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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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물 하마를 학살하는 게 아니다

Hama massacre/ مجزرة حماة 하마 대학살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1982년 시리아 하마(Hama)시에서 벌어진 학살 또는 전투를 가리키는 말이다. 시리아군 육군 중장이던 리파아트 알 아사드(رفعت الأسد‎)가 지휘하는 시리아군이 무슬림 형제단 본거지인 하마 시를 초토화한 사건이다.

그런데 2010년대 들어서 벌어진 시리아 내전 여파로 추가적인 학살이 벌어지고 말았다...

2 원인

시리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시리아 현 독재자인 바샤르 알 아사드도 그렇고, 이 당시 독재자이던 하페즈 알 아사드, 이 사건을 지휘한 하페즈의 아우인 리파아트 알 아사드(1937~ ) 또한 이슬람에서 극소수 종파인 알라위 신도이다. 극소수 종파이자 기독교랑 그다지 원수진 일도 없던 터라 오랫동안 묻혀졌던 알라위는 아사드 일가가 집권하면서 여러 면에서 큰 대우를 받았고 나아가 종교 세속정책을 강화하면서 시리아 토속 기독교나 소수 기독교에게도 매우 관대한 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이에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불만을 가진 건 당연했다. 처음에는 세력은 미미했기에 하페즈 알 아사드는 코웃음치며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1976년 시리아 육군 사관학교에 폭탄 테러를 가해 장교후보생 83명이 죽으면서 이야기는 달라졌다. 연이어 알레포, 다마스쿠스에서 폭탄 테러가 벌어지자 아사드는 분노했다.

더불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1980년 6월 26일, 시리아를 방문한 말리 대통령 축하 행사에서 하페즈 알 아사드 및 정부, 군부 요인들을 향한 수류탄 공격을 감행하였다. 아사드 앞에 수류탄이 떨어졌지만 그는 침착하게 발로 차내서 위기를 모면했고 다른 수류탄이 떨어지자 경호원 1명이 수류탄을 품고 엎드려서 폭사했다.[1] 아사드는 위기를 모면했지만 하페즈의 친구인 국방장관 및 상당수 정부요인들이 죽었기에 두고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먼저 시리아 곳곳에 갇혀있던 극단주의자 1200명을 재판 없이 즉결 사형에 처하며 죽은 친구 및 관료들, 경호원에 대한 보복을 먼저 했다. 그리고 대대적인 이슬람 극단주의자 뿌리 뽑기에 나서면서 극단주의자 본거지인 하마 시를 아주 박살내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하마에 대한 공격을 꽤 오랫동안 심사숙고했는데 1979년 인구조사 통계에선 하마 시 인구는 약 19만 명에 달할 만큼 꽤 큰 도시였기에 함부로 공격하기엔 여러가지 복잡한 일이 많았기에 1년 반이 넘게 걸렸다.

3 대대적인 공격

우선 무슬림 형제단에 대해서 최후통첩을 하고 일반 시민들도 도시를 떠나지 않으면 반란군으로 간주하겠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형제단 이 개쌍놈들이 나가면 죽인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하마에 남은 민간인도 많았다...

1982년 2월 3일 아침, 리파아트 중장이 이끄는 시리아군은 아부 바크르라고 불리우는 무슬림 형제단 지도자 제거 및 대대적인 무슬림 형제단 뿌리 뽑기에 나서면서 본거지 하마로 쳐들어왔다. 아부 바크르는 지하드(성전)를 외치며 자폭 및 여러 공격으로 맞서게 했으며 2월 28일 시리아군이 전투 종료를 선언할 때까지 하마 시는 철저하게 박살난다.

자세한 전투력 동원은 알려진 바 없고 그저 추정으로만 시리아군은 전군 3만에 달하는 육군 및 공군 폭격까지 벌였다.

