해 세운 절의 이름을 딴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