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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월드컵 출전 선수 중 최후의 생존자
이름 | 프란시스코 안토니오 바라요 (Francisco Antonio Varallo) |
생년월일 | 1910년 2월 5일 |
사망년월일 | 2010년(!!) 8월 30일 |
국적 | 아르헨티나 |
출신지 | 라플라타 |
포지션 | 인사이드 라이트[1] |
신체조건 | 170cm / 70kg |
등번호 | -[2] |
소속팀 | 힘나시아 라플라타 (1929-1930) 벨레스 사르스필드(임대)(1930-1931) CA 보카 주니어스(1931-1940) |
국가대표 | 16경기 / 7골 (1930-1937) |
목차
1 생애
1.1 어린 시절 & 데뷔 무렵
프란시스코 바라요는 1910년 2월 5일, 라플라타의 로스 오르노스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페드로와 어머니 테레사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고 어린 시절부터 축구를 좋아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족들과 친구들은 그런 그를 판초라는 별명으로 불렀는데 그는 이 별명을 매우 마음에 들어했다.
1928년, 당시 18살의 바라요는 3개의 클럽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았다. 그 중 고향팀인 힘나시아 라플라타를 선택했고 3부 리그 팀과의 데뷔전에서 상대를 말 그대로 초전박살을 냈다. 팀이 무려 8골을 넣은 것. 바라요는 이 활약으로 1주일 만에 1군 무대에 서게 되었다.
1929년 시즌에 데뷔한 바라요는 신예답지 않은 훌륭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1.2 초대 월드컵
초대 월드컵 개최 당시 프란시스코 바라요는 힘나시아 라플라타가 1929년 시즌에 아르헨티나 리그를 제패할 때 가능성을 보였던 어린 선수였고, 월드컵 대표팀에 선발되었을 당시에는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가장 어린 선수였다. 그는 팀의 첫 경기였던 프랑스전에 선발 출전하였고 다음 경기인 대 멕시코 전에서 한 골을 넣었다. 다음 두 경기에는 부상으로 선발 명단에 들지는 못했지만 결승전에서도 선발 출전했다. 즉, 경험을 쌓기 위해 명단에 들어간 건 아니었다.
1.3 이후 선수생활
1930년 말과 1931년 초에는 잠시 벨레스 사르스필드의 투어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는 벨레스 팀과 함께 25경기를 뛰었으며 20승을 거두었고 14골을 집어넣는 활약을 보였다.
이런 젊은 공격수에 대한 관심은 당연히 뜨거웠다. 아르헨티나의 다른 클럽들은 물론이고 물건너 제노아와 나폴리 등 이탈리아의 팀들도 영입 전쟁에 나섰다. 돈은 이탈리아 클럽들이 더 불렀지만 부모님의 설득이 주효했다. 결국 1931년 CA 보카 주니어스로 이적한 바라요는 이적료로 대략 8000달러를 받았다.[3]
CA 보카 주니어스에서 그는 4골을 기록하는 경기를 포함하여 데뷔 시즌에 득점 3위를 차지하여 성공적으로 보카에 적응하였다. 1934년에 득점왕을 차지하기도 하는 등 최고의 활약을 펼쳤고,[4] 팀도 리그에서 승승장구했다. 210경기에서 181골을 넣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의 181골은 아직도 보카 주니어스 역사상 세 번째로 많은 득점 기록이다.[5]
1937년에는 그의 커리어에서 최초로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여 국제 대회의 정상에 오르는 기쁨을 맛보았다. 하지만 이듬해에 심각한 무릎 부상을 입게 되었고 그 이후의 커리어는 개점휴업 상태가 되고 말았다. 결국 1939년에 라이벌 CA 리버 플레이트를 상대로 마지막 득점을 기록했고 결국, 30살의 젊은 나이로 은퇴하게 된다. 바라요가 활약하던 기간 동안 로베르토 체로와 델핀 카세레스, 바라요 3명이 기록한 통산 득점은 499골에 달한다.
1.4 최후의 생존자
보카 주니어스에서 2군 감독과 친정팀 힘나시아의 수석 코치 생활 이후 한동안 잊혔던 바라요는 1994년에 다시 재조명되었는데 FIFA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 중 하나인 Order of Merit를 받았기 때문이다.
