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신토 킨코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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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로하 최초의 세계적인 수비수

이름하신토 프란시스코 페르난데스 데 킨코세스 이 로페스 데 알비나
(Jacinto Francisco Fernández de Quincoces y López de Arbina)
생년월일1905년 7월 17일
사망년월일1997년 5월 10일
국적스페인
출신지바라칼도[1]
포지션수비수
신체조건181cm / 78kg
등번호-[2]
소속팀데포르티보 알라베스(1923~1930)
레알 마드리드(1930~1942)
국가대표25경기 / 0골
감독레알 사라고사(1942~1943)
스페인(1945)
레알 마드리드(1945~1946)
레알 마드리드(1947~1948)
발렌시아 CF(1948~1954)
아틀레티코 마드리드(1954~1955)
레알 사라고사(1956~1958)
발렌시아 CF(1958~1959)
레알 마드리드 CF 역대 감독
라몬 엔시나스
(1943~1945)
하신토 킨코세스
(1945~1946)
발타사르 알베니스
(1946~1947)
발타사르 알베니스
(1946~1947)
하신토 킨코세스
(1947~1948)
마이클 키핑
(1948~1950)
발렌시아 CF 역대 감독
루이스 카사스 파사린
(1946~1948)
하신토 킨코세스
(1948~1954)
카를로스 이투라스페
(1954~1956)
루이스 미로
(1956~1958)
하신토 킨코세스
(1958~1959)
페드루 오투 붐벨
(1959~1960)

1 선수 시절

하신토 킨코세스는 바스크의 바라칼도 출신이다. 그의 성인 무대 데뷔는 18살에 데포르티보 알라베스[3]에서 이루어졌다.[4] 알라베스에서 활약하던 킨코세스는 팀에 큰 선물을 안겨주었다. 바로 1위로 새로 창립된 알라베스를 라 리가에 진출시킨 것. 그 활약으로 킨코세스는 레알 마드리드의 유니폼을 입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킨코세스 외에도 스페인 최고의 골키퍼 리카르도 사모라까지 RCD 에스파뇰에서 빼앗아옴으로서 단숨에 전력을 급강화시켰다. 하지만 레알 마드리드는 이후 3시즌에서 계속 2위를 하며 콩의 기운을 한껏 내뿜었다. 승점차도 꼭 1,2점차였다

골키퍼와 중앙수비수로 호흡을 맞춰가던 킨코세스와 사모라는 스페인 대표로 1934년 월드컵에 출전했다. 지역예선에서는 포르투갈을 만나 2차전 합계 11:1로 떡실신시키고 이탈리아에 갔다. 세계 각지의 강호들 사이에서도 스페인의 전력은 돋보였다. 사모라와 킨코세스가 버티는 수비진도 그랬고, 이시드로 랑가라 등이 버티는 공격진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더구나,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를 세계 최초로 깨뜨린 비영연방팀이기도 했다.

그들은 첫 경기에서 브라질을 만났고, 브라질을 3:1로 가볍게 제압했다. 하지만, 다음 상대는 개최국 이탈리아였다. 1차전에서 스페인은 리카르도 사모라의 신들린 선방으로 비기는데 만족해야했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사모라는 부상으로 재경기에 출전할 수 없었고 주장 완장도 킨코세스가 넘겨받은 채 이탈리아의 파상공세에 대비하였다. 결국, 킨코세스의 투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은 이탈리아의 메아차에게 얻어맞은 단 한 골로 인해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승리와 우승은 이탈리아에게 돌아갔지만, 이 경기 등에서 보여준 심판의 우유부단함과 이탈리아 선수들의 거친 플레이는 많은 뒷이야기를 낳았고 이탈리아에게 패했지만 명승부를 보여준 세 팀의 명성은 더욱 올라갔다.

이후 1936년에는 레알 마드리드의 새로운 주장이 되었지만 스페인 내전이 터지는 바람에 라 리가가 중단되었고, 내전으로 인해 선수를 대거 잃은 레알 마드리드는 50년대까지 긴 암흑기를 거치게 된다.[5]

그리고 킨코세스는 감독 자리에서 은퇴후에 발렌시아와 바스크 선수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단체인 Valencian Pilota Federation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또한 킨코세스는 축구 선수에서 은퇴한 이후 영화에도 출연했는데 Campeones, El camino del amor-사랑의 길, Tierra sedienta-목마른 길, Once pares de botas-11켤레의 신발 등 총 4편의 영화에 배우로 출연했다. Saeta rubia와 Ciento catorce goles-114개의 골에는 자기자신의 역할로 출연하기도 했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위치선정과 반사신경이 좋아서 길목차단과 커팅에 능한 수비수로 알려져 있다.

3 수상

3.1 클럽

라리가 우승 2회: 1931~32, 1932~33(이상 레알 마드리드)
코파 델 레이 우승 2회: 1934, 1936(이상 레알 마드리드)

3.2 개인

FIFA 월드컵 베스트 11 1회: 1934

3.3 감독

코파 델 레이 우승 3회: 1946(레알 마드리드), 1949, 1954(이상 발렌시아)

코파 에바 두아르테[6] 우승 1회: 1949(발렌시아)
  1. Barakaldo. 바스크 비스카이 지방의 도시로 쿠바의 도시 Baracaldo와는 다르다.
  2.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3. 현재도 프리메라 리가와 세군다 리가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는 팀이다. 2005~06시즌에 잠시 라 리가에 올라왔지만 한 시즌만에 다시 강등당했다.
  4. 일부 문서에서는 킨코세스의 데뷔를 1920년으로 잡고 있으나 그렇게 가정하면 킨코세스의 나이가 15살이라는 문제와 함께 데포르티보 알라베스의 설립년도인 1921년에도 맞지 않는다. 따라서 킨코세스의 데뷔는 1923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5. 우승만 못하고 롤러코스터 순위를 탔으니 레알 마드리드 입장에서는 암흑기다. 그리고 킨코세스가 은퇴한 바로 다음 시즌인 1942~43시즌에는 14개 팀 중 10위라는 치욕을 맛보기도 한다. 여담으로 레알 마드리드의 라 리가 최악의 성적은 1947~48 시즌의 11위였다. 당시에는 라 리가 전체 팀이 14개였고 13위와 14위가 강등을 당했으니 꼴찌 바로 위였다. 게다가 실제 강등을 당했던 13위 레알 소시에다드와의 승점차는 불과 2점이었다. 즉, 아직 레알 마드리드는 세군다 디비전에 내려가본 적이 없다는 소리. 그리고 이 시즌은 킨코세스의 흑역사였다. 이 때 감독이 바로 킨코세스였으므로...
  6.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의 전신.