4 피해 사항

시리아가 이걸 국제적인 조사를 허용할 리도 없기에 자세한 사항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저 추정치로만 최저 7천명에서 최대 4만 이상이 죽었다고 할 뿐이다. 이에 시리아군도 약 500~1000명 정도 전사자를 낸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지도자인 아부 바크르는 끝내 죽은 것으로 드러났다. 물론 고아가 되거나 부상을 입은 피해자는 더 엄청나게 많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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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로 하마 중심부에 있었던 옛 궁전과 모스크도 사라졌다. 진압군은 하마 시내를 뒤지고 다니면서 부상자들까지 찾아내 확인사살했다고 한다.

5 학살인가, 전투인가

1982년 3월 미국이나 유럽 언론은 Hama massacre, 즉 하마 학살이란 이름으로 이를 보도했다. 하지만 미국으로선 그 학살된 무슬림 형제단이 되려 적이었기에 무턱대고 시리아군이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는 비난을 삼가고 전투 와중에 무고한 민간인 피해도 컸다고 하는 정도로 보도했다.

당연히 시리아 정부는 학살은 뭔 개소리냐며 광신도들은 자폭 공격으로 응수하면서 아군 피해도 절대로 가볍게 본 게 아니라는 투로 반격하며 당시 사상당한 시리아군 사진이나 자료를 보이며 학살이 아니라 광신도 토벌에 따른 전투라고 반론에 나섰다. 지금도 당연히 시리아 정부는 전투라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시리아 여론은 시리아 정부를 무척 옹호했는데 무슬림 형제단의 자폭 공격에 무고한 민간인들을 억지로 위협하여 썼다는 비난이 거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자폭 공격은 21세기에 부활하게 된다

6 그 뒤에

그 뒤에 아사드 군부는 하마 시에 대한 재건을 철저하게 했고 당시 포격 및 많은 전투 및 학살 흔적은 깨끗하게 사라졌다. 2013년 인구조사론 31만에 달하며 시리아에서 4번째로 큰 도시로 집계되었다.

이렇게 잊혀지던 이 학살은 2011년 시리아 내전이 다시 벌어지면서 또 이 도시에서 부활하게 된다. 반아사드 구호를 외치며 하마가 반아사드 저항의 성지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결국 2012년 하마 시에 있는 마즈라트 알쿠베이르 마을에서 친정부 민병대 샤바하에 의하여 최대 100명이 학살당한 것이 드러났다.

이를 두고 국제적 논란이 거셌는데 우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학살이라며 시리아 정부를 비난했다. 이에 시리아 정부는 이번 학살이 테러리스트 짓이며 희생자 규모도 9명에 그친다고 항변했지만 샤비하가 학살을 저질렀다는 구체적인 증언이 이어지고 있다. <로이터>에 따르면 마을 인근 올리브 숲에 숨어 학살을 피한 한 농부는 민병대와 정부군이 알베이르 마을의 가옥 3채 안에서 총을 쏘고 시신을 집 밖으로 끌어내 불태우는 것을 목격했다고 밝혔다.

<가디언>도 알쿠베이르 외곽에 살던 아부 히샴 알하마위라는 주민이 마을 주변의 알라위트파 마을에서 온 샤비하 민병대가 그의 집 앞을 지나쳐 알쿠베이르로 향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전했다. 이 주민은 그 민병대들이 어린 시절 같은 학교에 다니던 이들이라서 정확히 알아볼 수 있다면서 정부군과 함께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 주민은 또 알쿠베이르가 지난해 시리아 반정부 시위 이후 정치적인 행동에 나서거나 반군의 거점이 된 적이 없는 평범한 농촌이라고 이번 학살의 타깃이 된 점에 억울함을 호소했는데 사건 진상 파악은 시리아 내전이 장기화되면서 흐지부지되고 있다. 거기에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라는 더할 나위 없는 사이코들이 온갖 학살에 문화재 파괴, 별별 쓰레기 같은 일을 저지르는 통에 이 학살도 덩달아 묻혀져 가고 있다...
  1. 아사드는 자기 목숨을 구하고 대신 죽은 이 경호원에게 훈장 및 국가 유공자로 대우하고 유족들에게도 후한 연금으로 보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