2008년, 마르틴 팔레르모가 그의 기록을 넘고 로베르토 체로의 기록까지 넘어 CA 보카 주니어스의 역대 최다 득점 기록 보유자가 되었을 때에는 팔레르모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는 등 정정한 활동을 했고, 2010년 2월 5일. 그의 100번째 생일에는 조국 아르헨티나는 물론 결승전의 상대였던 우루과이에서도 큰 관심을 보였었다. 그 때 FIFA의 주관으로 진행되었던 인터뷰에서 가장 아쉬웠던 순간으로는 당연하게도 초대 월드컵 결승전의 패배를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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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바라요의 100번째 생일
그리고 같은 해인 8월 30일 그의 고향 라플라타에서 천수를 다했고, FIFA 회장 제프 블라터와 남미 축구협회장 니콜라스 레오스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단단한 체구와 좋은 컨트롤, 그러면서 민첩한 몸놀림으로 수비진의 빈틈을 파고드는 플레이를 펼쳤다. 또한 강력한 슈팅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별명이 Cañoncito. 작은 대포였다. 페널티 킥에도 강점을 가지고 있어서 통산 22회의 페널티 킥 시도 중 18회를 성공시켰다.
하지만 내구도가 약한 것이 흠. 무릎 부상으로 인해 상술한대로 그는 30살에 은퇴해야 했다.
3 뒷이야기
- 바라요는 초대 월드컵 결승전의 선수 선발과 우루과이의 게임 방식에 대해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월드컵의 마지막 시합에서는 우리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어쩌다보니 내 포지션인 인사이드 라이트만 다섯 명이 나왔고… 감독은 추첨을 통해 나를 남겨놨죠.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거친 경기였어요. 그들은 오만에 가득차서 저희를 가격했죠. 최악은 그 상황에서 몇몇 동료들이 나태해지고 환경에 겁을 먹었다는 겁니다. 전반에는 쉽게 풀어갔지만 어떻게든 이길 수는 없는 싸움이었어요. 마치 10명이 싸우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변화를 줄 수 없었어요.
-프란시스코 바라요[6]
- 1931년 9월의 수페르클라시코 역시 인구에 회자되는 시합 중 하나이다. 주심의 페널티 킥 선언에 불만을 품었던 CA 리버 플레이트의 선수들이 단체로 반발하는 사태가 일어난 것. 그 와중에 당시 리버의 골키퍼 이리바렌은 그에게 도전하던 3명의 선수와 싸우는 기행을 벌이기도 했다.
4 수상
4.1 클럽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4회: 1929(힘나시아), 1931, 1934, 1935(이상 CA 보카 주니어스)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1회: 1933(LAF)(CA 보카 주니어스)
4.2 국가대표
- 월드컵 준우승 1회: 1930
-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1회: 1937
4.3 개인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 1회: 1934
- FIFA Order of Merit: 1994
- 남미 Order of Merit: 2006
- ↑ 현재의 포지션으로는 섀도우 스트라이커 또는 공격형 미드필더
- ↑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 ↑ 하지만 이듬해에 베르나베 페레이라가 23,000파운드의 이적료로 CA 리버 플레이트에 이적했다. 이 때 기록된 23,000파운드는 1952년까지 20년 동안 최고 이적료였다
- ↑ 1934년 호키 컵에서는 라싱 클루브를 상대로 6골을 넣기도 했다
- ↑ 초대 월드컵에서 불안발작증세 때문에 경기를 많이 못 뛰었던 로베르토 체로가 그의 동료였다. 체로는 보카 주니어스의 통산 득점 기록에서 바라요의 바로 위에 있고, 1위는 마르틴 팔레르모이다. 그리고 펠레나 게르트 뮐러, 리오넬 메시 같은 놈이 미친 거지 이 기록도 충분히 대단한 기록이다. 하지만 지역 라이벌인 CA 리버 플레이트에서 뛰던 앙헬 라브루나의 통산 득점 기록이 293골이라 묻히는 감도 있다
- ↑ 출처: El récord es de Varall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