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하페즈 알-아사드(حافظ الأسد; Ḥāfiẓ al-ʾAsad) |
생몰년 | 1930년 10월 6일 ~ 2000년 6월 10일 |
출생지 | 시리아 카드라하 |
사망지 | 시리아 다마스쿠스 |
정당 | 시리아 바트당 |
종교 | 알라위파 이슬람 |
자녀 | 아들 바샤르 알 아사드 외 5인 |
1 개요
아랍의 비스마르크, 대부. 하지만 반대파 입장에서는 그저 시리아의 독재자이자 학살자. 레바논 입장에서는 이스라엘과 별 다를 바 없는 침략자.
시리아의 전 대통령. 1971년부터 2000년 사망할 때까지 대통령직에 있었으며 차남 바샤르 알 아사드가 자리를 물려받았다.
2 생애
1930년 시리아 북부 해안도시 카르다하에서 농부 알리 술레이만 알 아사드의 아들로 태어났다. 1955년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바트당에 가입, 바트당이 집권한 1963년 쿠데타에서 요직을 맡았으며 1965년 공군사령관, 국방장관에 되었다. 그리고 1970년,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하여 아사드 부자의 독재가 시작되었다.
집권 기간 동안 하페즈는 대외적으로 이스라엘에 강경한 태도를 취하는 한편 정치적으로도 능력이 있어서 아랍에서 시리아의 위상을 높아갔고 그 때문에 '아랍의 비스마르크'로 불렸다. 대내적으로는 1946년 독립 이후 쿠데타가 끊이지 않던 시리아의 정국을 안정시켰다는 평가도 받기도 한다. 물론 이 안정은 반대파에 대한 탄압과 학살을 바탕으로 했으나 그 반대파가 이교도 다 죽어라는 중세식 사고를 가진 극단주의 순니파라서 막연한 정치적 올바름으로 재단할 수 있냐는 반론이 재기된다. 악인이라도 IS랑 별로 다를것도 없는, 밥먹고 코란외는거 말곤 할 줄 아는게 없는 수니파보단 나은 차악이라는 것.
집권 이후 하페즈 얼 아사드는 철권통치를 했다. 1963년 선포된 국가비상사태법[1]을 적용해 반대파 인사 수천 명을 감옥에 가두었으며 1982년엔 무슬림형제단을 유혈 진압했다. 이때 하마 시에서는 2만여 명이 숨진 것으로 전해지는 데 이를 하마 학살이라고 불린다.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 무슬림 형제단을 진압하기 위해 벌인 학살이라 이슬람 테러를 혐오하는 서구권에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시 하나를 아예 초토화시키고 주민이 1만여명이 사망했으니 독재 정권 유지를 위한 과잉진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수니파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그를 먼저 암살하려고 했다가 벌어진 학살인 것에서 알 수 있듯, 적어도 종교적으로는 세속정책을 취했다. 걸프전때는 아예 미국편을 들었다.
또한 레바논 내전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했으며 1990년대 들어 종교적 갈등이 어찌어찌 봉합된 이후로도 레바논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던 중 하페즈는 69살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아사드 대통령의 사인을 심장마비로 확인됐으며, 심한 당뇨병으로 고생해온 그의 건강이 급격하기 악화된 것이 원인이였다고 한다. 그가 사망하자 시리아 국영 TV는 “아랍의 위엄을 지키고 권리를 회복시키기 위해 오랜 세월 싸워온 아사드 대통령이 10일 아침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또한 하페즈 알 아사드 대통령의 사망과 함께 시리아 의회는 서둘러 특별회의를 소집했고 그의 아들인 (바샤르 알 아사드. 당시 나이 34세.)가 대통령직을 승계할 수 있도록 대통령 연령을 40세 이상으로 제한한 헌법 제83조를 수정했고 바샤르 알 아사드가 시리아의 대통령이 되었다.
3 기타
북한의 독재자 김일성과는 매우 친했다고 하며 서로서로 선정용 포스터를 각 나라에 보내줄 정도였다고 한다.- ↑ 이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